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길이 맞습니까_2화
영어
초등학교 때부터 시작했다고 하면, 약 12년 동안 그를 졸졸 쫓아다녔다. 끌려 다닌 것도 아니다. 내가 일방적으로 따라다녔는데 여전히 제자리걸음이다. 다른 과목은 암기를 하거나, 머리를 잘만 굴리면 어떻게든 해결이 되곤 했는데 영어는 아니었다. 아무리 들어도 들리지가 않는다. 아무리 읽어도 30%밖에 그 의미를 알지 못한다. (여행을 다니면서는 50% 정도 이해한다고 거짓말을 하고 다녔다. 죄송합니다)
영어의 중요성과 필요성을 익히 잘 알고는 있었기에 학창 시절부터 수많은 영어학원을 다녔다. 하지만 '시험'이라는 단기의 목적을 이루고 난 뒤에는 거뜰떠 보지 않았다. (원인이 여기에 있었습니다) 이것이 반복되다 보니 문법은 여전히 리셋. 듣기도 리셋. 읽기도 리셋이 되어버렸다.
한국에서는 영어를 쓸 일이 거의 없다. 내 분야(영상)에서는 더더욱 영어를 쓸 일이 없다. 나는 아직도 토익 점수가 없다. 간혹 회사 입사지원 시 어학점수를 요하는 공고문이 있을 때는 과감하게 걸러냈다. 언어에 흥미도 없고 관심도 없다. 그렇게 오랫동안 학교와 학원을 오가며 배움을 받았는데, 또다시 시작할 엄두가 나지 않았다. 최대한 영어와 등지고 살고 싶었다.
하지만 해외여행은 다르다. 모르면 질문을 해야 하고, 잘못된 일이 있을 때는 바로잡아야 한다. 대학생 때는 학과에 중국인 유학생들이 꽤 많았는데, 대부분 한국어가 서툴러서 팀작업을 할 때에는 바디랭귀지가 항상 동원되어야만 했다. 식당에서 다 같이 밥을 먹을 때에도 빠른 피드백을 하지 못해 소외되는 경우가 많았다. 얼마나 하고 싶은 말이 많았을까. 약 18일간 해외여행을 하면서 나는 그가 느낀 답답함을 비로소 경험하게 되었다.
출국
떠나기 한달 정도 전부터 부랴부랴 영어를 공부하기 시작했다. 최소한 유용하다고 생각하는 문장들을 몇 마디 외웠다. 저가항공에 경유를 거쳐가야 했기 때문에 괜히 걱정이 되었다. 국내 항공사가 아니었기 때문에 한국인 승무원이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약 14시간을 하늘 위에서 있을 생각만 하면 온몸이 벌써부터 굳어가는 것 같았다. 비행기에서 나는 뭘 필요로 할까. 그래, 물이지. 물 한잔이면 그래도 괜찮을 거야.
Can I have a cup of water?
분명 내가 공부한 인터넷 강의에서는 'a cup of'를 강조했다. 혹시나 까먹어서 중간에 저 'a cup of'를 제외하고 말한다면 난 여행자가 될 자격이 없다. 다시 한국으로 돌아가리. 영어울렁증이 더 심각해지고 있었다. 기내식을 먹고 몇 시간 뒤에 잠이 들었다가 깼더니 너무나 목이 말랐다. 이때다. 드디어 저 문장을 쓸 때가 왔다.
외국인 승무원이 통로를 지나갈 때까지 주위를 살폈다. 입을 다문 채 혀를 굴렸다. "캔 아이 해브 어 컵 오브..." 마지막까지도 연습을 했다. 고요한 적막 속에서 눈을 껌뻑이고 있으니 한 승무원이 내게 다가왔다.
그리고, 대망의 순간.
나는 초, 중, 고 대학을 졸업하며 나름 영어와 씨름하며 살아온 평범한 스물아홉 여자이다. 그러나, 내 입에서 나온 영어는 단 한 마디었다. "Water"
어떻게 이럴 수 있단 말인가. 그동안 영어에 투자한 시간들이 먼지처럼 무너지는 순간이었다. 승무원의 눈을 보자마자 얼음이 되어버렸다. 의문형으로만 비슷하게 문장을 만들었어도, 이렇게 부끄럽지는 않았을 텐데.
그러나 승무원은 바로 고개를 끄덕이며 나에게 물을 가져다주었다. 심지어 그녀는 내게 미소를 지었다. 아무런 문제가 발생하지 않았고, 나는 원하는 물을 얻었다.
신기하게도 그때부터 나의 영어울렁증은 사라졌다. 아, 어떻게든 살아지는구나. 환승도 무사히 했고, 체코에 도착하자마자 미리 검색을 해놓은 버스정류장으로 가서 숙소까지 별 탈 없이 도착했다.
나는 '워우터' 한마디로 모든 감을 잡았다고 생각하며 일찍 잠에 들었다.
그랬다. 최소한 첫 날 만큼은.
글/그림/사진 여미
yeoulhan@nate.com
이 길이 맞습니까 3화_프라하 2일차로 돌아오겠습니다. (예쁜 필름 사진과 함께)
여미의 첫 그림에세이도 많이 사랑해주세요.
오늘도 울면서 걷기! :) (울지않고 걸으면 더욱 좋지만요!^^)
" 시시때때로 몰려오는 고난에 울더라도 뒤로 가지는 말자고, 천천히 한걸음씩 나아가자고, 스스로를 다독이는 동시에 그대에게 말을 건넨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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