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여니책방 Jan 22. 2024

곰같은 며느리가 생신상 거하게 차려드릴게요.

호랑이 굴에 들어가도 정신만 차리면 산다고 했나.

결혼 10년이 지나도 나는 아직 시아버지에게 적응 중이다. 가정적이고 다정하며 큰 소리 한 번 없는 친정아빠와는 정반대인 아버님. 만날 때마다 두려움에 가슴이 쪼그라들어 아무 말 없이 고개만 끄덕이다 집에 돌아온다. 항상 당당하고 자신감 넘치는 시아버지. 그런 아버님이 많이 아프시다.



"아빠가 췌장암 말기래.."

남편의 전화에 잠시동안 말을 이어갈 수 없었다. 나보다 더 충격이 컸을 남편 때문에 간신히 정신을 붙잡고 병원으로 향했다. 병원에서 어머님을 만나자마자, 끌어안고 한참을 울었다. 호랑이보다 무섭던 시아버지, 내게 함부로 대했던 많은 기억, 상처 받았던 일들은 허공 속으로 사라졌다. 그저 안타깝고 무섭고 걱정되고 죄송한 감정만이 남아 있었다.



집으로 퇴원한 아버님을 마주했을 때 남편은 밖으로 나가 한참을 울었다. 세상 무서울 것이 없던 그 기세는 어디 갔을까. 침대 위에는 하루에 1년씩 시간을 잃어버린듯한 노인이 누워있었다. 나이보다 10년은 젊어 보이셨던 분인데 어찌하여 열흘도 안된 사이에 20년의 시간을 홀로 잃어버린 모습인지. 더 자주 찾아뵙지 못해 죄송했다.



시간은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주어지지만 언제까지 주어졌는지 알 수 없다. 요즘 같은 100세 시대에 응당 남은 시간이 많다고 자만하다니, 어리석고 안타까운 마음이 든다. 전화만 오면 눈시울이 붉어져 나오는 남편을 보니, 그동안 소파에 누워 핸드폰 하던 모습도 그립고 소중해진다. 우리 가족에게 얼마의 시간이 남아있을까.



"엄마 할머니한테 잘해야 돼!"

사랑이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엄마는 할머니가 없으면 이 세상에 존재할 수 없잖아. 그러니까 할머니한테 잘해야지. 나는 엄마한테 잘해야 하고."

9살인 너도 아는걸, 나는 잊고 있었다. 아낌없이 주는 나무 같은 부모님의 사랑은 내 마음속에서 점점 희미해지고 모든 사랑과 관심은 내 아이에게만 주고 있었다.



가끔 남보다도 못하다고 생각했다. 남편의 아버지일 뿐이라고.

그런데 세월은 무시할 수 없나 보다. 이렇게 슬프고 안타까운 걸 보면. 10여 년의 시간이 흐르는 동안 아버님도 나의 가족이 되어있었다. 욕심을 부리고 싶다. 우리 가족에게 추억을 남길 시간과 건강이 허락되기를.



호랑이 아버님, 곰 같은 며느리가 거하게 생신상 차려드릴게요.



그날에 우리 가족이 웃는 얼굴로 함께 식사할 수 있길 바라고 또 바라본다.

매거진의 이전글 내가 너의 우주가 되어줄게.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