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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정한 눈길 손길과 느긋한 마음이면 될 것을

by 여래

도열해 있는 해야 할 일들. 찰나의 집중으로 해결할 수 있는 간단한 일이라 해도 길고 긴 대열에 합류시켜본다. 곧장 캘린더 기록행이다. 장을 보러 가는 가야 한다는 일상적인 것 조차도 포함된다. 캘린더 작은 일자별 사각 그라운드에 빽빽한 글자들의 몸집을 불리고 덩치를 키운다. 바쁘게 살고 있는 부지런한 사람 중 하나로 보이기에 딱 좋은 몸체 될 정도면 가능하다.


하루 일정이 한 다섯 개쯤 되면 스스로에게 마땅한 칭찬을 해준다. 편하게 잠시 누워있어도 마음이 편해도 된다라는 면책 특권 같은 것. 적어도 자괴감에 빠져 나의 게으름을 탓하지는 않을 수 있다. 가끔 시간을 좀 써야 하는 일정이 한두 개 정도 되면 긴장도를 낮추는데 꽤 도움이 된다. 여러 군데 긴장의 날을 세우지 않고 제법 평화롭게 일을 해결해 낼 수 있다. 이런 것들이 고작 서른아홉의 나이에 이룬 도연의 성과라면 성과다. 뇌의 한 부분을 힘껏, 양껏 사용하고 인내심을 요하는 정도의 약간의 충격이 도연에겐 최적의 노력이겠다. 충격은 아니고 뇌의 일깨움에 가까운 정도다. 만일 그 이상 노력하려 한다면 다른 할 일들을 일찌감치 쳐내야 하는 빠른 속도가 필요하다. 되돌아보니 도연은 최적화된 멍석이 깔려야 무언가를 할 수 있는 사람이다. 큰일을 하기 위해 작은 일은 모두 완료가 되어있어야만 온전히 큰 일에 집중할 수 있다는 그녀의 논리. 큰 일이라 함은 제3자와 엮이는 일이다. 단 몇 분의 짧은 만남도 해당된다. 가깝거나 먼 것과 상관없이 자신이 아닌 누군가와 만나는 일은 도연에게 가장 공력이 많이 들어가는 일이 된다. 왜 이렇게까지 된 건지 지난한 그간의 과정이 이젠 생생하지 않다. 누렇게 빛바래 졌다. 그럼에도 다시 생각해 보건대 20~30대 그 언저리에서 이성적 사고를 하는 어딘가가 고장 난 건 분명하다고 생각한.




두 아이의 엄마, 캘린더 속 아이를 향한 시선은 찾아보기 힘들다. 자격증 공부를 하고 기도를 하고 청소하는 시간마저 포함되어 있지만 오후 3시 학원과 같은 아이가 해야 할 일은 있어도 아이를 위한 일은 없다. 가끔 특식을 해주고 싶은 마음이 들 때 버젓이 가족공유캘린더에 등록해 둔다. 생색이라도 내는 것처럼. 당연하기만 한 작은 생색으로 몇 달을 보낸다. 마냥 모성애가 없는 엄마는 아니라면서. 오늘은 아이들이 좋아하진 않지만 건강에 도움 될 고구마를 무려 튀김까지 해서 주었으니 엄마로서 역할을 넘치게 해냈다고 여기면서.


그러면서 샤워하러 가는 아이들이 벗어놓은 옷을 보며 들으라는 듯 중얼거린다. "언제까지 이런 걸 엄마가 치워야 해?"


"엄마! 이것 좀 봐 봐!"

"응 그래 잘했네."

거의 쳐다보지도 않은 상태로 대답한다. 긍정어를 사용하여 화내지 않았으니 또 한 번 엄마로서의 품위와 다정함을 유지했다고 착각하면서 하루를 마무리한다. 고구마튀김보다 귀한 건 아이의 부름에 잠시 하던 일을 일시에 중단하고 오로지 아이에게 해주는 눈 맞춤 5초와 아이들을 재우며 아직도 끝나지 않은 나의 캘린더에 체크표시대신 한 번 더 머리칼을 등을 쓰다듬어주는 3분의 시간이 더 소중하다는 걸 알고 있다. 도연은 두 아이를 품에 안기 전에도 알고 있었지만 수년이 흐른 지금도 여전히 지켜내지 못한다. 그저 다정한 손길눈길 한 번이면 될 것을 언제나 아이들을 위한 일을 목록화 스케줄 화해서 가장 눈에 띄는 곳에 보이려 하는 습관을 고치지 못했다.


그저 눈길, 손길, 마음이면 되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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