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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서 Mar 30. 2024

웃음, 교묘한 경고

비문학 리뷰 | 앙리 베르그송,《웃음-희극성의 의미에 관하여》

앙리 베르그송 지음 | 정연복 옮김 | 문학과지성사 펴냄





나는 왜 웃을까?


세상 살다 보면 웃긴 일이 많다. 단순하게는 길을 가다가 난데없이 발이 꼬여 넘어지는 사람을 보고도 웃음이 나고, 유명 희극인이 영화 캐릭터 분장한 걸 보고 웃기도 한다. 웃다 보면 뇌가 깨끗해지는 느낌이 든다. 마음도 한결 산뜻해진다. 웃음에는 분명 신묘한 힘이 있다.


그런데 나는 얼마 전 참 이상한 현상을 하나 발견했다. 내가 기분이나 몸 상태가 더 나쁠 때, 더 자주 웃는 거다! 이 개인적인 경험을 일반화할 생각은 없다지만, 뭔가 이상하다고 느껴졌다. 나는 심지어 전혀 웃기지 않은 걸 보고도 습관적으로 웃고 있었다. 솔직하게 고백한다. 춤과 노래 실력이 그저 그런 아이돌 가수의 무대를 보며 ‘웃기다’고 생각했다. 그는 그저 묵묵히 자기 할 일을 열심히 해내고 있었는데도 말이다. 그러니까, 나는 남이 노력하는 모습을 보며 웃었다.


이 사실을 인지한 후로부터, 나는 나의 웃음을 의심하기 시작했다. 내가 웃음이 많아진 게 과연 행복의 징표일까? 내 웃음의 원천은 즐거움일까, 혹은 남을 깎아내리고 싶은 치졸한 욕망일까? 나에게는 정말로 웃을 ‘자격’이란 게 있는 걸까? 나는 왜 웃을까? 웃음은 천진해 보이는 얼굴 뒤에 잘 벼려둔 칼날을 감추고 있는 게 아닐까?     






우스꽝스러운 경직성


《웃음》은 1927년 노벨 문학상을 받은 세계적인 프랑스 철학자 앙리 베르그송이 웃음, 특히 ‘희극성’에 의해 발생하는 웃음을 주제로 발표한 세 논문을 엮은 책이다. 베르그송에 따르면, 웃음을 알기 위해서는 우선 인간다움에 관해 고찰해야 한다. 왜냐하면 “인간적인 것이 직접 연관되지 않는다면 희극성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인간성에 관한 고찰에는 훨씬 더 많은 지면을 할애해야 마땅하겠지만, 이 책에서 주요하게 다루고 있는 성질에 집중하여 간략히 설명하자면, ‘연속성’이다. 우리는 예능 프로그램에서 연예인들이 특정 인물의 목소리나 말투, 표정을 모사하는 개인기를 뽐내는 것을 흔히 볼 수 있다. 2010년 드라마 <파스타>에서 배우 이선균 씨가 “봉골레 파스타 하나”라고 말한 이후 얼마나 많은 사람이 같은 대사를 내뱉었는가. 2023년 현재까지 이선균 씨를 따라 하는 성대모사가 여전히 효력을 발휘하고 있다. 우리는 이러한 성대모사를 듣고 웃는다.


즉 우리의 영혼 상태는 시시각각 바뀌고 이 변화를 우리의 몸짓이 충실하게 따른다면, 그리하여 우리가 살아 있듯 몸짓 또한 살아 있다면, 결코 반복해서 같은 몸짓을 하지 않으리라는 사실이다. (…) 어떤 사람을 흉내 낸다는 것은, 바로 그 사람의 인격 속에 스며들어 있는 자동기계적 부분을 드러내는 것이다. 이것 때문에 인물은 우스꽝스러워지고, 그러한 모방을 보며 우리는 당연히 웃게 된다.


정리하자면, 시시각각 변화하는 인간 생의 본질과는 달리 멈춰 있거나, 뻣뻣하게 굳거나, 기계장치처럼 특정 동작을 반복할 때 희극성은 존재를 드러낸다.      






사회선(善)의 집행자


끊임없이 변화하는 인간은 사회적인 동물이다. 베르그송은 인간이 이루는 사회 역시 하나의 유기체처럼 계속하여 변화한다고 본다. 또한 이러한 사회가 균형을 이루기 위해서는 사회 구성원이 서로 적응하려는 노력을 지속해야 하는데, 따라서 개인의 “성격, 정신, 나아가 몸이 보여주는 모든 경직성”은 사회 규범에서 벗어나 있다. 웃음의 원천이 인간답지 않은 ‘경직성’이라면, 웃음의 기능은 경직성을 교정하는 데 있다. 웃음은 사회선을 수호하는 날카로운 칼날과도 같은 것이다.


