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상처가 되는 걸까
나는 직감적으로 타인을 신뢰하는 경향이 있다.
그 사람의 행실이 겹겹이 쌓이면서 한 형태의 성격을 나타냈을 때, 그것이 어느 순간 나에게 매우 안정적인 느낌을 주었을 때 내 믿음의 깊이는 점점 커진다. 굳이 오랫동안 알고 지내온 사이가 아닐 지라도, 두세 번 마주하고 앉아 이야기를 나누었을 때 직감적으로 느끼곤 한다. 나와 직접적인 관련이 없더라도 사소한 약속까지 신경 쓰고 지키려는 모습을 보면 기본적으로 책임감이라는 것을 중요한 가치관으로 지닌 사람이라고 여기기 때문이다. 터무니없는 이유로 감정적인 선택을 하거나 배신할 일은 적지 않을까, 라며.
신뢰는 거기서부터 시작된다. 자신에게 돌아오는 이익이 적거나 없을지라도, 본인이 약속한 일에는 끝까지 최선을 다하는 사람. 믿을만하지 않을까?
내가 이렇게 누군가를 믿고 싶어 하고, 또 믿는 이유가 있다. 믿음이 시작되는 순간 이전보다 더 친밀한 관계로 발전되기 때문이다. 믿음이라는 것은 그 사람에게 내 안에 있는 다양한 소재를 꺼내고 싶게 만들고, 더 많은 이야기를 공유하고자 하는 원동력이 된다.
하지만 때로는 그 믿음이 돌이킬 수 없는 상처로 돌아오곤 한다.
최근 들어 속상한 일이 많았다. 내가 좋아했던 사람, 믿었던 사람의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을 보며 이 모든 것은 결국 나만의 착각이던 것인가, 라는 혼돈에 휩싸였다. 내 앞에서는 웃으면서 잘 대해주었던 이미지들이 머릿속에 그려지면서, 처음에는 왜 그런 선택을 했어야만 했는지에 대한 이유를 찾다가 점점 머릿속이 화끈해질 정도로 화가나기도 하고 마지막은 슬픔으로 변한다.
왜 결국 슬픔이란 말인가
내가 해결할 수 없는, 어찌할 도리가 없는 일에 마주했을 때 스스로 포기하게 되면서 고통이 따른다. 온전히 순수하게 믿었던 그때 당시의 내 마음이 홀로 남겨졌다는 사실에 안쓰럽기도 하고 멀쩡하던 자아에 큰 타격과 충격을 입고 상처가 되기 때문이다. 기억을 거슬러 올라가다 보면, 굳이 해도 되지 않는 속마음을 필요 이상으로 자세히 알려주었던 자신이 후회스럽고 미워지기도 하다. 며칠 보았다고 덜컥 믿어버리고서는, 구구절절이 이야기보따리를 신나게 풀어헤친 내 탓이란 말인가.
돌고 돌아 돌아왔을 때
이 속상한 마음, 어떻게 해야 할까? 나에게 직접적으로 말할 용기는 없었던 걸까, 그것도 아니라면 나에게 보여주었던 진심은 전부 거짓이었을 까.
사실 믿음을 확인할 길은 없다. 그것을 발견하려는 과정에서 의심이 되고, '나는 너를 믿을 수 없다'라는 것을 스스로 공표하게 된다. 자신의 거짓을 인정하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변명이나 핑계를 곧이곧대로 믿을 수 있는 사람 또한 얼마나 될까. 이미 깨져버린 믿음은 건들면 건들수록 바닥까지 드러내고 만다.
회복할 수 있을까
연인 관계에서 이별 또한 그러하다. 누구보다도 두터운 신뢰 관계에서 진행되는 연애라는 과정이 어느 순간 예상치도 못하게 깨져버리는 것을 경험한다. '나는 오늘도 너에게 지속된 사랑을 줄 것이다'라는 착각을 하게 해놓고, 납득할 수 없는 이유로 갑작스러운 이별통보를 한다. 하늘이 무너지는 느낌을 경험한 적이 있는가. 그 감정은 믿음이 깨져버리는 순간일 수도 있다. 그것 또한 슬픔이다. 원하던 회사에 반드시 합격할 것이라는 믿음이 불합격이라는 통지서로 돌아왔을 때, 내 곁에 항상 있을 거라고 생각했던 사람이 갑자기 떠났을 때, 나와 친밀한 관계에 있는 사람이 내가 모르는 두 개의 가면을 쓰고 있었을 때.
믿음은 상실된다
이 모든 것은 결국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딜레마에 빠지면서 슬퍼진다.
믿음은 나에게 중요하다. 나는 누군가에게 지속적으로 사랑을 주고 싶고, 나의 모든 것을 공유하고 싶다. 내가 누군가와 하나가 되기 위해서는 의심이 동반되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다. 불신으로 인한 괴로움도 나의 몫이지 않는가.
그리고, 슬프지만 믿음이 깨져버렸을 때 돌아오는 상처 또한 내 몫이 된다.
이러한 고민을 이야기했을 때, 어떤 이가 내게 이런 말을 건넸다.
회복력 빠르잖아, 잊어버려
상처와 마주하고 있는 그 시간이 너무 괴로워 홀로 슬퍼하고 있는데 '회복'이라는 말을 들으니 순간, 복잡하게 꼬여버렸다고 생각했던 상황이 굉장히 단순해지는 느낌을 받았다. 그래, 해결할 수는 없어도 회복할 수는 있겠지. 최소한 내게 남겨진 상처라는 몫을 스스로 치유할 수는 있겠지, 그리고 언젠가 이 모든 것은 잊게 되고 지나가버리겠지.
믿었던 만큼 실망이 컸던 이유는 어쩌면 내 안에는 누군가에게 작은 행복을 전해줄 수 있는, 애정이라는 순수한 힘이 자리 잡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라며.
그 믿음은 다시 돌고 돌아와 나에게 좋은 기운을 줄 것이라는 예감을 안으며
오늘도 힘겹게 상처와 마주한다.
글/그림 여미
yeoulhan@nate.com
커버사진 임경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