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도연은 스님들의 법문을 즐겨 듣기 시작했다. 불자로 산 긴 세월 동안 경전 읽기나 진언외우기, 염불 등에 몰입했을 뿐 귀한 법문을 찾아 듣는 일이 없었다. 들어야 했거나 들을 수밖에 없었던 상황이 아니고서는 먼저 찾아 듣지는 않았다. 듣고 싶은 말만 듣는 습관은 어쩌면 이때부터 였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귀가 있어도 듣지 않고 귓전에 속삭여도 가지런히 귓가에 모은 누군가의 손과 입을 내치기만 했었던 도연에게 어떤 바람이 분걸까? 어떤 계절이 오는걸까?
이제야 좀 듣는 귀가 열리는가 싶다. 어느 스님께서 '한 생각 바로 돌리면 동전의 양면처럼 변화할 수 있다'라고 했다. 한때는 그 말이 도연을 살아가게 했다. 다만 한 생각 바로 돌리는데 삼십 년은 보냈다. 아주 지난하고 힘든 세월이다. 특히 생각을 돌리기 위해 초반부터 무리하게 힘을 빼며 쉬 지치 버리는 순간이 많았다. 너무 지칠때는 손에서 짐을 놓고 잠시 몸을 돌려 등으로 짐을 받치면 감당할 힘의 면이 넓어져 수고를 덜 수 있었을테다. 그러다 힘이 모였다 싶으면 다시 뒤 돌아 그 짐과 정면 대응하면 된다. 그리고 막판에 손과 팔과 온몸으로 완전히 밀어 넘기면 조금은 쉬웠을텐데 번번이 도연은 실패했다. 조금 무겁다 싶으면 이내 놓아버렸고 놓아버린 짐은 그대로 발등을 찍었다. 그것도 아주 크게. 곧 노력해 봤자 안된다는 귀결점에 이르렀다.
그렇게 포기상태로 살아왔다. 포기를 하면 일시적으로 몸이 느슨해진다. 그제사 주변이 보인다. 나 때문에 함께 망가졌던 마음들, 슬픔들, 사람들, 가족들, 상황들. 그때 선택지는 죄책감에 깊은 절망으로 내려가거나 다시금 힘을 내야 하는 순간 둘 중 하나다. 도연은 늘 전자를 택했다. 허나 왜인지 이번만큼은 다시금 힘을 내기로 했다. 내게 되었다. 무슨 이유인지 모른다. 그 즈음 사찰에서 기도 입재를 시작했고 거창한 발원보다는 그저 내가 어떤 사람을 살아가겠으며 조금만 욕심을 낸다면 우리 가족들이 나로 인해 더 힘들지 않기를 바란다는 소박하지만 중심 있는 발원이 주를 이뤘다.
기도집중이 되면 되는대로, 흔들리면 다시금 집중하기 위해 노력했고 어떤 인연에서든 만나는 인연에 충실하기 위해 노력했다. 부정적인 생각이 문득 뇌를 스쳐도 입 밖으로 내지 않기 위해 노력했고 설사 습관에 의해 내뱉어졌다한들 다시 정정하여 바른 생각 바른 말하기에 집중했다. 특히 아이들은 하루 만에도 바뀐다. 부모가 변화하면 반드시.
모든것이 다 바뀌진 않더라도 변화를 주면 주는 대로 받아들여 거울 치료하듯 부모로 하여금 희망을 느끼게 한다. 그래서 부모에게는 무거운 책임감이라는 짐을 양어깨에 주셨지만 함께 공부하며 배워나가란 의미로 자식들을 선물로 주셨는지 모른다고 잠시 생각했다.
'너도 이 아이처럼 빠르게 변화해갈 수 있다는 걸 알려주기 위해서.'
도연에게 그런 날은 이제 막 4일이 지나간다. 4일로 끝이 날지 40일이 되고 4년이 되고 40년이 될지 도연은 모른다. 분명히 확실한 건 노력의 끈을 놓지 않고 있다는 것이고 삽십구년간의 경험이 빛을 발하고 있다는 것이다.
빨리 가려하지 말 것, 순리에 맡길 것 등을 말이다. 듣는 귀가 열리니 마음도 열리고 행복도 열린다. 앞으로도 그럴 것이라고 믿는다. 그리고 매일밤 꿈에서 도연은 한번 더 생각한다. 꿈을 통해 마음 깊은 곳 보이지 않는 내면의 세계를 객관적 시각에서 보게 되고 무엇을 고쳐야 할지 무엇을 누르고 살았는지 무엇을 원하는지 알게되기에. 도연은 그것이 '기도의 힘'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종교적 기도가 되었든 나를 위한 되내임이 되었든 모두가 같은 한 기도에 다름없다. 그래서 '자등명 법등명'은 만고의 순리이며 희망이라 느낀다.
어느 순간, 내 곁에 그렇게 변화의 바람은 불어오는가 보다. 어느 계절로 내 곁을 지켜줄지 기다리고 있다. 그 계절에 맞는 노력을 하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