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괜찮다고 말하기까지

by 여래

꿈에서도 현실에서도 태산 같은 걱정과 형체 없는 겁을 둘러싼 물러터진 울타리는 여전히 변하지 않았다. 도연은 세상 모든 것들에 늘 쉬이 놀라고 쉬이 감응했다. 마음의 무게를 지탱하는 추보다 그 뒷면에 달린 겁의 날개가 도연에게는 훨씬 더 많은 듯했다. 한 자리에서도 파득거리기를 멈추지 않던 그놈의 '겁'은 분초단위로 흘러가며 변화하는 일상에 정착하지 못했다. 살갗에 닿을 때마다 자꾸만 도연을 울리고 괴롭히고 슬프게 했다. 아승지겁의 인연이 쌓여 마침내 만난 건 든든한 울타리가 되기보다 '겁'의 생살을 허울 좋게 덮어줄 얇은 막 그 이상이 되지 못했다.


서른아홉 해를 살아오며 겹겹이 쌓였을 수많은 슬픔과 울분들, 이제 할 만큼 했고 공감과 눈물과 어우름이라는 이름으로 어지간히 푸닥거리도 해줬으니 이제 그만 들어갈 때 되었지 않나 생각했다. 조금 더 헤집어 본 먼지 굴레 속엔 스스로 입힌 꼽재기도 많았다. 퇴적암같이 세월에 묻혀 두고두고 쌓일 '기억'의 집에 근접할 때면 그땐 그저 받고 입고 겪고 당한 '나'밖에 남지 않는다. 조금씩 편집되고 각색된 기억만을 갖고 영영 변화할 수 없는 굳은살이 되어 살아간다. 그 끝은 결국 왜곡이 되는 줄 그때는 몰랐다. 그렇게 도연은 조금씩 무능하며 답답하며 서글프기만 한 사람이 되어갔다. 그렇게 하나씩 하나씩 기억을 눌렀다. 자신이 만든 스스로의 모습이었을 테다.


내가 만든 자화상의 낯빛은 얼마나 뿔그레한지 창백한지 어둡지만 빛이 보이는지 그건 오롯이 자신의 몫이었다. 말끔한 나를 만나기 위해 씻고 나와 하얀 수건을 머리에 두르고 거울을 살핀다. 어쩐지 오늘은 어느 때보다 말쑥한 얼굴을 한 것처럼 느껴진다. 이내 입으로 투명한 말을 내지 않아 생긴 입술과 턱사이의 불그스름한 종기, 오른뺨 전체에 번진 빨간 송곳 같은 꼬챙이들이 보인다. 그리고 점점 커지고 선명해진다. 그렇게 도연의 얼굴 딱 반츰을 가르며 무시무시한 것들이 보인다.


도연의 삶은 은 실먼지들이라도 눈에 보일 때마다 그저 보기 싫어 이내 고개를 저으며 외면해 왔다. 그게 자신을 지키는 방법이었다. 늘 그렇게 살아왔으니까. 이번에도 피하면 되니까. 이건 내 탓이 아니라 날 이렇게 만든 그들의 탓이니까. '아니 이번만큼은 정말이라고!'

나는 그저 헤어 나오기만 하면 되는 사람이니까. 그렇게 살면 억울함은 남지만 죄책감은 남지 않는다. 그걸 안다. 언제나 도연에게는 마음 안에 한올의 죄책감도 남지 않는 것이 중요했다. 그것만이 다였는지 모른다. 절대로 다시는 오지 않을 세상을 바란 내가 잘못은 아니지 않냐며 세상을 향해 들리지 않는 항변을 할지도 모른 일이다. 그렇게 도연에게서 모두가 아는 그런 세상과는 멀어져 갈 뿐이다. 이내 고개의 반을 돌려 깨끗한 뺨이 있는 곳을 내어두면 어떨지 생각해 본다.

그렇게 가려진 뺨은 가벼운 재채기에도 일랑이는 바람결에도 곧 드러나게 마련이다. 그렇게 살 순 없다고 도연은 생각한다. 마침내 굳은 결심을 한 듯 겨울을 보며 중얼거린다.


photo by chatGPT


'괜찮아. 이런 거 날 수도 있어. 너무 뜨거운 곳에 있다 나와서 이렇게 된 거야. 나아져. 괜찮아.'


숱한 날을 가슴에 멍을 내어가며 다나아가는 살을 다시 뜯어 생채기를 내며 눈물과 섞여 범벅이 된 살갗을 부여잡고 수십세월을 앓은 끝에 '겁'과 마주할 용기를 얻었다. 이제 한 발자국 나아가보겠다고 생각했다. 힐랑이는 먼지도, 잡히지 않는 희뿌연 연기도, 유무형의 것들이 이유도 허락도 없이 살갗을 스치더라도 마침내 터지기 직전 시뻘건 종기가 고름이 된 모습을 보더라도 이제는 괜찮다고. 곧 터지기만 하면 된다고 다 왔다고. 나는 해방이라 외칠 수 있으니 마다하지 않겠다고. 그렇게 말할 수 있는 지금이 오기까지의 세월의 장막이 도연의 눈앞을 멈출새 없이 지나가고 있다.


이제 말할 수 있다. 괜찮다고. 한 걸음만 더 걸어가 보겠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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