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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예란 Aug 31. 2020

모든 아이는  부모의 이기심으로 태어난다

당신의 고민 속에 한번이라도 ‘아이’가 있었나요.


오래전부터 마음에 담고 있었지만, 누군가에겐 이 글이, 저의 이런 사고가 상처가 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쉽사리 이야기를 꺼내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언젠가는 한번쯤 이런 말을 하고 싶었습니다.      




언젠가 친구 J가 그런 말을 한 적이 있다. ‘모든 아이는 부모의 이기심으로 태어난다.’는 말에 대해 어떻게 생각 하느냐고. 질문을 조금 더 늘어뜨려 달라는 눈빛을 보내자 J가 입을 뗐다. 예전에 가수 자우림이 온라인 커뮤니티에 쓴 글을 본 적이 있다고. ‘스스로 원해서 세상에 태어나는 아기는 없다. 그러므로 부모의 결정이 아니었더라면 이 지독하고 지난한 세상에 한 생명체가 내던져지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아이가 태어나는 것은 순전히 부모의 자기만족 때문이며, 그렇기에 부모는 가능한 한 최대의 행복을 아이에게 선사해야 한다.’는 요지의 글을.

     

J야, 너는 그 말에 동의해?
··· 응. 나는··· 그렇게 생각해.
응, 나도. 나도 그래.     


J와 나는 ‘산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아는 나이가 되었다. 세상은 어렸을 적 봤던 만화영화처럼 언제나 새롭고 가슴 벅찬 일로 가득 차있지 않다는 걸 안다. 삶을 채우고 있는 대부분의 시간은 밋밋하고 별 볼일 없으며 열기인지 냉기인지 모를 미적지근한 온도로 흘러가며 언제나 이도저도 아닌 주저함이 진득하게 들러붙어있다는 것을 안다.     

 

J와 나는···· 그 감각을 안다.

매일 아침 오늘도 죽지 않고 눈을 뜬 스스로를 저주하는 감각을.  더 이상 아무것도 보고 듣고 싶지 않아서, 모든 게 끝나버렸으면 해서, 도저히 버틸 수가 견딜 수가 없어 울며 거리로 뛰쳐나와선··· 건널목 앞에서 필연적으로 멈춰 서던 발걸음을··· 좌우로 곁눈질을 하며 도로를 살피는··· 그 모순의 감각을. ‘소름끼치는’ 생존본능으로 인해 죽지도 그렇다고 살아있다고 말할 수도 없는 그 상태의 감각을···· 우리는 안다.




사람들이 아이를 낳는 이유는 뭘까. 더 안정되고 완전한(사실은 그렇다고 믿는)형태의 가정을 이루기 위해서, 상황과 관계의 개선 또는 유지를 위해, 현재의 공기를 전환할 수 있는 터닝 포인트가 필요해서, “아이가 생기면 다른 세계가 펼쳐진다.”의 그 ‘다른 세계’를 경험해보고 싶어서, 보다 높은 차원의 사랑을 베푸는, 한층 더 성숙해진 자신과 마주하고 싶어서, 아이 없이 늙어가는 삶이 자신이 없어서. 또는·····  당연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나이가 들어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는 것은 세상의 진리이며 의심할 여지없이 자연스러운 일이므로. 누구나 다 있으니까···· 그러니까 당연하다.     


당연하다······. 인간에게 ‘태어났으면 배가 고프고 일정량의 수면을 취해야 하며, 음식을 섭취하면 배설하고 싶어지는’것 외에 당연한 게 있을까. 결혼을 해야 한다 아이를 낳아야한다 낳는다면 몇 명을, 되도록이면 어떤 성별을. 그런 사회적 관습이나 시대의 이념에 따라 얼마든지 허물어지고 변형될 수 있는 가치들에 ‘본능’이라거나 ‘당연’ ‘자연스러운’ 같은 단어를 붙일 수가 있는 걸까. 아니, 애초에 이다지도 복잡하고 미묘하여 도저히 알 수가 없는, 뭐라고 정의해야 할지 갈피를 잡을 수 없는 그런 무수한 타인과 개인으로 구성된 이 인간세계에서 당연하다고 할 수 있는 일이라는 게 있을까. 그런 게 존재하기는 할까···· 어떻게 그런 게······   그만하자.


저마다의 이유야 어쨌든 모두 현재보다 더 나은 형태의 미래, 인간으로서 더 성숙한 지점에 도달한 자신의 모습을 그리며 출산을 결심하는 거겠지. 그러니 아이를 위해, 아이에게 이 아름다운 세상을 보여주고 싶어서, 자신이 느꼈던 행복과 사랑 같은 감정을 알려주고 싶어 배길 수가 없어서, 그런 연유로 아이를 낳는 사람은 없는 거야. 어쩌면 ‘아직 존재하지도 않는’ 아이의 입장이라는 것을 부모들의 고민 속에 포함시킬 수도 있다는 걸, 그럴 수도 있다는 사실을 인지조차 하지 못하는······ 그만하자.    




유난히 더웠던 지난 여름, 33도를 웃도는 폭염 속에 온갖 짐이 들은 돌덩이 같은 가방을 업고 40분가량을 내리 걸어야 했던 적이 있다. 두피를 뚫어버릴 기세로 내리 꽂히는 볕에 이마에선 땀이 비 오듯 쏟아졌고 마스크 안의 찐득한 공기는 온 땀구멍과 숨구멍에 들러붙었다. 까만색의 긴 슬랙스는 넓적다리와 엉덩이에 엉망으로 엉겨붙었으며 발바닥 표면에서 시작된 욱신거림은 발목까지 퍼져나갔다.      


