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여미 Mar 31. 2022

나의 에너지 저장소

회사에 이틀 연속 휴가를 냈다. 


사실 딱히 계획도 없고, 무슨 일이 있었던 건 아니다. 단지 몸 안의 에너지가 부족했다. 요즘 들어 이상한 찌질병에 걸려 자책과 후회와 한탄을 반복하게 되면서 눈물바다로 밤을 지새웠고, 그랬더니 나를 사랑하는 법도 놓치고 있는 듯했고 누군가를 향한 관대한 마음도 줄어드는 것 같아 두려웠다. 그리고 더 중요한 것은 집이 난장판이 되어가고 있었다. 빨래통을 외면하고 살았더니만 입을 수 있는 속옷도 부족할 지경이었고, 뭔 놈의 머리카락은 이렇게 많이 빠지는지(내 머리카락이긴 하지만) 털 뭉치를 볼 때마다 소름이 돋아 도망가고 싶고(이유는 모르겠음), 보아하니 이불과 베개는 세탁을 하지 않는지 너무 많은 계절이 지나간 것 같았고..... 설거지는 당연히 안 했다. 


그리고 내가 좋아하는 것들을 다시 찾고 싶었다. 좋아하는 책, 좋아하는 작가도 다시 만나고 싶었고, 자전거도 타고 싶었고, 아침 산책도 하고 싶었고, 더욱이 안정된 정서의 내가 그리웠다. 분명 나는 내가 뭘 해야 행복해지는 지를 잘 알고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어제의 '나'와 계속 멀어지는 오늘을 자주 경험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게 왜일까, 생각을 해봤는데 행복이 오지 않는다고 가만히 있었기 때문인 것 같다. 내가 만나러 가야지, 내가 마중 나가야지, 그래야 만날 수 있지!


아침 7시에 눈이 떠졌고, 뒹굴 거리면서 더 잠에 청하려고 했는데, 도무지 더 이상 잠이 오지 않았다. 그렇게 강제 기상을 하고 나서 지저분한 집안을 한번 스윽 보고, '아, 이 집에 한 시간이라도 있지 못하겠다'라는 결론을 내린 뒤 곧바로 샤워를 하고 집 밖으로 나왔다. 세상 밖은 집안보다 훨씬 더 넓고 훨씬 더 시원하고 훨씬 더 쾌적했다. 반쯤 말린 머리를 휘날리며 공원 쪽으로 걸었다. 아침 산책을 하며 내가 앞으로 어떻게 살 것이며, 어떤 마음 가짐으로 인생을 살아갈 것인가에 대한 고찰을 하기는커녕 '배고픈데 뭘 먹어야겠다'라는 계획을 치밀하게 세우고 있었다.


발걸음은 공원 쪽에서 도로변 음식점이 줄곧 이어져 있는 곳으로 향해 있었고, 중간에 길을 잃어서 두리번거리다가 김밥집을 발견했다. 아침부터 배는 너무 고팠고, 따뜻한 한 끼가 너무 먹고 싶어서 아무도 없는 매장 안으로 조심스럽게 들어왔다. 사장님은 친절하게 나를 반겨주었고, 들어오자마자 왠지 맛있을 같다는 직감이 들었다. (그냥 배가 고파서였던 같다)


햇살 가득한 창가 쪽 1인 테이블에 앉았다. 김밥과 라면을 주문하고, 음식이 나올 때까지 핸드폰을 만지작 거리려고 했는데, 1분도 안돼서 김밥이 벌써 나왔다. 생각보다 엄청 크고 통통해서 깜짝 놀랐다. 중요한 건 진짜 맛있었다. 이렇게 맛있는 김밥은 정말 처음 먹어봤다. 한 알을 입안에 가득 넣고 우걱우걱 먹고 있는데, 도리어 라면도 금방 나왔다. 어떻게 이렇게 음식이 빨리 나올 수 있나, 싶을 정도였는데, 라면도 기가 막히게 맛있었다. 파가 송송 뿌려져 있었고, 면은 탱글탱글했다. 계란은 풀어있었는데, 흰자와 노른자가 뭉쳐있는 부분과 아삭한 파와 함께 국물을 떠먹으니 두 눈을 찡긋 감고 감탄이 절로 나왔다. 
'아, 이 맛있는 김밥과 라면을 먹기 위해선 죽는단 생각 말고 오래오래 살아야 해' 




브런치에 혼밥을 하면서 '음식으로부터 위로를 받는다'라는 글을 발행한 적이 있었다. 오늘도 그랬다. 딱 맞는 간이 베인 밥알과 통통하고 꽉 찬 야채들, 시원하고 아삭한 라면 국물, 부드러운 계란.... 잊을 수 없을 정도로 나는 오늘도 정성이 가득 담긴 음식을 먹음으로써 위로 한 스푼 선물 받았다. 만든 사람의 고민과, 정성과, 노력이, 느껴져서 나에게 고스란히 다가왔다. 제 돈 주고 먹은 음식인데도, 나는 값진 선물 받은 사람이다. 


그동안 힘들다, 힘들다 하면서 울고 불고 짜증 부리던 날이 무색하게, 나는 오늘 김밥과 라면을 아주 맛있게 먹음으로써 모든 에너지를 되돌려 받았다. 그 에너지를 모으고 모아 밀려 있던 집안일을 깡그리 끝내고, 자전거를 타고 동네 도서관에 가서 책도 잔뜩 빌려왔다. 도대체 나, 왜 힘들어했던 거야?


나는 가끔 행복을 만나러 가기 벅차다. 상대의 툭 뱉어진 말과 행동에 상처받은 마음을 보여주기도 창피하고, 그렇다고 안고 있자니 너무나 뜨거워서 2차 화상을 입는다. 화상 입은 마음에 물을 뿌리려고 눈물을 와장창 흘리고 나면, 개운하긴 하면서도 몸 안의 기운이 온데간데없다. 그렇게 나는 가끔 길을 잃고 방황한다. 에너지가 없어서 좋게 말도 안 나오고, 상대의 의도를 쉽게 단정 짓고 토라진다. 


정서가 불안할 땐 뭘 안 하는 것이 상책이다. 가만히 뇌를 쉬게 해 주고, 몸을 쉬게 해 줌으로써 에너지를 모은다. 모은 에너지들을 발바닥으로 보내면서 여기저기 돌아다녀보기도 하고, 발길 닿는 곳에 스윽 들어가 우연이 주는 맛을 즐기도록 한다. 


미래 계획을 세우는 건 잠시 내일로 미루고, 조금 더 '이곳'에 집중하기도 한다. 

행복이 오지 않는다면, 내가 만나러 가자. 



모으고, 모아 당신에게 줄게요!

글 여미

yeoulhan@nate.com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