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향기로 채워졌던 회색도시
지하철에서 꽃다발을 든 한 청년이 내 옆에 앉았다.
그는 신입 사원인 듯 말끔한 정장을 입고 있었고, 저녁 시간대인 만큼 퇴근을 하는 길인 듯 보였다. 손에는 노란 장미가 대 여섯 개 있는 꽃다발이 들려 있었다. 저 꽃을 받게 되는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 여자 친구일까, 가족일까, 아니면 누군가에게 기쁜 일이 생긴 것일까. 포장지를 천천히 매만지는 그의 손결을 보니 꽃집에 들어가서도 한참을 서성거렸을 그의 신중함이 느껴지는 듯했다.
특별하고 소중한 사람
그는 나와 꽤 오랜 시간 동안 나란히 앉아 있었다. 덕분에 나는 한동안 꽃 향기를 맡으며 기분 좋은 상상을 할 수 있었다. 마치 의도적으로 자신의 색을 죽이고 오로지 꽃잎에만 색을 입힌 듯 엄청난 대비가 느껴졌다. 꽃잎도 어찌나 싱싱하고 탐스러운 지, 마치 사랑을 듬뿍 받은 한 여인의 모습이 그려지기도 했다. 달콤한 향기보다는 이제 막 피어난 꽃잎에서만 날 수 있는 신선한 향기가 더 강하게 느껴졌다. 그가 입은 무채색의 정장과 커다랗고 싱싱한 노란색 꽃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자니 마치 한 폭의 그림을 보는 것 같았다. 회색 빛깔 도시에 회색 옷을 입은 사람들, 그런 어둡고 칙칙한 풍경 속에서 유일하게 ‘색’ 이란 것을 가진 노란색 꽃잎.
힘든 하루를 보냈을 현대인들의 축 처진 어깨 사이로 꽃잎이 바람을 타고 흩날리는 상상을 하게 되었다. 그런 의미에서 꽃은 참 희망적인 메시지를 가지고 있는 듯하다.
작은 씨앗에서 시작하여 새싹이 되고 꽤 오랜 시간을 견뎌 내야 꽃과 열매를 피울 수 있다.
하지만 꽃은 언젠가 시들기 마련이고, 한번 시든 꽃은 아무리 맑고 깨끗한 물을 주고 따스한 햇빛을 쐬게 해도 다시 돌아갈 수 없다. 꽃잎은 점점 딱딱하게 굳어 떨어지고, 줄기는 힘이 없이 말라 간다. 그것은 마치 우리 삶과 많이 닮아 있었다. 우리에게 젊음이라는 가장 찬란하고 아름다운 순간은 안타깝게도 영원할 수 없다.
나 또한 언젠가 지팡이를 짚는 할머니가 되어 손자들에게 그림을 그려주거나 식물이나 채소를 가꾸는 일상을 보내는 상상을 하면 가끔 인생이 참 덧없다는 생각도 들곤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음 한 구석에는 낭만을 품고 살아 숨 쉬고 있는 행복한 할머니를 꿈꾼다.
며칠 전에 80세에 나이에도 불구하고 시를 쓰는 김옥례 할머니에 대한 영상을 보게 되었다. 할머니가 쓴 시는 짧고 서툰 글이지만, 그 안에서 그간 할머니가 살아온 인생이 느껴지면서 눈시울을 붉히게 했다. 달달달 거리는 재봉틀을 비유하여 자신의 생계 수단에 대한 노고와 나름의 애정을 표현하기도 했고, 아픈 딸에게 많은 공부를 시켜주지 못하고 하늘로 떠나보낸 것에 대한 미안함을 ‘공부 공부, 엄매 엄매’라는 간단한 단어로도 할머니의 한이 느껴져 가슴이 많이 아팠다. 그것은 오로지 80년의 세월을 보낸 이만 그릴 수 있는 깊은 연륜이 존재했다.
나는 시든 꽃도 그 만의 아름다움이 있다고 생각한다. 겉으로는 드러나지 않아도 그 내면에는 분명 새로운 새싹이 자라나고 있으리라 믿는다. 그런 의미에서 언젠가부터 시든 꽃들을 버리지 않고 투명한 유리병에 차곡차곡 모으고 있다.
그 안에서 그들만의 진솔한 이야기가 오고 가기를 기대하면서, 그리고 나 또한 그런 사람이되기를 꿈꾸면서.
회색 정장을 입은 청년이 들고 있는 노란색 꽃다발을 보며 이런저런 생각에 잠기니 어느새 그는 떠나고 빈자리만 남아있었다. 사실 그는 만남을 기대하는 설렘보다는 고된 하루를 보낸 듯 많이 지쳐 보였다. 자리에 앉고 얼마 지나지 않아 고개를 푹 숙이며 눈을 붙이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가 들고 있던 꽃다발이 점점 바닥으로 향해 가는 것을 보고 혹여나 꽃잎이 바닥으로 툭 떨어지면 어쩌나, 만일 떨어지면 조용히 주워서 얼른 다른 꽃잎에 올려놔야지, 라는 생각으로 한동안 바라보았던 것 같다.
그래도 꽃을 받게 될 이의 앞에서는 웃는 얼굴로 선물하는 건장한 청년의 모습으로 변해 있을 것만 같았다. 자신의 지친 마음은 드러내지 않고, 오로지 당신 생각이 났다며 아름다운 대화가 오고 가겠지.
오랜만에 꽃을 든 청년을 가까이에서 보니 과거에 내게 꽃을 자주 선물했던 누군가가 떠오르기도 했다. 남자가 꽃을 산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그것은 어쩌면 상대를 정말 사랑하지 않으면 행할 수 없는 일이지 않을까. 어떻게 보면 값은 꽤 나가면서 실용성이 크지 않은 것 중에 하나 이기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여자들은 대부분 꽃을 참 좋아한다. 예쁜 것을 보기만 해도 기분이 좋아지고, 꽃을 선물 받을 만큼의 사랑스러운 여자라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언젠가 시들고 말겠지만 그날 하루만큼은 꽃을 보며 행복과 희망을 느끼길 바라는 그의 사랑이 느껴져서 일까,
집으로 돌아가는 내내 그의 빈자리에서 싱그러운 꽃 향기가 끊이질 않았다.
커버사진 최영미
글/그림 여미
yeoulhan@nat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