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지후 Mar 09. 2023

돌아가기엔 너무 멀리 와버렸다

WWOOF: 영국 시골농장 여행기 #5


금요일 밤, 영국의 땅끝으로 향하는 버스에 몸을 실었다. 런던에서 콘월의 가장 큰 도시, 펜잔스까지 걸리는 시간은 총 10시간. 깜깜한 어둠 속을 달리던 버스는 아침 해가 뜨고 나서야 어느 항구 앞에 멈췄다.



버스에서 내리자 바다 냄새가 코끝을 스쳤다.

오전 7시의 정류장은 고요했다. 눈앞에 보이는 건 바다와 배, 그리고 갈매기뿐이다. 차가운 바람에 잠에서 서서히 깰 무렵, 농장으로 가는 마을버스가 도착했다.


창 밖 너머, 광활한 들판이 보였다. 낯선 풍경에 이질감이 느껴지자 뒤늦게 실감이 나기 시작했다. 앞으로 한 달 동안 이곳의 사람들과 같은 언어로 소통해야 한다는 것을.


함께 밥을 먹고, 함께 일을 하는 동안 얼마나 많은 이야기가 오갈 것인가. 커피 주문도 제대로 못하는 영어 수준에 대화가 가능할 리 없었다.



30분 정도 지났을 무렵, 우리는 버스에서 내렸다.

캐리어를 끌고 언덕을 내려오는 동안 예린이는 손으로 이곳저곳을 가리키며 마을을 소개해줬다. 어떤 말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이미 머릿속은 두려움과 후회로 가득 차있었다.


‘대체 무슨 생각으로 여기까지 온 거야?’

당장이라도 캐리어를 내팽개친 채 도망치고 싶었지만 돌아가기엔 너무 멀리 와버렸다.



그러는 사이 농장 앞에 도착했고, 벽돌로 지어진 이층 집이 있었다. ‘1873’이라는 숫자가 벽에 적혀있는 걸 보니 지어진 지 150년 가까이 된 집인 듯했다. 예린은 이곳이 앞으로 지내게 될 숙소라고 말하며 현관문을 열고 들어갔다.



집 안은 소박하고 아늑했다. 부엌 찬장에는 수십 개의 컵이 놓여있었고, 거실 책장은 책으로 빼곡했다. 이곳에 머물었던 수많은 사람들의 흔적이 곳곳에 남겨진, 따뜻함이 있는 집이었다.



계단 옆 2층 방에 짐을 놓고, 예린과 나는 농장에서 가장 가까운 동네인 세인트 저스트로 산책을 갔다.


들판 옆 좁은 흙길을 따라 걷다 보니 작은 광장이 보였다. 그 옆에는 작은 교회가 있었는데, 15세기에 지어진 건물이라고 예린이 말했다. 문득 아무것도 변하지 않은 곳에서 산다는 건 어떤 기분일지 궁금해졌다.



짧은 마을 탐방을 마치고 집에 돌아와 짐정리를 했다. 오후 5시가 되자 바깥은 벌써 어둑해졌고 농장일을 끝낸 사람들이 하나둘씩 집에 들어왔다.


뉴질랜드에서 온 벤, 스코틀랜드에서 온 브루스, 이탈리아에서 온 다니엘, 그리고 일본에서 온 하루카.

자꾸만 말이 목구멍에서 막히는 바람에 첫인사는 짧고 간결하게 마쳤다. 그래도 하루카와 일본어로 얘기를 나누면서 조금씩 긴장이 풀리고 있었다.



다 함께 밥을 먹고 차를 마시던 중, 브루스가 트럼프 카드를 가져왔다. 순식간에 카드 게임이 시작되었다.


“매일 밤, 자기 전에 카드 게임을 하고 있어”

하루카는 웃으면서 말했다. 다들 어린아이처럼 신나 있는 모습에 카드 게임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말은 차마 하지 못했다.


“지후, 너도 같이 할 거지?”

브루스가 말했다. 이제 나도 이곳의 사람이라는 걸 의미하는 것 같아 왠지 안심이 됐다.


한참을 웃고 떠들었더니 어느덧 잠에  시간이 되었다. 장거리 이동의 피로가 몰려오고 있었다. 나는 이불을 덮으며 깊은숨을 내뱉었다. 첫날의 두려움이 몸에서 모두 빠져나가는  같았다.


내일 아침이면 보게 될 닭들을 떠올리며 잠에 들었다.

이전 04화 걸어도 걸어도 런던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