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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복에 관하여

by 여래

온몸 어디하나 성한 구석이 없다. 한 뱃속에서 나온 자매여도 닮은 꼴을 찾기 쉽지 않았던 도연과 그녀의 언니 재연은 의외의 곳에서 닮은 점이 있었다. 한 번 아플 땐 온 몸이 다 아프다는 것이다. 그야말로 머리부터 발끝까지. 단지 정도와 시기가 다를 뿐이다.


요즘 도연은 그 어느 때보다 더욱 간절하게 기도한다. 이유를 생각하다 보면 눈물이 왈칵 쏟아진다. 도연은 기도할 때 철칙이 있다. 절대로 무언가를 이뤄달라, 해달라는 표현을 쓰지 않는다. 꼭 요행 같아서, 바라는 마음이 커지면 작게나마 내게 있던 복도 날아갈 것 같은 죄책감이 들기 때문이다. 하지만 처음으로 온전히 기대어 바라기만 하는, 아니 바라는 것 외에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황에서 기도를 시작했다. 최대한 틈틈히, 자주 하기위해서는 일상생활 속에 섞여서 할 수 있어야 했다. 따로 시간을 낸다는 것 자체가 무의미 했다. 평상시 기도의 중심은 나 또는 가족일 테다. 일초라도 함께 있을 때 서로 눈맞춤하고 대화해도 모자란시간에 굳이 시간을 뚝 떼어 기도를 한다는 건 하늘에서 기도를 들어줄지언정 실질적 노력부족을 문제 삼아 성취해주진 않는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아침에 눈을 떠 휴대폰을 보는 5분의 시간도 도연의 기도시간이오, 머리를 감으며 샴푸를 헹구는 잠깐의 시간도 기도하기 딱 좋은 때다. 특히 설거지하면서 하는 기도는 묵혀 있던 찝찝함을 정돈된 상쾌함으로 가게하는 기도의 정석을 보기에 가장 좋은 시간이다.


요 며칠 도연은 폭발적 스트레스에 사로 잡혔다. 흡사 단전에서부터 올라오는 집착과 맞닥뜨려야 했으며 집착의 중간지점은 온몸의 망가짐과 흐트러짐, 그 망가짐을 이끌고 마침내 도착한 곳엔 현실자각과 함께 오는 허탈함, 허무함만 있을 뿐이었다. 소위 말하는 글쓰는 사람으로서의 전향을 위한 노를 처음 젓기 시작한 건 삼 년 전이었다. 수단인지 목적지인지 모르지만 평생 함께 가야 할 것은 확실한 집필이라는 것. 이제 막 삼 년 즈음 됐다. 혼자 조용히 글 쓰며 사는 삶은 그것이 곁가지든 주된 통로든 아무 상관이 없다. 자신이 행복한 일이면 그만이다. 하지만 도연은 단기간에 무언가를 이루고 싶었다. 누군가에게 배워 본 적 없는 글쓰기를 화풀이용 낙서로 시작해 슬슬 제법 글다운 글로 변모해가고 있음을 자각하게 되자 스멀스멀 욕심이 올라왔다. 삼 년간 꾸준히 독학해서 써왔고 그 형식이 마음의 소리를 표현하는 데에 주력해온 실력으로 문학공모전이라던지 문학대회에 참가해 장려상이라도 받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었다.




보름전 참가한 문학대회에서의 일이다. 시제는 현장에서 추첨하는 글제였다. 대학/일반부 글제가 발표되자 모든 행운의 여신이 도연을 향해 손짓하고 있었다. 자주 써 본 글제였던 것, 펜을 들기전 10분정도 고민한 뒤 계속해서 글을 써내려갔다. 약 두 시간 동안 400자 원고지 8매 정도를 쓰고 수차례 수정하고 입으로 웅얼거려 본 뒤 어색한 연결부분이 있는지 재차 확인했다. 교정, 수정이 많아 원고지가 뒷장으로 갈수록 상당히 더럽혀져 찜찜한 마음이 들었지만 내용, 구성은 그간 혼자 써온 글들에 비하면 손색없다 생각하며 오후 네시가 넘은 시각 글쓰기를 종료했다. 드디어 원고지를 감독관의 손 넘겼다. 그간 이상한 고집으로 탈고조차 거치지 않던 도연은 그날 탈고의 작업부터 글쓰기 전 개요를 잡는 작업과 같은 사실상 글쓰기 기초에 가까운 기법을 삼 년 만에, 그것도 문학대회에 참가해서야 처음 적용해 보았다.


