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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예란 Dec 27. 2019

오로지 나,
온전히 나를 위한 소비가 필요해

‘소확행’, ‘욜로’ 그 이상의 의미를 가지는 행위들.

그런 적이 있었다. 당장 처리해야할 일과 막연한 미래에 대한 불안으로 마음의 여유가 0으로 수렴했던 적이.

당시 난 밥 먹는 시간조차 아까워 인스턴트식품이나 과자부스러기로 끼니를 때우기 일쑤였는데. 한날은 집에서 마요네즈에 대충 버무린 참치와 밥으로 꾸역꾸역 점심을 메우고 있었다. 퍽퍽한 밥알 사이로 그보다 더 퍽퍽한 통조림 참치를 입안에서 뭉그러뜨리며 삼키기를 두어 번. 잠시 숟가락을 내려놓고 내 앞의 식사를 바라보았다. 며칠 전에 지어 찰기와 수분이 사라진 밥, 냉장고 속 유일한 밑반찬이었던 먹다 남은 참치마요.

이런 생각이 속절없이 들었다.        


‘아 황폐하다.’     


황폐한 느낌의 근원은 나조차도 나를 막대하고 있다는 자각에 있었다. 내가 나를 내팽개치고 있었구나, 존중하지 않고 있구나.

‘바빠서’, ‘여유가 없어서’라는 말 속에 파묻혀 한 번도 인식하지 못했던 사실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나는 그때 처음으로 잘 차려먹는 한 끼의 중요성을 어렴풋이 알 것도 같았다. 잘 차려진 음식이 아니라, ‘잘 차려먹는’ 한 끼 말이다.         



실용성도 그닥, 가성비도 별로. 그렇다고 누군가를 기쁘게 한다거나 생산적인 가치를 창출하는 것도 아닌 소비가 필요할까? 마찬가지로 서툰 솜씨일지라도 자신의 한 끼를 위해 시간과 에너지를 들여 요리를 만들고 예쁜 그릇에 담아먹는 과정이 필요할까? 쉽고 빠르며 맛까지 보장된 편의점 음식을 놔두고서.(심지어 사 먹는 게 더 맛이 좋은데도)

    

누군가 지금 내게 그리 묻는다면 내 대답은,  yes.  


오로지 자신만을 위한 소비, 자신을 위한 과정이 담긴 행위를 한다는 것은 곧 스스로를 대접해준다는 의미임을 이제는 앎으로.


내가 나를 대접해주는 것. 나의 욕구와 만족에 귀 기울이는 것, 내가 나를 존중해 주는 순간들.

그런 순간들이야말로 삶이 황폐해지지 않도록 막아주는 방파제 아닐까. 어느 순간 내가 나의 삶을 사는 게 아닌, 삶이 나를 살아내지 않도록. 목표를 쫒는 것이 아니라 목표에 쫒기는 상태가 되지 않도록. 하루하루에 잠식당하는 일상이 되지 않도록 막아주는 방파제가.

동시에 ‘내가 나를 위해 살고 있음’을 알려주는 이정표가 되리라.     



또한 그런 순간들이 쌓여 결국엔 자신을 귀히 여기는 마음, 자아존중감이 높아지게 될 것이라고 믿는다.

전에 친언니로부터 이런 일화를 들은 적이 있다. 예전에 자기 통장에 딱 3만원 밖에 없었는데, 캐릭터 한정판으로 나온 씨리얼통이 무척 가지고 싶었다는 얘기. 당시 3만원으로 2주 이상을 버텨야 하는 상황이었고, 그 통은 씨리얼용기 주제에 무려 만원이나 했었다고. 그런데 그걸 안 사면 엄청 후회할 것 같고 계속 눈앞에 아른 거릴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고. 그래서 그냥 샀다고. 이후로 더 거지같이 살아야했지만, 지금까지 그 선택에 대해 한 번도 후회한 적이 없다고. 그냥 보기만 해도 기분이 좋고, 심지어는 자신이 그때 그런 선택을 했다는 것에 대해 뿌듯함까지 느낀다고.

     

이야기를 들었을 당시에는, ‘전 재산의 3분의 1을 ‘예쁜 쓰레기’에 꼴아 박았는데 왜 뿌듯함이 느껴졌을까. 그 뿌듯함은 어디에서 비롯된 걸까.’ 라는 의문이 들었다. ‘부럽다. 말라니는(내가 언니를 부르는 애칭) 분명 나보다 훨씬 행복한 인생을 살 거야. 죽는 순간에 덜 후회하고, 삶에 대해 더 긍정하며.’ 라는 생각과 함께.      


지금 돌이켜보면 언니가 느꼈던 그 뿌듯함은, 재정적으로 어려운 여건임에도 불구하고 스스로를 위해 기꺼이 소비할 줄 아는, 그런 상황에서도 기꺼이 자신을 대접할 줄 아는 스스로에 대한 기특함에서 비롯된 게 아니었을까. 그리고 그런 선택을 할 수 있는 말란은, 여유가 없어지면 자신부터 내팽개쳐버리는, 그래서 아무거나 입고 아무거나 먹고 항상 차선을 선택해 버리고 마는 나보다 훨씬 풍요로운 인생을 살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직감이 순간 들었던 것 같다.



전 재산의 삼분의 일을 투자해 예쁜 씨리얼통을 사는 것, 일 년에 몇 번밖에 쓸 기회가 없는 마스킹테이프를 모으는 것, GS25에 파는 정갈한 1인분 닭볶음탕 소비하는 대신, 마트에서 사온 재료로 떠듬떠듬 닭볶음탕 비슷한 걸 만들어 내는 것. 합리적인 선택과는 거리가 멀어 보이지만 ‘합리적’인 게  꼭 ‘유익함’을 의미하지는 않는다는 걸 알게 된 지금, 나는 이런 것들을 시도해 보지 않을 수가 없다. 그러니까 온전히 나를 위한 행위, 나를 담아내는 과정들을 열심을 내어 쌓아가 보겠다는 소리다. 이번에는 외면치 않을 테다. 이렇게 자존감이 낮은 나도 언젠가는 스스로를 귀히 여기는 사람이 될 수 있기를 바라니까. 내 삶이 조금 더 풍요로워 질 수 있기를 스스로 가장 응원하고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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