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여니 Nov 01. 2023

나는 나답지 않게 살기로 했다.

- 순두부의 과학 수업 -

사랑이 엄마, 과학의 날 행사 때 일손이 부족해서 그런데 이번 주에 시간 있어요?”

딸 친구의 엄마이자, 학부모회장이자, 2년째 놀이터 지킴이로서 함께 했던 그녀의 부탁에 차마 안된다는 말이 나오지 않았다. 면전에서 부탁하는데 거절하기 쉬운 사람이 있을까, 나처럼 소심한 사람은 거절이 죽기보다 어렵다.

“아..... 그래요? 제가 뭘 도우면 되나요? 제가 할 줄 아는 게 없는데..............”

“강당에서 행사 마치고 나오는 아이들에게 팝콘 하나씩 나눠주시면 돼요.”


퇴근하고 돌아온 남편에게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그런 날 걱정하는 남편.

“큰일 났네. 안 보이는 유령처럼 다니는 게 목표라더니. 학교까지 가게 됐네. 어쩌냐.”

남편은 내가 순두부라는 사실을 그 누구보다 잘 아는 사람이다. 나는 순두부다. 소심하고 예민하고 걱정 많은 순두부. 그게 나다.


‘이건 너무 무서워.’

‘실수하면 어떡해.’

‘잘 안 될 거야.’

‘안 할래.’


순두부로 살아왔다. 으스러지고 으깨져 버릴까 두려워 모든 걸 피하는 삶. 그런 내게 하늘은 2.3 킬로그램의 어린 순두부를 보내주셨다. 엄마이기에 그나마 조금 더 단단한 찌개 두부의 가면을 쓰고 버티고 있었던 점이 조금 달랐을 뿐, 아이와 나는 꼭 같은 순두부로 살고 있다. 그러면서 욕심은 많다. 딸은 나와 다르게 살았으면 했다. 조금 더 용기 있고, 당당한 모습으로 성장하길 바랐다. 하지만 겁이 많고 소심한 나에게는 찌개 두부의 가면도 벅찼다.


행사 당일, 옷부터 걱정이다. 몇 년째 학교, 놀이터, 집을 반복하며 변변한 옷이 없었다. 팝콘을 담아 나눠주는

일에 드레스코드가 있을 리 없고, 내가 뭘 입고 가든 누구도 기억하지 못할 텐데 괜히 이것저것 들춰 본다. 최대한 튀지 않는 무채색 티셔츠에 청바지를 입고 집을 나섰다. 순두부의 삶은 무채색과 긴밀하다. 오랜 육아로 인해 만나는 사람이라고는 겨우 인사만 하는 놀이터 엄마들뿐이었는데, 낯선 엄마들이 가득한 강당에 들어가

려니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분만실로 옮겨갈 때의 두려움이 떠올랐다. 겨우 인사한마디 한 뒤, 말없이 팝콘 봉지를 펼치기 시작했다.


그런데 어느 순간, 강당이 소란스러워졌다.     

“죄송한데요, 지금 학부모 강사님 한 분이 갑자기 못 나오게 되셔서 강사가 한 명 필요한데 지원해 주실 분 계신가요?”

난 왜 하필 학부모회장님과 부회장님 사이에서 팝콘 봉지를 펼치고 있었던 것일까.

“제가..... 할까요.........? 도움이 될지는 모르겠지만.”

나 같은 순두부는 잠시의 정적도 이겨내질 못한다. 순두부의 입이 멋대로 지껄였다.


“진짜 너무 고마워요. 혼자 할 생각 하니 정말 막막했어요.”

같은 팀인 학부모 강사님이 나에게 너무 고마워하며 오늘의 실험종이를 내밀었다. 그렇다, 나는 전형적인 문과다. 그녀가 내민 오늘 수업의 주제는 <잠수함의 원리>. 잠수함은 제주도 앞바다에서 돈 내고 타면 되는 거 아니었나. 그녀가 또 한 장의 종이를 내민다. 양력과 부력의 정의가 친절하게 적혀있었다. 환장할 노릇. 수업을 들을 아이들이 강당에 도착하기 10분 전, 후회해도 소용없다. 늦었다. 종이를 들고 달달달 외웠다. 종이를 든 손이 좀 떨렸다. 내 인생에 이토록 팝콘 봉투를 그리워한 순간이 또 있을까.


약속된 9시.

1, 2학년들이 담임선생님들과 차례대로 강당에 들어왔다. 저기 내 딸이 보인다. 아직까진 뭐든 잘하는 멋진 엄마 코스프레 중이라 딸이 보는 앞에서 멋진 강사의 모습으로 잘 해내고 싶었다.

“친구들 안녕하세요. 오늘 잠수함의 원리를 설명하게 된 과학 선생님이에요.”그렇게 3시간이 정신없이 흘렀다. 무슨 말을 했는지 기억도 잘 나지 않았다. 플라스틱 뚜껑을 여는 실험 때문에 집에 와보니 손가락에 물집이 잡혀있었다. 또 손이 떨렸다.


그런데 이상하다. 어쩐지 기분이 나쁘지 않다.

“선생님, 이게 뭐예요?” “선생님 재밌어요. 또 할래요”

정말 선생님이라도 된듯한 기분에 잊고 있던 과거가 생각났다. 작은 학원의 영어학원 강사로 일하던 시절, 밤낮으로 교재 연구하고 바쁘게 살았던 날들, 학원 선생님 중에 내가 제일 좋다던 몇몇 아이들의 얼굴까지 기억났다. 치열하게 살던 내가 그리웠다. 엄마라는 수식어 외에 내가 가질 수 있는 명함은 이제 없다고 생각했다. 예민한 아이를 키우기 위해 9년 동안 순두부같은 나를 감추고 치열하게 육아했다. 그런데 아이를 키우

며 느꼈던 열정과는 조금 다른 녀석이 슬그머니 내 마음속으로 들어왔다. 나는 아주 조금 더 잘하고 싶었다. 적어도 오늘보다는.




다음 날, 평소 입을 일이 없던 블라우스를 꺼내 입었다. 순두부인 나는 늘 무채색의 티셔츠를 고집해 왔다. 고작 티셔츠에서 블라우스로 옷 하나 바뀌었을 뿐인데 어제의 나와는 다르게 느껴졌다. 파티에 간 신데렐라의 기분이 이랬을까. 10년간 육아 우울증으로 어둡고 힘없게 변해버렸던 내가 아닌, 진짜 나를 되찾고 싶었다.


이 때다.

이날부터 나는 나답지 않게 살기로 결심했다.  낯선 도전과 나라면 하지 않을 생각을 하며 살아보자고 결심했다. 그동안 걱정과 불안으로 못해본 것들이 많았기에, 앞으로 도전할 것들이 많이 남아 있음이 감사하다. 그날, 곱게 팝콘이나 담을 일이지 멋대로 지껄여줬던 내 입이 새삼 고마워졌다. 과학의 날 행사 마지막 날, 난 그동안 걱정, 소심함, 낮은 자존감, 약간의 우울감과 무기력으로 마냥 미뤄뒀었던 카톡에 답장을 보냈다.


[소영 씨, 저번에 저한테 부탁했던 애들 과외 제가 할게요. 언제 시작하면 좋을까요?]

매거진의 이전글 에코백이 어울리는 여자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