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WOOF: 영국 시골농장 여행기 #4
오후 7시, 영국 히드로 공항에 도착했다. 한국을 떠난 지 열네 시간 만이다. 고작 반나절 만에 지구 반대편에 도착했다는 사실에 갑자기 거대한 지구가 작게 느껴졌다.
나는 후들거리는 다리를 끌며 출구로 향했다. 이 문이 열리면 예린이 서 있을 거라는 생각에 가슴이 두근거렸다. 하지만 아무리 주위를 둘러봐도 갈색머리에 키가 작은 여자애는 보이지 않았다. 예린은 아직 전철을 타고 오는 중이었다. 나는 공항 구석에 짐을 풀고 욱신거리는 다리를 주무르며 사람들을 구경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저 멀리 예린의 모습이 보였다. 예린은 주머니에서 작은 종이를 꺼내 펼쳤다.
'영국 도착을 환영합니다'
볼펜으로 삐뚤삐뚤 쓰인 글씨에 웃음이 나왔다. 못 보는 사이 예린의 얼굴은 햇빛에 그을렸고, 두 뺨에는 작은 주근깨가 생겼다. 그동안의 농장 생활을 알려주는 듯했다.
벌써 한 달째 영국 콘월의 농장에서 지내고 있는 예린은 나를 데리러 꼬박 10시간 동안 버스를 타고 왔다. 피곤할 법도 한데 예린은 도시가 그리웠다며 일주일 간의 휴가를 보낼 생각에 들떠있었다.
숙소에 도착하고 나니 어느덧 시계는 밤 9시를 가리키고 있었고, 나는 예린이가 만들어 준 파스타를 먹자마자 바로 잠에 들었다.
나와 예린은 런던 곳곳을 걸었다.
빅 벤 시계탑의 종소리가 들려오는 템스 강과, 그래피티로 가득한 브릭 레인의 거리, 수많은 가게와 음식점이 모여있는 피카딜리 서커스.
하지만 아무리 걸어도 내가 이곳에 와 있다는 실감이 나지 않았다. 긴장감과 낯설음에 이 모든 게 비현실처럼 느껴질 때면 나는 거리에 있는 사람들을 바라보았다. 전철을 기다리거나 밥을 먹고 있는, 평범한 사람들의 지극히 평범한 순간을 볼 때면 ‘그래, 여기도 사람 사는 곳이지’라는 생각에 안도했다.
어느 오후, 나는 트라팔가 광장에서 봄이를 만났다.
역 앞 작은 꽃집에서 산 샛노란 꽃다발을 건네자 봄이의 눈이 초승달처럼 휘어졌다. 꽃을 선물한 사람이 더 행복해지는, 환한 웃음이었다.
우리는 커피 한 잔을 마신 후, 세인트 제임시즈 공원을 걸었다. 킹스턴에서 디자인을 공부하고 있는 봄이는 어느덧 영국 1년 차가 되어 그동안의 일상들을 들려주었다. 나에게는 비현실적인 이곳이 봄이에게는 현실의 세계로 존재한다니, 새삼 경이롭게 느껴졌다.
봄이와 나는 열아홉, 사진전을 함께 준비하면서 알게 된 사이다. 우연히 페이스북에서 ‘열아홉’을 주제로 한 사진전의 참가자를 모집한다는 글을 보았던 게 시작이었다.
나와 봄이를 포함한 5명의 여자아이들은 카메라로 서로의 모습을 담으며 그 해의 봄을 함께 보냈다. 학교도 다르고, 사는 곳도 다르지만 사진 하나로 연결된 우리들은 스무 살의 봄에도, 그다음 해의 봄에도 함께했다. 누구도 이렇게 오랫동안 함께 하게 될 줄 몰랐지만 첫 만남부터 알 수 있었다. 묘하고 귀한 인연이 생겼다는 걸.
우리는 발바닥이 욱신거릴 만큼 쉬지 않고 걸으며 대화를 나눴다. 그 사이 노을이 지기 시작했고 노란빛과 분홍빛이 하늘에 펼쳐졌다. 우리는 하던 얘기를 멈추고 동시에 탄성을 내뱉었다. 오늘의 만남을 축하하는 선물이라는 생각이 들 만큼 아름다웠다.
어느새 거리는 가로등의 불빛으로 반짝였다. 봄이는 런던 한복판에 있는 내가 마치 물가에 놓인 아이처럼 보였는지 작별 인사를 나눈 뒤에도 쉽사리 발걸음을 떼지 못했다. 나는 그런 봄이에게 웃으며 말했다.
“봄아, 나 이제 런던 하나도 안 무서워. 혼자 갈 수 있으니까 빨리 가.”
봄이는 무슨 일이 생기면 바로 전화하라는 말을 몇 번이나 내뱉고 나서야 역 안으로 들어갔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따뜻함에 나는 한참을 정처 없이 걸었다.
그래, 영국과의 첫 만남을 마쳤다. 이제 움직일 시간이다. 땅끝 마을 콘월을 향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