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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미 Sep 20. 2017

인연 백서

가장 너덜너덜 해졌을 때 찾아오는

내가 당신을 사랑했을 때는 당신은 나를 쳐다보지 않았고, 당신이 나를 바라보았을 때는 시간을 내어줄 수 없을 만큼 마음의 여유가 없었다.


그래서일까, 내 순정은 늘 허무하게 홀로 남겨졌다. 서로 어울리며 함께 흐르고자 했지만 그 조차도 나 혼자만의 독백에 불과했던 것인가. 종착지도 불분명하면서 나는 왜 깃발을 내리지 못하고 그대를 향한 항해를 멈추지 못하는가. 어쩌면 알면서도 속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내 진심이 그대의 진심이길 바라면서.


어긋난다는 것은 그렇게 나의 전문이 되어버렸다.


왜 내가 원하는 대상은 나를 원하지 않는가. 아마 세계 공통 질문이 아닐까. 내가 마음에 들어하는 상대는 나보다 더 괜찮은 상대를 원하기 때문이 아닐까? 당연한 것일 수도 있겠지만, 어떻게 보면 참 잔인한 듯하다. 나 참 괜찮은 사람이라 생각했는데 슬슬 부정이 오기 시작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달콤한 그 말 한마디가 그렇게 반갑고 설렌다. 왜 그 순간만큼은 똑똑해질 수 없었을까. 본인의 속도를 잊은 채 다른 사람이 되어가고 있는 나 자신이 부끄럽고 미울 지경이다. 의지할 곳이 없어 한없이 쓸쓸해서 일까, 그렇다고 해서 마음에 들지 않는 상대와 시간을 보내려고 하지도 않는데 말이다.


그러하다. 나도 누군가에게 상처와 시련을 주었을 수도 있겠다. 깊게 관찰해보진 않았지만,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결국 이렇게 돌고 도는 회전목마 인생인 것일까. 서로에게 결코 가까이 닿을 수 없는, 움직이지 않은 조랑말에 탄 기분이다.


그래, 따뜻한 봄바람이 내게 불어올 리가 없지.


꽤 낙천적인 말을 하자면, 아니 굉장한 핑계를 대자면 살면서 겪는 적당한 충격은 어느 정도는 필요하다고 본다. 한동안 집중하고 갈망했던 것을 허탈하게 놓쳤을 때, 내가 살고 있는이 세계에 대한 관심과 집중력이 상승한다. 지금 까지 내가 들인 노력에 대한 결과가 떨어진 낙엽보다도 못했다는 생각이 들 때 나라는 인간은 더 이상 잃을 것이 없겠구나, 라는 해탈의 상태에 이르게 되면서 한 가지 거대한 질문을 내게 던진다.


과연 나, 열심히 살고는 있었던 것인가 하면서.


쓸데없는 것에 시간을 들였다는 사실에 잠시 분노하다가도 그 충격의 결과로 인해 이전보다는 부지런해진다. 소중한 나 자신을 돌볼 수 있는 사람은 여전히 나이고 그 다음에도 나라는 사실을 다시 한번 인지하게 되는 것일까, 마음만 먹고 실천하지 못했던 것들을 하나씩 해결해간다. 너덜너덜 해져버린 나는 무엇을 하든 냉정 해지고 만다. 근거 없는 도도함이 내 방 창문을 너머 우주까지 뻗어 나간다.


그래, 그 누구도 오지 마라. 와도 받아주지 않을 테다.


중요한 사실은 이러한 발견의 과정이 세월이 흐를지라도 계속 반복된다는 사실이다. 사랑에 빠지게 되고, 또다시 혼자 남겨지게 되는. 그렇게 너덜너덜 해지고 까칠해진 나는 불친절하게 변하고 만다. 두 마디 할 수 있는 것도 한 마디로 줄이고 나중에는 그 마저도 성가시다. 상해버린 자존심을 다시 일으키기에는 내 마음의 방은 아직 까지 참 좁다.


그러나 진짜 인연은 여기서부터 시작된다.


