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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연유 Feb 03. 2024

움켜쥐다

1부 버킷리스트

신생아가 있는 집에 방문하면 꼭 하는 행동이 있다. 화장실에 들어가 손을 10분간 깨끗하게 씻은 다음에 마스크를 쓰고 비로소 아이 옆에 앉는다. 새근새근 자는 아기 얼굴을 유심이 들여다보다가 통통하게 오른 볼을 손가락으로 살포시 눌러본다. 푸딩처럼 찰랑거리는 볼살이 정말 매력적이다. 조약돌보다 작은 주먹을 쥐고 있는 아기 손에 내 새끼손가락을 가볍게 올려놓는다. 꽉 움켜쥔다. 고사리 같은 작고 여린 손에서 나온다고 볼 수 없는 악력이다. 엄마의 뱃속을 나오면서부터 아이는 인간의 본능을 날것 그대로 보여준다는 생각이 들며 내손을 꼭 쥐어본다. 나는 지금 무엇을 움켜쥐고 있는가?


“돈 욕심이 없다는 사람은 정작 돈에 미친 사람이다.”라는 걸 이미 알고 있다. 그래서 난 누가 돈 좋아하는지 물어보면 항상 엄청나게 좋아한다고 대놓고 말한다. 그러면 예상 못 한 답변에 멋쩍어하는 상대방을 보며 “돈 싫어하세요? 저는 돈 사랑해요!”라고 쐐기를 박는다. 내가 아는 한 사회는 돈을 벌고 또 그것을 쓰기 위해 움직인다. 고등학교 1학년 피자헛 주방에서 시작한 아르바이트, 당시 시급은 2,800원이었다. 저녁 6시부터 마감 10까지 일해도 11,200원을 벌었다. 4시간을 꼬박 서서 일해도 피자 한 판 사지 못하는 돈을 벌면서 처음으로 미래에 대한 불안감이 다가왔다. 사회는 돈으로 촘촘히 이어진 이해관계 속에서 돈이 흘러서 움직인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덕분에 돈에 대한 갈증, 세상의 매운맛, 인간에 대한 회의감이 쌓여서 사춘기 한번 겪지 못하고 어른이 되었다.


취업 직전까지 하루에 16시간씩 아르바이트를 했다. 별 보고 출근해서 달 보고 퇴근하는 것이 일상이었다. 그렇게 일해도 내 손에는 7만 원이 쥐어졌다. 한 달을 꼬박 일해도 120만 원 안팎의 돈이 통장에 들어왔다. 인생에서 가장 빛나는 스무 살을 난 수도승처럼 절제하고 살았다. 친구를 사귀지 못했고, 국민대학교 편입을 포기했으며, 내 꿈과 희망을 헐값에 돈으로 바꿔 허겁지겁 입에 집어넣기 바빴다. 그렇게 인고의 시간 끝에 취업에 성공했다. 직장에서 근무한 지 10년쯤 되었다. 과거보다 일하는 시간은 반으로 줄었고, 돈은 5배를 더 벌고 있다. 그런데도 나는 아직도 돈에 미쳐있다. 통장 잔액과 부동산 소유 이것에 모든 신경이 쏠려 있다.


취업만 하면 끝일 줄 알았는데 사회 초년생의 삶을 녹록지 않았다. 주변에는 눈먼 돈을 노리는 사기꾼 천지였다. 전셋집 마련을 위해 공인중개사 사무실에 찾아갔다. 「보물을 땅에 쌓아두지 말고 하늘에 쌓아두라 (마6:19-34)」 큰 나무 현판이 내려다보는 사무실 문을 열었다. 소파에 앉아있는 그의 얼굴에는 옅은 미소가 있었다. 절실한 기독교 신자라며 자신만 믿으면 된다고 말했다. 마침 가격도 저렴하고 내게 딱 맞는 집이 있다고 말했다. 시세보다 1천만 원 이상 저렴하게 나온 전셋집은 살기에 정말 알맞았다. 방도 2개가 있었고, 작은 거실과 주방 화장실이 있었다. 가장 만족스러운 건 햇살이 잘 들어오는 발코니가 있었다. 이곳에 이불을 말리면 온종일 햇볕 냄새가 날 것 같았다. 하루빨리 한 평 남짓한 고시원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사무실로 돌아와 전세 계약서에 도장을 찍을 찰나였다. 무언가 꺼림칙한 느낌이 들었다. 기억을 더듬어 등기부등본을 보여달라고 말했다. 찰나였다. 미소를 띠던 그의 얼굴이 순간 찌그러졌다. 그곳에는 5,000만 원 대출이 있었다. 담보대출을 받은 아파트 그리고 자신만 믿으면 된다는 공인중개사, 왠지 이건 아닌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자리를 털고 일어나 한 평짜리 고시원으로 돌아왔다.


1억이 없을 때는 1억만 벌면 뭐든 해결이 될 것 같았는데 막상 1억을 모으고 나니 정말 보잘것없는 돈이었다. 집을 사면 달라질까? 생각이 들어서 전셋집에서 벗어나 아파트를 샀다. 2년 동안 고심해서 반셀프 인테리어를 했다. 새로운 가구와 가전을 사서 입주했다. 그런데 멋져 보이기는커녕 초라하기만 했다. 20년이 넘은 아파트라 외관도 낡았고 지하 주차장은 어두침침했다. 최신식 월 패드가 달려있고 크고 웅장한 정문을 가지고 있는 4세대 아파트가 마냥 부러웠다. 금융 지식이 풍부해진 만큼 욕심도 커졌다. 돈이 곧 성공이라고 생각했다. 그것에 엄청난 의미를 부여했다. 덕분에 이제는 가난하지 않다. 더는 남에게 아쉬운 소리 하지 않아도 된다. 그런데 아직도 연차를 쓰지 않고 특근을 하며 돈을 번다. 왜 벌어야 하는지 이유를 잊어버리고 돈의 노예가 되어 있었다. 경제적으로 돈을 추구하고 물질의 노예가 되는 것, 소유를 늘리고 싶어 하는 것이 인간의 당연한 욕구이자 본능이다. 사람의 손이 가장 편한 상태가 언제일까? 쥐고 있을 때가 가장 편하다. 힘을 빼면 자연스럽게 쥐고 있게 된다. 손을 펴고 있으려면 힘을 주고 있어야 한다. 사람은 잡는 게 본능이며 쥐고 있으면 안 놓으려고 하는 게 인간의 천성이다.


23살 도서관 책장 하나를 통으로 읽으며 내 그릇은 욕심과 함께 커져 버렸다. 아직도 나는 젊고 뭐든 할 수 있다 믿으며, 이룰 수 있는 한계가 있다는 사실을 실감하지 못한다. 지금까지 모으고 굴린 돈보다 앞으로 훨씬 더 큰 부를 이룰 수 있을 거라 확신한다. 그런데 가끔 이런 생각이 든다. ‘돈에 대한 욕심에서 해방되어야 다른 행복이 찾아올 거 같은데, 지금 이때를 벗어나면 평생 다시 돌아올 수 없을 것 같은데.’ 어쩌면 난 갈림길에 서 있는지 모른다. 아직도 나의 주제를 파악하지 못했고, 자족하는 마음도 소유하지 못했다. 물질에서 얻지 못하는 가치도 알지 못한다. 난 언제쯤 손을 펴서 움켜쥐고 있는 것들을 놓아버릴 수 있을까? 고민하면서도 또다시 바닷물을 기르러 일터로 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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