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 무모한 결심을 했다.
'내가 가는 이 길에 아무 걸림 없이 원만하게 갈 수 있도록 해주시옵고..'
기도를 하다 '아무 걸림 없이'라는 부분에서 양심이 발동한다.
'힘든 일이 생기더라도 견딜 수 있을 만큼만..'
어디까지가 힘든 일의 범주에 들어가는 건지 잘 모른다. 단지 일상에 자주 침투하고 잠들기 어렵게 만드는 일을 힘든 일이라 여긴다. 그 힘듦이 견딜 수 있을 만큼이라면 잠도 잘 자고 일상에 침투하는 일이 없어야 한다는 재해석이 가능하다. 결국 힘들고 싶지 않다. 아무 일도 견디고 싶지 않다. 그저 수월하게만 일이 풀렸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아주 지독하리만큼. 맷집은 사라진 지 오래다. 이십 년간의 힘든 고비들이 나를 더 단단하고 내공 있는 사람으로 만들어주길 바랐지만 그 속도가 지나친 나머지 아무것도 견디기 싫은 사람으로 회귀했다. 단지 하얀 도화지에 아무것도 없어 견딜힘이 없는 이가 아닌 숯보다 시커먼 색으로 뒤덮여져 더는 무엇을 해볼 여지가 없는 사람으로. 무엇이 오든 검은색일 뿐인 그런 사람으로.
늦었다고 생각한다. 서른아홉에 글을 쓰고 이길로 나아가겠다는 것이. 어느 정도는 이루어진 삶을 살며 그 안에서 항해하는 사람이어야 할 텐데. 새싹은 우습고 떡잎은 성에 안 찬다. 사실은 아무것도 아닌 것이 열매인 줄 안다.
열매행세를 하고 다닌다. 얼마나 우습고 설익은 모습인지 다시 생각해도 두눈이 질끈 감긴다.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건 누군가의 침묵이다. 그 모습엔 동조, 동의, 공감, 반대, 짜증, 격멸 그 어떤 모습도 갖고 있지 않다. 진실은 오직 그의 마음속에 있다. 마음엔 채워진 것이 없으니 상대의 1mm 근육 움직임만을 보고도 판단하고 행동하고 실패하고 무너진다. 행세를 하는 것도 똑똑해야 하는 일인 것을. 다만 지혜로운 사람은 행세같은 가짜 착장은 하지 않는다.
서른아홉의 그녀는 똑똑하지 않았다. 그래서 지혜로울 수도 없었다. 또 하나의 행세를 위해 참여했던 곳에서 성과를 내지 못했다. 이번에는 성과가 꼭 필요했다. 안그래도 이미 늦었고 여전히 느린 속도로 가고 있으며 채워진 것도 없기에 더욱 필요했다. 조바심은 간절함으로 위장되었고, 자신이 얻지 못한 결과물은 조언이라는 이름으로 화풀이를 대신한다. 참 못났다. 이렇게 가는 게 맞는 것인지 지난날을 되돌아본다. 분명한 것은 천천히 바르게 긴야 한다. 적어도 빨리 가려면 자신의 일상을 영위하려는 비중을 줄이고 자신의 노력을 갈아 넣어야 했다. 하지만 여전히 그녀는 아무 걸림이 없길 바란다. 자신에게 펼쳐지는 모든 일이 공격적 자극이고 두려움이자 실패라고 받아들인다.
어쭙잖은 그녀의 기도는 껍데기를 그때그때 포장해 줄 뿐이다. 깊은 속마음을 스스로에게도 꺼내 보일 줄 모른다. 내어놓지 않으니 변화할리 없다. 갈고닦으며 천천히 나아가는 방법을 모른다. 지금 당장 여기서 바로 해내야 하는 급박함과 조바심은 늘 그녀의 일을 그르친다. 그리곤 이내 나는 안되는가 보다며 엎어버린다. 그런 마음을 가진 것 치고 글쓰기에 대한 열정만큼은 오래도록 이어져왔다. 제법이라 여긴다. 이제 그녀는 다시 밑바닥부터 시작해야 한다. 그리해야만 한다. 그래야 살 수 있다.
어쩐지 아침부터 모든 감각이 곤두서 있는 날이다. 힘든 하루가 될지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