늘 그렇듯 상을 빙자한 인정욕구와 어쭙잖은 무명상태의 자신감이 버무려져 근 보름정도를 긴장과 기다림과 조바심 속에서 보냈다. 결과발표일이 다가오자 결국 몸은 버티지 못하고 탈이 났다. 마치 응당 받을 상을 못 받은 사람처럼 '심사는 왜 이리 긴 시간이 걸리는 것인지' 말도 안 되는 투정도 부렸다. 스스로 생각해도 우스운 일인 줄은 알았다. 그래서 어디 가서도 하소연하지 못했다. 그저 속으로 끙끙 앓을 뿐이었다. 삼 년간 혼자 분투하며 써왔던 글쓰기에 대한 보상심리의 다른 모습이었다. 도연은 마음을 과하게 쓰면 늘 몸으로 즉각적 신호가 온다. 어깨가 뻐근하다 뒷목이 굳다시피 딱딱해진다. 그러다 두통이 심해지고 구토를 한다. 이런 증상이 올 때마다 "한 번만 살려주세요" 라는 말이 절로 나오지만 그 증세가 가시면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간사한 사람이 된다.


하루 종일 별짓을 다해도 낫지 않던 증세를 보며 도연은 불현듯 떠올렸다. '다 내려놓자.' 상을 못 받으면 이유를 찾기위해 더욱 치열하게 글을 쓰게 될 테고 실망한다 한들 그것을 이유로 글을 중단하지는 않는다는 것만은 확실했다. 정받기 위해서만 쓰는 게 아니라 살기 위해 쓰고 있고 글로 인해 살고 있음을 다시 한번 깨닫게 되었다. 문학대회에 참가 후 보름의 시간 동안 얻은 것이라면 글을 쓰는 이유를 다시 한번 확인했다는 것이다.





도연이 감정의 사치를 부리는 동안 언니 재연은 홀로 싸우고 있었다. 그런 그녀를 보며 도연은 기도했다.

그야말로 돈이든 마음의 병이든 신체에 찾아온 병이든 무엇 하나만이라도 나아지게 해달라고. 하나는 살길을 주셔야 사람이 숨통이라도 트이지 않겠냐고. 척추가 휘고 휘어진 척추뼈가 심장을 압박하고 고혈압으로 인해 신장에도 영향을 주고 그로 인해 몸이 자꾸만 붓는다. 한 두주 사이에도 몸무게가 용수철처럼 늘었다 줄었다 한다고. 이혼한 남편 놈이 양육비도 제대로 보내지 않아 나라지원금으로 먹고살고 있다고. 내가 그 상황이었으면 아이 셋을 혼자 키워낼 수도 없었을 거라고.


내게 올 복이 1%라도 남아있다면 모조리 재연에게 갔으면 했다. 진심으로 언니가 하루라도 희망을 안고 살기를 바란다며 간절하게 기도했다. 결혼 이후 16년간 단 하루도 행복한 적 없었을 재연이 안쓰러워 더는 기도를 이어갈 수도 없을 만큼 눈물이 흘렀다. 붙잡고 매달리며 기도하는 일은 없었던 도연에게 이런 유형의 기도는 간절함 그 이상이었다. 쉬지않고 염불을 했고 언니의 상태가 어떤지 수시로 메시지를 보냈다. 괜찮다는 답변을 듣는것보다 이 연락을 받고 읽을 수 있는 여력은 있는지가 중요했다. 현실이 너무 힘들어 안좋은 선택을 해선 안된다는 걱정이 앞서기도 했다.


삼일째 기도를 마친 날 도연은 참 많이도 아팠다. 이런류의 아픔은 잠시도 앓기 싫은데 이 증세, 불편함 ,통증을 가지고 매일을 살았을 언니가 너무도 안쓰러웠다. 걱정되는 마음에 연락을 취할 때마다 더 안 좋은 상황, 더 안 좋아진 건강에 대해 듣게 될까 봐 한편으로는 겁이 났다. 그저 내 기도를 하늘이 듣는다면 제발 언니에게 단 한구석이라도 살 수 있는 희망을 주길. 인생의 행복을 느끼기엔 현실이 너무도 버겁고 무거웠을 언니가 단 한 번도 개선되고 좋아진 인생을 살지 못하고 그렇게 떠나버린다면 안쓰러워 견딜 수가 없을 것 같았다.


'내가 지금 아픈 게 언니 대신 아픈 걸까? 아니, 언니가 아팠을 고통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지. 그래도 내가 지금 아파 힘들어하는 동안 언니가 편안했으면 좋겠다. 단 하루라도 그리되었으면 좋겠다'는 마음만 계속해서 들뿐이었다.


도연의 주변, 생각, 마음은 일시에 고요해졌다. 지금 스트레스며 걱정이며 집착이라 불렸던 모든 것들이 먼지보다 못한 티끌이 되어 사라졌다. 무의미해졌다. 지금 도연에게 가장 간절한 건 재연의 회복과 희망 그뿐이다. 매다리는일 외에 할 수 있는 게 없었던 기도가 제발 가 닿길 바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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