그중에서도 가장 견딜 수 없었던 것은 등에 멍에처럼 지워진 나의 가방이었다. 뒤에서 끊임없이 고인 열기를 만들어내며 당장에라도 어깨와 쇠골을 짓무를 것처럼 나를 압박하던 그 끔찍한 무게···. 조금만 더 힘을 내보자. 곧 목적지가 나올 거야. 저 표지판까지만 가면 저 모퉁이만 돌면··· 마음속으로 되뇌고 되뇌어도 이 지옥 같은 길은 끝이 보이지 않았고 그 사이에 가방은 아래로, 하염없이 아래로 나를 바닥으로 끌어당기는 것만 같았다. 학창시절, 나는 길을 나설 때마다 등에 짊어져야 했던 저 가방을 ‘가난’이라고 생각했다. 10살 무렵부터 시작되어 점점 무게를 불리며 매해 매일 매순간 내 양 어깨를 내리누르던 그것.


나는 그날 폭염 속의 도로 위에서 그것이 가난이 아닌 삶의 무게라고, 생각을 바꾸었다.



삶의 무게. 태어났을 때부터 모든 이에게 필연적으로 부괴되는 것. ‘인간관계’와 ‘먹고 사는 것’을 주축으로 형성되는 굴레. 모든 아이는 자아가 형성될 무렵 ‘자기 앞의 생’을 등에 업고 레이스를 시작한다. 그리고 죽을 때까지 이 굴레에서 벗어날 수 없다. 사람으로 태어난 이상 여기에 예외는 없을 것이다.

      

그런데 삶을 받아들이는 태도와 중압감을 느끼는 정도는 저마다 다 다르다. 같은 날 같은 시간 같은 무게의 가방을 들고 같은 길을 가더라도 씩씩하고 당차게 걸어가는 이가 있는가하면, 겨우 한걸음 발을 뗄 수 있는 아이도 있다. 선천적으로 더위에 강한 아이가 있는가하면 햇볕알레르기로 인해 매순간 피부가 달궈지고 짓무르는 고통을 견뎌야 하는 아이도 있는 것이다. 그리고 누군가는···· 타의든 자의든 사고든 주어진 레이스를 채 완주하지 못한 채 그저 그렇게···· 길 위에서 사그라지기도 한다.      


어떤 아이가 태어날지는 모른다는 소리다. 당신과 똑 닮은 아이가 날수도 180도 다른 아이가 날수도 있으며 당신이 이제껏 무사히 레이스를 통과했다고 해서 내 아이도 그럴 수 있으리라는 보장은 어디에도, 없다.  





아이를 가지려거나 이미 누군가의 부모가 된 사람들을 비난하고자, 또는 아이를 낳는 일 자체에 회의감을 표하기 위해 이 글을 쓴 건 절대 아니다.


다만, 살면서 누구나 한번쯤은 깊이, 정말 깊이 고민해봤으면 좋겠다.

왜 아이를 가지고 싶은 건지, 그렇다면 나는 인성적, 환경적으로 부모가 될 최소한의 준비와 여건이 되어있는지, 한 생명을 이 질고의 바다 속에 태어나게 한다는 것이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태어나게 될 아이의 행복과 안전을 책임진다는 것의 무게를 아는지, 나와는 전혀 다른 생각과 감성, 시각을 가진 아이가 태어난다면 나는 그 아이를 얼마큼 품어줄 수 있는지. 그럴 수 없음에도, 나는 계속해서 이해의 방향으로 나아가려고 노력할 수 있는 사람인지.




https://brunch.co.kr/@moree/74


가수 자우림이 온라인 커뮤니티에 기재한 글의 전문


위 콘텐츠들은 얼마 전 다시 찾아본 자우림의 글과 최근 인상 깊게 읽은 브런치의 글이다. 자우림은 이미 한 아이의 부모가 되었고 브런치 작가님은 현재 부모가 되기를 간절히 소망하고 계신다. 상황과 입장은 다르지만 두 분 모두 부모가 되려는 이유 중 ‘아이’가 포함될 수 없다는 걸 인지하고 있다. 허나, 이들이 부모가 되기로 결심하는 과정에서 얼마나 자신 자신과 아이에 대해, 임신과 출산과 육아의 각 과정에 대해 고민의 시간들을 보냈는지 느낄 수 있다. 그리고 그 고심의 흔적 끝에서 나는 이런 각오를 발견했다. ‘그럼에도, 나는 이 아이를 사랑해마지 않을 것이며 죽을 때까지 응원할’ 거라는 각오를.


그러니 내가 이쯤에서 묻고 싶은 건 이런 것일 테다.

훗날 당신의 자녀가 어느 날 길을 걷다 너무도 힘에 겨워서, 더위에 피부는 짓무르고 발에는 물집이 잡혀 지쳐 울며 당신에게 ‘왜 이 고해 속에 나를 내놓았느냐’ 묻는다면 당신은 뭐라고 답해줄 수 있을는지, 어떤 말을 해줄 수 있는 한 아이의 부모이자 한 명의 개인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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