그러므로 희극성이란 즉각적인 교정을 요하는 개인과 집단의 결함을 나타낸다. 웃음은 이것을 교정한다. 웃음은 이런저런 사람이나 사건에서 보이는 특정한 방심 상태를 두드러지게 만들며, 그것을 응징하는 사회적 의사 표시인 셈이다.


그렇다면 웃음은 과연 절대적인 선(善)이, 의로움이, 바람직함이 될 수 있을까? 그렇지 않다. 때로는 ‘정직성’도 웃음거리가 된다. 베르그송은 몰리에르의 희극 <인간 혐오자>에 등장하는 주인공 알세스트를 예로 든다. 알세스트는 ‘과도할 정도로’ 정직한 인물이다.


알세스트라는 인물은 나무랄 데 없는 교양인의 성격이다. 그러나 그는 사회와 타협할 줄 모르고, 바로 이 때문에 희극적이 된다. 유연한 악덕은 완고한 덕보다 웃음거리가 될 위험성이 적을 것이다.


웃음은 사회의 균형을 도모하기 위한 우리의 노력에 허점이 생기지 않도록, 우리가 방심하지 않도록, 우리가 멈추어 있다면 다시 앞으로 나아갈 수 있도록 우리를 이끌어 주는 인솔자다. 그러나 그 방향이 절대적인 덕을 향하지는 않는다. 웃음은 때로 잔인하고, 차별적이며 혐오적이다. 그리고 끊임없이 변화한다. 베르그송은 책에서 이런 질문을 던졌다. “왜 사람들은 흑인을 보고 웃는가? (…) 그런데 나는 이 문제가 어느 날 길에서 만난 한 평범한 마부를 통해 풀리지 않았나 생각한다. 마부는 자신의 마차에 앉아 있는 흑인 승객을 ‘제대로 씻지 않은’ 사람으로 취급했다.” 저자인 베르그송이 살던 시대엔 흑인을 보고 웃는 것이 문제가 되지 않았다. 하지만 우리는 지금 흑인을 보며 웃지 않는다. 단지 누군가가 흑인이라는 이유로 웃는다면, 그는 그저 차별주의자가 될 것이다.     






멀리서 본 밈(meme), 가까이서 보니…


관련 기사: "십자군 복장 입고 닭인형 '꽥꽥'… '1호선 빌런' 안타까운 사연, 중앙일보


끝으로 인터넷에서 ‘밈’처럼 퍼져나갔던 사진 한 장을 소개한다. 일명 ‘1호선 빌런’으로, 십자군 옷을 입고, 가면을 쓴 채, 한 손엔 성경을, 한 손에는 꽥꽥 소리 나는 닭 인형을 들고 다닌 한 남성의 사진이다. 그 사진은 많은 사람에게 웃음을 주었다. 우리 사회에서 그것은 이해할 수 없는 행위였기 때문이다.


사진 속 남성은 후에 글을 올렸다. 대인기피증이 심해 오랫동안 치료를 받아온 그는 문득 가면을 쓰고 나가고 싶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가면을 쓰고 바깥에 나가니 다른 사람과 더 잘 대화할 수 있었고, 재미를 느꼈다는 사연이다. 이러한 사연을 듣고 나니 더는 웃음이 나지 않았다. 대중도 웃음을 거두고 응원과 지지를 보냈다.


인생은 멀리서 보면 희극,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라는 유명한 경구가 있다. 슬랩스틱 코미디와 비판적 의식을 결합해 시대를 아우르는 풍자적인 코미디 영화를 만들어 낸 찰리 채플린이 한 말이다. 베르그송은 웃음이 감성이 아닌 지성에서 비롯된다고 주장했다. 누군가의 상황과 감정에 이입한다면 웃음은 발생할 수 없다. 희극성이란 대상과 자신을 분리하고, 냉담한 태도를 갖출 때 발생한다는 것이다. 앞에 적어둔 나의 고백을 기억하는지. 만약 내가 무대 위에서 힘을 다해 노력하며 노래하고 춤추는데 실력이 썩 뛰어나지 않다면…. 나는 그러한 나 자신을 보고 마음 편히 웃을 수 있을까? 우리의 웃음은 모든 때에 합당할까? 우리의 웃음 저변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함께 고민해 보자.





인문교양 월간 <유레카> 2023년 9월호에 기고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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