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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연유 Jan 31. 2024

이빨을 드러낸 치와와 같았다

프롤로그

가로수가 잎을 떨어뜨리고, 거리에 사람들 옷이 길어질 때였다. 충장로 전일빌딩 앞 청년 주관 무대 앞에 앉았다. A4용지에 빼곡히 적혀있는 글자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이마와 등에선 식은땀이 흘렀다. 두 장의 종이가 풀피리처럼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청년 주간답게 흥에 겨웠다. ‘무대를 장악한다는 게 저런 모습일까?’ 생각이 들었다. 강연 주제는 「You Only Live Once」 강연 마지막에는 자작 랩을 선보였다. 심장을 울리는 비트와 함께 랩이 대로변을 가득 채웠다. 나는 땀에 젖어버린 강의 대본을 의자에 내려놓고 무대에 올랐다. 청중들의 웃고 환희에 찬 모습을 내려보며 이야기를 시작했다.


앞선 강연과는 다른 분위기를 자아냈다. 쉽게 식지 않을 것 같았던 무대의 열기는 북극한파가 내려온 도시처럼 순식간에 얼어버렸다. 생활보장대상자의 불우한 가정환경. 아르바이트로 생활비와 학비를 충당했다. 취업 후 전세금 사기를 당할 뻔했었다. 9년간 회사에서 특근 잔업 빠짐없이 일했다. 지금껏 연차 10개를 쓰지 않았다. 이제야 먹고살 만해졌다는 이야기에 청중은 반응하기 쉽지 않았을 것이다. 돈에 집착한 이유를 떠올려봤더니, 잃어버린 가족을 만들고 싶어서라고 말했다. 듣는 이도 어떤 반응을 해야 할지 긴가민가했을 것이다. 그때 리모컨 배터리가 떨어졌다. 청중의 이해를 돕기 위한 프레젠테이션 슬라이드가 넘어가지 않았다. 씁쓸한 박수 소리를 들으며 내려왔다. 다음 강연자의 무대가 이어졌다. 나는 가방에서 작은 수첩과 볼펜을 꺼냈다. “무대에 올라서 내 이야기 해 보기”를 적고 줄을 그었다. 첫 번째 버킷리스트를 달성했다. 이 무렵이었다. 


삶을 수평선에 대입했을 때 중간에 가까워졌지만 반은 넘지 않았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가장 편하고 보호받아야 할 집에서 한걸음에 죽음이 다가왔다. 아버지는 이빨를 드러낸 치와와 같았다. 고지혈증과 당뇨로 팔다리는 바싹 마른 나뭇가지처럼 얇아진 사람. 그가 돈을 내놓으라며 목에 칼을 들이밀었다. 머릿속에서 교감신경이 위기 상황을 감지했다. 이내 투쟁 도피반응이 일어났다. 눈이 번쩍 뜨이고 동공이 확장되었다. 소화기관의 혈액이 온몸의 근육으로 몰려 잔뜩 긴장했다. 빠르게 손목을 비틀어 칼을 떨어뜨려 발로 차 냈다. 다리를 걸어 바닥에 쓰러트려서 허벅지로 팔과 몸통을 결박했다. 체중을 실어 양손으로 목을 졸랐다. 눈을 감고 천천히 숫자를 셌다. 하나, 둘, 셋, 넷…. 오 분 정도 지나고 눈을 뜬다. 이제 살인자가 되었다. 시뮬레이션이 끝났다. 이러면 되는건가. 이 고통이 끝나는건가? 행동으로 옮기려는 찰나였다


저 식칼로 13년 동안 국과 반찬을 만들던 모습이 머릭속에 지나갔다. 순간 이렇게 나약한 사람 때문에 망가지고 싶지 않았다. 지금껏 쌓아 올린 성과를 일순간 무너뜨리고 싶지 않았다. 마음이 차분해졌다. 목소리는 굵고 낮아졌다. “날 죽이고 싶다면 죽여라. 돈은 한 푼도 못 가져간다. 존속 살인의 경우 상속권이 박탈된다.” 


그리하여 2년 전부터 불편한 동거가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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