평소에는 눈길도 안 주던 뻣뻣한 나무 한 그루가 등 뒤에 서 있었음을 알게 된다. 꽤 못났다고 생각하여 그동안 단 한순간도 쳐다보지도 않았던 그 나무는 여전히 나에게 눈이 오나 비가 오나 손을 내밀고 있다. 그 전보다 까칠하게 굴어도, 충분한 대답을 하지 않아도 그 손은 그대로 나를 향해 있었다. 너덜너덜 해진 내 마음의 상태도 잘 알지도 못하면서, 이 사람은 왜 나에게 늘 친절한 것일까.


원하는 상대가 있었을 때는 눈길 한번 안 주던 사람이 서서히 보이기 시작한다. 내가 이렇게 대해도 이 사람 정말 괜찮은 거야? 따뜻하게 대해준 적도 없었는데도 정말 괜찮은 것이야? 에라, 모르겠다 하며 무심히 그의 손을 잡았을 때, 그때 바로 진짜 인연은 시작된다.


왜, 드라마나 영화에서도 흔히 있는 일 아닌가. 여주인공이 꿈꾸던 달콤한 로망이 깨져버리면서 처참히 버림받았을 때 그의 옆에서 가만히 어깨를 내어주는 청년의 모습을 기억하는가. 따뜻한 말이나 행동으로 슬픔을 달래주는 사람에게 느끼는 감정, 그것 또한 인연의 시작이 아닐까?


안타깝지만 나는 대부분 내가 원하는 상대와 잘 된 기억이 없다. 다가가면 멀어지고, 멀어지면 다가갈 수 없었다. 그렇게 낡고 힘없는 종잇장 몸을 펄럭이며 정처 없이 날아다니고 있을 때 두 팔 벌려 기다려주었던 사람이 나의 진짜 인연이 되었다. 내가 누군가에게 향했던 순정의 실체를 맞이했을 때 한 동안 가뭄 같았던 내 마음의 창에는 향긋한 봄비가 내리고 있었다.


이제는 오히려 인연 만들기에 너무 집중해서도, 너무 관심을 가져서도 안된다는 것을 알았다. 그런 말이 있지 않은가. 만날 사람은 만나지 않으려고 해도 만나게 되고, 안 만날 사람은 어떻게든 만나려고 해도 이어지지 않게 되어 있다. 모든 인과 과정을 우연이라는 것으로 포장하고 싶지는 않지만 나는 어느 정도는 그렇게 생각한다.


당장 대상이 없다 해도 피로에 찌들어 마음까지 쪼그려놓지 말길 바란다. 심장 한 구석에 언제든 사람을 향해 뛸 여분의 공간을 마련해 두라. 순정은 어떤 순간이고 찾아올 수 있다. 돌고 돌아 지나간 연인을 다시 만나, 당신의 심장을 덥히고 맹렬하게 뛰게 할지도 모를 일이다.– 안은영 ‘여자 인생 충전기’


어쩌면 나는 판타지를 꿈꿔왔던 것일까. 나의 부족함을 채워줄 수 있는 멋지고 화려한 사람을 갈망하기만 바빴던 것일까. 내가 원하는 인연을 찾아 만들어간다는 것은 참 어려운 일이다. 적어도 나에게만큼은 그러했다. 어떻게 생각해보면 인연의 시작은 말랑 말랑한 솜사탕 같은 것이 아니라 메마른 감정에서부터 시작되는 것이 아닐까? 모든 것을 내려놓고 나의 갈 길을 가고 있을 때 서서히 찾아오는 따스한 봄바람과 같은 것.


나 자신에게 충실하고, 내 생활에 충실하는 것만큼 타인의 눈에 빛나 보이는 것은 없다. 그리고 언제든 순정을 받아 들 일 수 있는 넓고 아늑한 보금자리를 가슴 한편에 마련해 준다면, 그대는 인연을 맞이할 준비가 되어 있다.


정말 인연이라면, 갖은 노력을 하지 않아도 그대 앞으로 마중 나올 테니.


정말 기다리고 있을 지도 몰라, 너를

글/그림 여미

커버사진 임경복

yeoulhan@nate.com

여미의 인스타그램 ID : yeomi_writ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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