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유미 <문장 수집 생활>
아주 오래전 ‘다정함’의 뜻을 스스로 정의한 적이 있었다. 글을 잘 쓰고 싶으면, 이미 알고 있는 단어의 뜻을 너의 언어로 정리해 보라는 이야기를 들은 직후였다. 당시 누군가의 다정함에 흠뻑 빠져 있던 나는, 다정함을 ‘나의 온기가 다른 사람에게 전달되는 일’이라고 말했다. 그 이후로 누군가의 따뜻한 손을 마주할 때면 다정하다는 단어가 떠올랐다. 글을 쓰다가도, 말을 하다가도 따뜻한 무언가를 보면 다정하다고 느끼게 되었다.
카피를 쓰는 건, 단어를 정의해보는 일과 비슷하다. 표현해야 할 대상을 자신만의 시각으로 바라보고 그 역할과 쓰임새를 다시 설정해보는 과정이다. 문장 수집은 그 시각을 좀 더 세밀하고 다채롭게 표현해줄 방법에 가깝다. 저자가 청소를 하는 행위에 ‘몸과 마음의 밸런스를 맞춘다’는 의미를 이전에 부여하지 않았더라면, <시간 있으면 나 좀 좋아해줘>의 한 구절을 청소 용품 카피로 사용하지 못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이런저런 생각으로 복잡할 때는 청소가 최고야. 특히 냉장고 청소가 특효지
홍희정, <시간 있으면 나 좀 좋아해줘>, 문학동네(2013)
문장을 수집한다는 건 작가의 생활을 수집하는 것과 다름없다. 삶의 구체성과 일상성을 확보하지 못한 글은 공허하고 헛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140p). 문장이 누군가의 마음에 가닿아 밑줄을 긋게 만들었다면, 그 순간만큼은 독자와 작가의 마음이 맞닿은 것이라고 믿고 싶다. 밑줄을 그으며, 그 문장 너머에 존재하는 사람을 상상해보고 그 마음을 헤아려 보는 것. 좋은 에디터(혹은 카피라이터)가 되기 위한 또 하나의 방법이 아닐까.
보통 기억하거나 기록해두고 싶은 문장들을 그때그때 메모 어플에 옮겨 적는다. 하지만 이번에는 그런 문장이 너무 많아서, 읽어보고 싶은 소설이 너무 많아서, 그리고 다시 한번 펼쳐보고 싶어서 가느다란 포스트잇을 붙여 저자의 생각을 수집했다. ‘뚜렷한 기억보다 희미한 연필 자국이 낫다’고, 책을 읽으며 눈길이 간 소설들을 나열해본다. 2019년에는 이 소설들을 모두 읽어볼 수 있기를
서유미 <당분간 인간>
자판기 커피의 양은 초면인 사람들이 대화를 나누면서 마시기에 적당했다
니시카와 미와 <유레루>
사진이라는 건 참 좋구나 싶었습니다. 찍는 사람은 보이지 않고 사진을 보는 나를 볼 수도 없고 그런데도 그 사람이 지나간 풍경을 영원한 정지 화면으로 가슴에 안고 갈 수가 있습니다.
은유 <글쓰기의 최전선>
무엇에든 영향을 받을 수 있는 자가 어디에도 영향을 끼칠 수 있는 법이다.
가와바타 야스나리 <설국>
국경의 터널을 빠져나가니, 설국이었다.
윤이형 <러브 레플리카>
나른하고 구체적인 생활의 냄새로 가득한 낮이 지나가고
더불어 2018년에 내가 수집했던 문장들도 잠깐 소개한다.
최은영 <내게 무해한 사람>
어른이 된 이후의 삶이란 아무리 기다려도 오지 않는 것들을 기다리고 또 기다려야 하는 일이었으니까
그런 밤이 있었다. 사람에게 기대고 싶은 밤. 나를 오해하고 조롱하고 비난하고 이용할지도 모를, 그리하여 나를 낙담하게 하고 상처 입힐 수 있는 사람이라는 피조물에게 나의 마음을 열어 보여주고 싶은 밤이 있었다. 사람에게 이야기해서만 구할 수 있는 마음이 존재하는지도 모른다고 나의 신에게 조용히 털어놓았던 밤이 있었다.
김금희 <경애의 마음>
마음을 잃지 않고는 살 수 없는 날들
거리와 술집이 조용해진다는 건 사람들이 집으로 돌아갔다는 얘기. 인기척을 내며 문을 열고 누군가에게 왔어, 인사하며 놓쳐버린 끼니나 과일 등을 먹으며 텔레비전을 보다가 자기들끼리 또 인사를 하며 잠이 들었다는 얘기였다.
신철규 <지구만큼 슬펐다고 한다>
절벽 끝에 서 있는 사람을 잠깐 뒤돌아보게 하는 것. 다만 반걸음이라도 뒤로 물러서게 하는 것. 그것이 시일 것이라고 오래 생각했다.
임태수 <바다의 마음 브랜드의 처음>
모든 시작은 작고 애틋하다
허수경 <누구도 기억하지 않는 역에서>
영원히 역에 서 있을 것 같은 나날이었다. 그러나 언제나 기차는 왔고 나는 역을 떠났다. 다음 역을 향하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