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방에 매달린 작은 인형 하나. 초록색 상의에 여러 가지 색실로 짠 화려한 치마를 입고 모자까지 쓴 걱정인형이었다. 아이와 함께 우연히 산 이 인형은 특별할 것 없는 물건이었다. 평소에는 신경 쓰지 않던 물건이, 오늘따라 눈에 들어왔다.
사람들은 왜 걱정인형 같은 걸 의지할까? 현대인의 삶은 불확실성의 연속이다. 하루에도 수십 번 예상치 못한 일이 생기고, 그 변화를 내 힘만으로 통제하기란 쉽지 않다. 그래서일까, 사람들은 걱정인형이나 좋은 문구가 적힌 키링, 혹은 부적처럼 손에 닿는 작은 물건에 기대어 마음을 다독인다. 이런 물건은 단순한 장식 이상으로, 우리의 불안을 잠시 외부로 밀어내는 역할을 한다. 중요한 건 그것이 실제로 문제를 해결해 준다는 믿음이 아니라, 그런 행위를 통해 마음을 다스리는 과정 자체가 주는 안정감일지도 모른다.
아침부터 마음이 불편했다. 딱히 잘못된 일도 없고, 걱정할 이유도 없는데도 이상하게 초조한 기분이었다. 지난주에는 좋아하는 사람들과 약속이 많았고,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그 즐거움의 반작용이랄까. 에너지를 많이 쏟은 날에는 늘 혼자만의 시간이 필요한데, 오늘은 쉬고 싶어도 마음이 좀처럼 가라앉지 않았다. 책을 읽고 커피를 마시며 진정해보려 했지만 별 효과가 없었다. 그래서 두 정거장 먼저 내려 천천히 걸었다. 바람도 쐬고 발걸음에 집중하다 보면 마음이 조금 가벼워질 것 같았다.
걷던 중 문득 가방에 매달린 걱정인형이 눈에 들어왔다. 초조함을 떨쳐보려는 마음에 손을 뻗어 인형을 쥐었다. 그것이 내 걱정을 없애주진 못한다는 걸 잘 알면서도, 그 순간 손끝에서 느껴지는 부드러운 천의 질감이 묘하게 마음을 가라앉히는 듯했다. 그 순간, 문득 헤르만 헤세의 『나의 믿음』이 떠올랐다. 그는 믿음을 특정한 종교적 신념에만 국한하지 않았다. 믿음은 나를 다독이고, 세상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는 태도에서 비롯된다고 했다. 내가 걱정인형을 손에 쥔 것도, 어쩌면 나를 다독이고 싶어서였을지 모른다.
걱정인형은 내 걱정을 가져가지 않는다. 그것은 내가 해결해야 할 몫이라는 걸 누구보다 잘 안다. 하지만 그 작은 물건이 내 손에 닿는 순간, 마치 "모든 게 괜찮아질 거야"라고 속삭이는 듯했다. 그 믿음은 인형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에게 준 허락이었다. 잠시라도 걱정을 내려놓아도 괜찮다는 허락. 어쩌면 믿음이란, 내 안의 균형을 되찾는 행위일지도 모른다. 걱정인형이 조용히 매달린 채, 내가 다시 마음의 중심을 잡도록 기다려준 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