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십 년의 경력

아직 끝나지 않았다

by 정혜영작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이십 년의 경력




상담실 기록



오늘 상담실 문을 연 것은 마흔여덟 살 김미정 씨였습니다.

그녀는 명품 가방을 들고 있었지만 손가락에는 결혼반지가 없었습니다.

"상담 부탁드립니다.


저는 한 달 전에 이혼했습니다."

그녀는 가방에서 서류를 꺼냈습니다. "이혼 판결문에요"

"이십오 년을 함께 살았습니다. 대학 졸업하고 바로 결혼했습니다."

"남편은 제게 말했습니다.

당신은 집에서 아이들만 키우라고. 내가 돈을 벌 테니까."

미정 씨의 목소리가 떨렸습니다.

"저는 그 말을 믿었습니다.

직장을 그만뒀습니다. 아이 둘을 낳아 키웠습니다."

"이십 년 동안 전업주부로 살았습니다.

애들 밥 차려주고 학교 보내고 학원 보내고 설거지하고 빨래하고 청소했습니다."

"그게 제 일이었습니다. 제 인생이었습니다."

미정 씨는 이혼 판결문을 내려다보았습니다.

"그런데 남편이 다른 여자를 만났습니다.

회사 후배래요. 저보다 스무 살 어린 여자였습니다."

"남편은 이혼을 요구했습니다. 더 이상 당신과는 살 수 없다고 했습니다."




미정 씨는 또 다른 서류를 꺼냈습니다.

"재산 분할 판결입니다."

"집은 남편 명의였습니다. 예금도 남편 명의였습니다. 주식도 남편 명의였습니다."

"저는 이십 년 동안 살림을 했지만 제 명의로 된 재산이 없었습니다."

미정 씨의 손이 떨렸습니다.

"법원은 재산의 사십 퍼센트를 제게 주었습니다.

이십 년을 함께 살았는데 삼십 퍼센트요."

"변호사가 말했습니다. 전업주부는 경제 활동을 안 했으니 기여도가 낮다고요."

"제가 밥하고 빨래하고 아이 키운 게 기여가 아니래요."

미정 씨는 눈물을 닦았습니다.

"재산 분할로 받은 돈으로 작은 빌라를 샀습니다. 그게 제 전 재산입니다."

"아이들은 대학생이 되었습니다. 등록금이 필요합니다. 생활비가 필요합니다."

"저는 이제 돈을 벌어야 합니다."




미정 씨는 가방에서 이력서를 꺼냈습니다.

"취업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이력서를 쓰는데 막막했습니다.

경력란에 쓸 게 없었습니다."

이력서의 경력란은 텅 비어 있었습니다.

"대학 졸업 후 일 년 동안 회사를 다녔습니다.

그게 제 유일한 경력입니다."

"그 후 이십삼 년은 공백입니다. 전업주부라고 써야 하나요.

하지만 그건 경력이 아니래요."

미정 씨는 이력서를 바라보았습니다.

"자기소개서를 쓰는 것도 어려웠습니다.

제가 뭘 할 수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아이들 밥 잘 차립니다. 빨래 잘합니다. 청소 잘합니다."

"이게 제 능력입니다. 하지만 회사에서 원하는 능력이 아니죠."

미정 씨의 목소리가 작아졌습니다.

"컴퓨터도 서툽니다. 엑셀도 모릅니다.

최신 프로그램은 이름도 모릅니다."

"영어도 까먹었습니다.

이십 년 동안 안 쓰니까 다 잊어버렸습니다."

"저는 마흔여덟 살이고 경력도 없고 아는 것도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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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춘 문예 등단 작가 주영. 감성과 상징, 인간의 내면의 이야기를 쓰며 글로 사람의 마음을 어루만지고, 상처와 회복 사이의 여정을 기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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