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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민은 시간만 늦출 뿐.

에필로그2

by 여래

예비 마흔인 나는 이십 년 전 고3 수험생 시절만큼이나 정신없이 바쁜 삶을 살고 있다. 그때는 체력이라도 뒷받침 되었건만 지금은 체력과 해야 할 일을 저울질하며 형평을 따지는 일까지 추가되었다. 그것 만으로도 기력이 빠지긴 한다. 내가 살아가는데 꼭 해야 할 것, 지금 해두면 좋을 것 같은 일들을 바지런히 해나가고 있다. 수입과 직결이 되지 않거나 눈에 띄는 성과가 잘 보이지 않으면 누군가는 하는 것 없이 바쁘다고 할 것이다. 누군가는 자신이 바라는 그 날을 위해 이 정도는 반드시 거쳐야 할 시간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나는 후자 쪽이기에 견디고 버티는 중이다. 예비마흔이라는 나이가 나를 자꾸 채찍질하게 한다. 정말이지 인생의 선배들은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는데 사실 내 몸과 마음은 온전히 다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다. 이십대 후반 결혼해서 삼십대 초반 두 아이를 출산하게 된 것, 입사 4개월 차에 과장직급을 달게 된 것 외에는 무엇하나 평균 내지 정속으로 가는 일은 없었다. 늘 한두 걸음 늦어졌다. 이제와 돌이켜보니 가장 큰 이유는 고민의 시간이 길었다는 것이다.







4년 전 정혜신 교수님을 실제로 만나 뵌 적이 있다. 십여 년 전 '힐링캠프'라는 TV프로그램에서 방송인 김제동과 가수 이효리의 일화를 듣던 중 "이효리 씨의 삶을 보면 금은 아주 많지만 정작 먹을 쌀은 부족한 사람"이라며 이제는 금을 쌀로 바꾸어 살아야 한다는 명쾌한 진단을 해주셨다는 표현이 인상적이 던 분이었다. 정말이지 언젠가는 꼭 만나 뵙고 싶은 분 중 한 분이었지만 상담 진료 예약은 몇 년을 기다려야 하고 그럼에도 지금 당장 만나고 싶다면 그분의 저서를 사서 읽는 일, 유튜브를 통해 만나는 일이 전부였다.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운명처럼 정혜신 교수님의 유튜브에서는 상담 신청자를 접수한다는 글을 보게 되었다. 그것도 사연접수 마감일 하루 전에 말이다. 살고 싶다는 마음과 급한 성격이 더해져 엄청난 속도로 사연을 쓰기 시작했고 삽심분 안에 사연을 보낼 수 있었다. 이틀 후 메일로 답메일이 왔다. 나는 그렇게 마포구 모 실내스튜디오로 향했고, 몇 분의 대기 후 촬영이 이어졌다. 나의 뒤통수와 목소리만 출연하는 전제였다. 지난한 나의 '회사 탈출의 역사' 설명은 이 글에서는 차치하겠다. 이미 삼 년 전 수천번은 쓰고 또 씀으로 비워낸 일이니.


드디어 촬영중간 나의 사연 소개가 이어졌고, 정혜신교수님은 나의 사연을 듣고 나서 모든 고민을 한마디로 정리하셨다.


"저는 ㅇㅇ씨가 과감히 퇴사를 결정하셨으면 좋겠네요. 많이 걱정되고 힘드시죠? 하지만 저는 확신합니다. 퇴사 이후의 ㅇㅇ씨 삶은 훨씬 더 행복해질 겁니다. 저는 그런 분을 정말 많이 만나봤습니다."

나는 그전에도 답을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누군가가 너의 결정은 옳다. 당신이 옳다고 말해주길 바랐는지도 모른다.


나는 그런 확신을 얻고도 실제 퇴사를 하기까지 1년 10개월이 더 걸렸다. 그때 그 순간이 죽을 것 같았고 호흡하기도 힘들 만큼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었지만 그럼에도 부여잡고 있던 것들을 하나도 놓치지 않으려 했고, 자식이 있다는 이유로 나의 갈망인지 아이를 위한 희생인지 스스로도 단번에 파악하기 힘든 고민을 하며 시간을 벌었는지 모를 일이다.






9년을 일했던 신문사를 퇴사하고도 3개월을 방황했다. 하고 싶은 일이 있었지만 밑천이 없었다. 돈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9년간의 수고와 위로비 명목의 퇴직금으로 무엇이라도 자그마하게 시작하기엔 충분한 돈이었다. 그때의 내가 정말 부족했던 건 나의 확신과 급히 이뤄내려는 조급한 마음, 조직의 구성원으로 살아온 날이 대부분이라 스스로 시작할 수 있는 배짱이었다. 3개월 동안 결국엔 다시 가장 능숙했고 잘했던 본래의 업무로 돌아가 오만군데 이력서를 넣었고 다시 또 직장생활을 시작했다. 사람들이 좋았고 부정보다 긍정을 먼저 생각하는 사람들이라 이번엔 잘 해 볼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물론 하고 싶었던 일을 동시에 병행한다는 스스로의 조건이 있었지만 말이다. 그건 바로 지금처럼 글 쓰는 사람으로 살겠다는 것이었다. 취미로 쓰는 사람 말고 글을 쓰는 게 주업이 되어 확장해 나아가는 사람.


하지만 업무에 대한 사고방식과 습관은 또 다시 내 몸과 마음을 지배하는 듯 했고 글쓰기는 뒷전으로 밀렸다. 무언가 열심히 끄적이고 쓰긴 했지만 화풀이 가까운 글이었다. 2년을 회사, 퇴사에 관한 이야기를 썼으니 참으로 나도 징하디 징했다. 다시 또 몸과 마음은 아파오기 시작했다. 어렵게 퇴사한 이후에도 하고 싶은 것을 과감히 하지 못하고, 익숙함과 당장의 생활을 영위하려는 마음을 좇아 9년의 고통을 답습하는 삶을 선택한 나를 채찍질할 수밖에 없었다.


두 번 세 번 아플 순 없었다. 여러 이유 중 가장 간결하고 이해가능한 어쩌면 상투적인 사유를 들어 2년 만에 다니던 회사를 정리했다. 그 다음의 그림을 보다 선명하게 깨끗하게 잘 그리고 싶었던 만큼 그 회사와의 마지막을 평화롭게 장식하고자 참으로 애썼던 시간이었다.






그렇게 나는 1년 동안 관련 자격증을 따고 해당분야에의 감을 익히기 위해 단기 아르바이트를 평행하고 있다. 이미 굳은 것 같은 뇌를 수차례 노크하며 마감하지 못한 학업도 이어가고 있다. 경험과 얄팍하지만 스스로 습득한 지식을 적절히 조화하는 연습도 하고 있다. 연륜은 있지만 지식이 부족하고, 지식은 부족해도 임기응변은 늘기도 했다. 예비 마흔에의 장점을 최대한 활용하며 이제껏 한 번도 해보지 않은 연단에 서서 나의 이야기를 전하며 글쓰기 노하우를 전하는 첫 무대를 앞두고 있다.


무모한 도전일지 모른다. 어쩌면 내 예상대로 흐르지 않아 훗날 흑역사가 될 수도 있다. 그럼에도 기다림의 시간, 고민의 시간이 길었던 만큼 무엇이라도 시작하는 것이 가장 빠른 길임을 알고 있다. 새로운 것을 배울 때마다 굳다 못해 대리석처럼 딱딱한 뇌를 탓하고, 여전히 스스로를 미워하는 날은 많다. 하지만 그때마다 되뇐다. 말하는 대로 이뤄지고 행동한 대로 나아간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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