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WOOF: 영국 시골농장 여행기 #7
이곳에서 나는 말하기보단 가만히 듣고 있는 편이다.
학창 시절, 영어수업에서 눈을 뜨고 있던 때보다 눈을 감고 있던 때가 많았던 나는 이곳에서 모든 사람들의 말을 적당히 이해한다. 어쩌면 추측한다는 표현이 더 알맞을 수도 있겠다.
간신히 귀에 들려온 몇 개의 단어와 그 말을 내뱉고 있는 상대방의 표정과 몸짓, 그리고 이야기가 진행되는 상황의 흐름을 합친다. 가끔은 차라리 종이에 그림을 그려 보여주는 게 낫지 않을까 싶을 만큼 모든 대화가 어렵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이곳 사람들은 대화를 참 좋아해서 서로 눈이 마주치는 순간 바로 말을 걸어온다.
“오늘 기분은 어때? 잘 지내지?”
“오늘 날씨가 정말 좋지 않아?”
“오늘 점심 정말 맛있었어. 어떻게 만든 거야?”
각자 일을 하다가도 대화가 시작되면 그 자리에서 하염없이 이야기를 나누는 게 바로 콘월 사람들이다.
언제 어디서 누구와 어떤 대화가 시작될지 예상할 수 없는 곳에서 영어 수준미달인 내가 터득한 방법은 일단 부딪히고 보는 게 아닌 일단 도망치고 보는 거였다.
슬슬 대화가 시작될 기미가 보이면 나는 아주 조용히, 그리고 조심히 그 자리를 빠져나온다. 상황이 여이치 않아 도저히 자리를 비울 수 없을 땐 사람들의 이야기를 가만히 들으며 그냥 웃는다.
물론 도망치는 것에도 감수해야 할 부분이 있다. 계속 웃고만 있어야 하는 창피함과 결국 한마디도 하지 못한 것에 대한 패배감은 온전히 받아들이는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평생 하고 싶은 말을 다 하면서 살아왔지만 지금은 하고 싶은 말이 있어도 할 수가 없다. 한국에서는 내가 활발하고 말이 많은 사람이었을지 몰라도 이곳에서의 나는 그저 조용하고 수줍음이 많은 사람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농장에 새로운 우퍼가 왔다. 프랑스에서 온 폴린이라는 여자애였는데, 언제부턴가 나를 ‘지후’가 아닌 ‘지지’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폴린에게 ‘지지’라고 부르는 이유가 있는지 물어보자 폴린이 말했다.
“<마녀배달부 키키>라는 영화에 나오는 고양이 이름이 바로 지지야. 주인공이 마녀라서 고양이랑 대화를 할 수 있는데, 어느 날 갑자기 능력이 사라져서 더 이상 대화를 못하게 되거든. 하지만 나중엔 고양이의 눈빛만 봐도 얘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하는지, 무슨 말을 하는지 마음으로 이해하게 돼.”
“지후 너를 보면 그 고양이가 생각나. 사람들과 함께 있을 때 넌 말이 별로 없지만 끊임없이 사람들의 얼굴을 보면서 이해하려고 하잖아. 근데 네가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말하지 않아도 뭔가 알 것 같아. 물론 눈동자가 쉴 새 없이 움직이는 게 고양이 같기도 하고.”
폴린의 말에 그동안 쌓였던 서러움이 한순간에 사라졌다. 말을 못 한다고 해서 잘못된 것도, 틀린 것도 아니었다. 말을 하지 않는다고 해서 마음이 전달되지 않는 것도 아니었다.
귀와 입이 아닌 눈으로 대화를 한다는 건 사람의 감정을 언어라는 거름망 없이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다는 것 아닐까.
적당히 이해하고 적게 말하는 지금의 내가 조금씩 좋아지기 시작했다. 지금 나에게 필요한 건 바깥으로 내뱉는 게 아닌 그 안을 차곡차곡 담아내는 시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