푹신푹신한 베개에 얼굴을 파묻고 시원한 감촉을 느낀다. 창문 바깥으로 들려오는 시원한 빗줄기 소리를 들으며 기다란 머리카락을 한 올 한 올 입술로 세어본다. 오늘은 운이 좋은 날이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비 내리는 날에, 휴가를 내서 하루 종일 빗소리를 감상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집 안에 불을 다 꺼놓고, 흐린 날을 더 흐리게 즐기는, 나라는 사람은 분명 어딘가 이상하다. 요즘 나의 큰 고민은 꿈이 없어졌다는 것과, 창작 욕구가 줄어즐었다는 것이었는데, 이렇게 비가 오는 날에는 노트북을 찾게 된다. 오늘은 뭐라도 쓰고 싶다, 생각이 들면서 과거의 기억들을 꺼내본다. 처음 대학에 입학하던 날이 떠올랐다. 친구 한 명 없이 고독하게 버스에 오르던 나의 감정이 너무나 생생하다. 그때만큼 고독했던 적은 없었을 것 같다. 주위만 두리번거리며 무거운 발걸음을 옮기던 나의 스무 살은 밍밍함 그 자체였다. 모든 게 낯설기만 하고 새로움은 두렵고 영원히 혼자가 될 것만 같고 길고 긴 인생은 지루하고 권태롭게만 느껴졌다. 연애는 커녕 대학 친구 한 명 없이 이렇게 20대를 보내는 건가 싶었던 때가 있었다니.
지금은 일도 안정적으로 다니고 있고, 언제든지 여행을 떠나도 편하고 오래된 친구들이 곁에 있고, 새로운 사람과 친밀감을 쌓는 일은 더 이상 내게 어려운 일이 아니다. 혼자 있음에 안도하고 혼자 이렇게 시간을 보내는 일도 소중하다는 지금과는 달리 그때는 왜 이리 고독이 두렵고 어색하고 부끄러운 일이었는지.
지구에 혼자 남겨진 기분을 종종 느끼곤 한다. 신입생이던 스무 살 때도 그랬고, 졸업작품을 앞둔 시점, 직장을 그만두고 첫 유럽여행을 떠났을 때, 그리고 스물아홉이라는 나이가 그러했다. 시간이 흐르면서 산란한 마음과는 이별하고 안정적이고 평화로운 마음을 얻었지만 더 이상의 불꽃은 없다는 아쉬움.
주륵 주륵
불꽃이 없다는 아쉬움.
글/사진 여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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