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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후 Mar 16. 2023

도망치는 건 부끄럽지만 도움이 된다

WWOOF: 영국 시골농장 여행기 #7


이곳에서 나는 말하기보단 가만히 듣고 있는 편이다.



학창 시절, 영어수업에서 눈을 뜨고 있던 때보다 눈을 감고 있던 때가 많았던 나는 이곳에서 모든 사람들의 말을 적당히 이해한다. 어쩌면 추측한다는 표현이 더 알맞을 수도 있겠다.


간신히 귀에 들려온 몇 개의 단어와 그 말을 내뱉고 있는 상대방의 표정과 몸짓, 그리고 이야기가 진행되는 상황의 흐름을 합친다. 가끔은 차라리 종이에 그림을 그려 보여주는 게 낫지 않을까 싶을 만큼 모든 대화가 어렵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이곳 사람들은 대화를 참 좋아해서 서로 눈이 마주치는 순간 바로 말을 걸어온다.


“오늘 기분은 어때? 잘 지내지?”

“오늘 날씨가 정말 좋지 않아?”

“오늘 점심 정말 맛있었어. 어떻게 만든 거야?”


각자 일을 하다가도 대화가 시작되면 그 자리에서 하염없이 이야기를 나누는 게 바로 콘월 사람들이다.



언제 어디서 누구와 어떤 대화가 시작될지 예상할 수 없는 곳에서 영어 수준미달인 내가 터득한 방법은 일단 부딪히고 보는 게 아닌 일단 도망치고 보는 거였다.


슬슬 대화가 시작될 기미가 보이면 나는 아주 조용히, 그리고 조심히 그 자리를 빠져나온다. 상황이 여이치 않아 도저히 자리를 비울 수 없을 땐 사람들의 이야기를 가만히 들으며 그냥 웃는다.


물론 도망치는 것에도 감수해야 할 부분이 있다. 계속 웃고만 있어야 하는 창피함과 결국 한마디도 하지 못한 것에 대한 패배감은 온전히 받아들이는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평생 하고 싶은 말을  하면서 살아왔지만 지금은 하고 싶은 말이 있어도  수가 없다. 한국에서는 내가 활발하고 말이 많은 사람이었을지 몰라도 이곳에서의 나는 그저 조용하고 수줍음이 많은 사람이.


그러던 어느 날, 농장에 새로운 우퍼가 왔다. 프랑스에서 온 폴린이라는 여자애였는데, 언제부턴가 나를 ‘지후’가 아닌 ‘지지’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폴린에게 ‘지지’라고 부르는 이유가 있는지 물어보자 폴린이 말했다.



“<마녀배달부 키키>라는 영화에 나오는 고양이 이름이 바로 지지야. 주인공이 마녀라서 고양이랑 대화를 할 수 있는데, 어느 날 갑자기 능력이 사라져서 더 이상 대화를 못하게 되거든. 하지만 나중엔 고양이의 눈빛만 봐도 얘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하는지, 무슨 말을 하는지 마음으로 이해하게 돼.”


“지후 너를 보면 그 고양이가 생각나. 사람들과 함께 있을 때 넌 말이 별로 없지만 끊임없이 사람들의 얼굴을 보면서 이해하려고 하잖아. 근데 네가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말하지 않아도 뭔가 알 것 같아. 물론 눈동자가 쉴 새 없이 움직이는 게 고양이 같기도 하고.”


폴린의 말에 그동안 쌓였던 서러움이 한순간에 사라졌다. 말을 못 한다고 해서 잘못된 것도, 틀린 것도 아니었다. 말을 하지 않는다고 해서 마음이 전달되지 않는 것도 아니었다.


귀와 입이 아닌 눈으로 대화를 한다는 건 사람의 감정을 언어라는 거름망 없이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다는 것 아닐까.



적당히 이해하고 적게 말하는 지금의 내가 조금씩 좋아지기 시작했다. 지금 나에게 필요한 건 바깥으로 내뱉는 게 아닌 그 안을 차곡차곡 담아내는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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