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장수집 #1
책을 깨끗하게 보는 편이다. 읽고 나면 중고매장에 다시 팔아야 했기 때문이다. 가느다란 포스트잇을 붙여 마음에 드는 문장을 표시하고 그것을 옮겨 적은 후, 포스트잇을 다시 떼서 중고매장에 가져다주는 행위는 일종의 정형화된 습관이었다.
물론, 모든 책이 같은 과정을 거치지는 않는다. 여전히 집에는 책장 가득 책이 꽂혀 있는데 아직 읽지 못했거나, 혹은 포스트잇이 너무 많아 옮겨 적을 엄두가 나지 않는 것들이었다. 그리고 그 목록을 찬찬히 살펴보면, 신기하게도 대부분은 소설책이었다.
김금희 작가의 책을 읽은 건 세 번째다. <너무 한낮의 연애>, <경애의 마음>, 그리고 <나는 그것에 대해 아주 오랫동안 생각해>. <너무 한낮의 연애>는 꽤 오랫동안 책장에 꽂혀 있다 최근에서야 중고매장으로 보냈다. 그 책을 처음 읽었을 때 '다시는 김금희의 책을 읽지 않을 거야'라고 다짐했었는데, 마지막 책장을 덮고 난 후의 밀려오는 쓸쓸함과 물결 이는 마음을 감당하기 어려웠기 때문이었다.
그 책을 다시 펼친 건 제법 오랜 시간이 흐른 후였다. 처음부터 끝까지 다시 읽을 엄두가 나지 않아 포스트잇이 있는 부분만 보며 문장들을 적어나가기 시작했는데, 그 사이에 나의 마음이 자못 달라졌다는 걸 실감할 수 있었다. 죽음 공포 불안 허무함 사랑을 생각하게 만들던 문장들은 더 이상 나의 마음에 가닿지 않았다. 그 시절의 내가 고스란히 드러나 있었지만, 그때의 나는 도대체 어떤 마음이었는지 가늠하기 어려웠다. 결국 포스트잇을 떼내며 적은 문장은 십여 개 중에 서너 개에 불과했다.
두 번째 책인 <경애의 마음>은 친구의 것을 빌려보았다. 친구는 책 한쪽 귀퉁이를 접어 놓는 습관을 가졌는데, 그 문장이 마음에 들어서였는지 아니면 자신의 마음을 너무 힘들게 해서였는지는 모르겠다. 다만, 오랜 시간에 걸쳐 그 장편 소설을 읽는 동안 경애와 상수의 마음뿐만 아니라 내게 책을 빌려준 그의 마음이 남긴 족적을 따라가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마음을 잃지 않고는 살 수 없는 날들 - 경애의 마음 中
<나는 그것에 대해 아주 오랫동안 생각해>는 정말 김금희 작가다운 제목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실물이 옆에 있지 않아도, 자꾸만 그의 이야기들을 아주 오랫동안 생각하게 만드는 재주가 있는 사람이었다. 그의 책을 다시는 읽지 않을 거라고 다짐했지만 어느새 나는 매년 그 이야기들을 보고, 간직하고, 꼭꼭 씹어 생각하는 날들을 보내고 있었다.
이번 책은 포스트잇을 붙이지 않았다. 대신 색연필을 들어 밑줄을 그었다. 도저히 감당할 수 없을 만큼 많은 포스트잇이 필요해 보였기 때문이다. 5~10장 분량의 소설을 읽는 데는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았지만, 그것을 소화하기 위해서는 제법 시간이 걸렸다. 방금 마친 단편을 읽고 또 읽고 하면서 이들의 마음은 무엇인지 되뇌었다. 무엇인가 실체가 분명하지 않으면서도 손에 잡힐 듯한 그 감정들을 손에 놓고 위로해주고 싶다는 마음이 들었다.
바쁘게 밑줄을 긋던 색연필은 책의 중반부가 넘어갈수록 뜸해졌고 말미에서는 그 존재를 주장하지 못했다. 그저 물 흐르듯이, 감정과 마음의 움직임을 따라가야 할 것만 같았다. 아마 이번에도 나는 김금희의 이야기를 아주 오랫동안 생각할 것이다. 그러다 문득, 따뜻한 마음이 필요한 날이면 이 책에 실린 단편 <규카쓰를 먹을래>를 펼쳐보고 싶다.
"그러므로 당신이 괜찮다면 나는 아주 오랫동안 당신들에 대해 생각할 것이라고 말하고 싶다. 이야기는 계속되고 우리는 그 안에서 자주 만났다가 헤어지며 그리워도 하겠지만 끝내 서로를 다 이해하지는 못할 거라고. 하지만 그렇게 거듭되는 재회와 헤어짐 속에서도 당신들이 처음 내 마음속에 들어와 헤이, 라고 스스로의 존재를 각인시켰던 그 눈부신 순간에 대한 감각을 잃지 않을 것이다. 그것은 떠난 사람들이 우리에게서 차마 가져가지 못하는, 누군가를 사랑하고 다정함을 주었던 사람이라면 마땅히 차지해야 할 오롯한 빛이니까." - 작가의 말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