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고등학생 시절, 길을 걷다 반대편에서 또래 남자 아이들 무리를 발견할 때면 나는 얼른 발걸음을 돌려 다른 길을 찾았다. 이상하게 그들을 지나치는 순간 얼마간의 어색함과 찝찝함이 등허리에서부터 올라왔다. 그 때는 그것이 단지 사춘기 소녀의 부끄러움에서 비롯된 무언가일 거라고 생각했으나, 세월이 흘러 어른이 된 후에 깨달았다. 내가 느꼈던 그 기분 나쁜 불편함은 나의 얼굴과 몸에 내리 꽂히는 그들의 시선 때문이었다는 것을.
그 시절, 남학생들이 여학생의 외모에 대해 함부로 평가, 아니 품평하는 모습을 두 눈과 귀로 종종 보고 들었다. 학교 담벼락에서 3~4명의 남학생들이 모여 벽 너머로 보이는 여자들을 한명한명 지목하며 저 여자는 몸매는 괜찮은데 얼굴은 별로네, 이 여자는 코가 이상하네, 가슴이 작아서 탈락, 이라며 저들끼리 낄낄 대는 모습을 우연히 목격한 것부터, 남자들이 같은 반 여학생들의 얼굴과 몸에 순위를 매겨 1급수부터 5급수까지 분류한 쪽지가 반 전체에 퍼져 학교가 왈칵 뒤집혔다는 친구의 이야기까지. 그리고 마침내 “저것도 얼굴이라고 들고 다니냐.”
학원에서 같은 반이었던 남자 아이들은 지나가는 다른 반 여학생의 얼굴을 보며 분명 저렇게 말했다. 나는 그날 이후 학원을 곧장 그만두었다. 다른 반 여자애까지 품평하는 마당에 내 얼굴과 몸에 대해선 오죽했을까. 내가 없는 곳에서 저들끼리 낄낄대며 나에 대해 짓씹는 것을 상상하는 것만으로 수치심과 분노가 몰려왔다.
나는 그렇게 얼평과 몸평이 상대방에게 안겨주는 혐오스러운 감각과 기분 더러운 눅눅함을 체화하며 자랐다. 하지만 어른이 된 뒤에도 상황은 나아지지 않았다. 이전과 같은 직접적인 품평은 줄었지만, 교묘하게 상대방을 압박하는 형태로 변형돼 다시 숨을 죄어왔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너 ~하면 예쁘겠다.”
“너 살 빼면 예쁘겠다.” “너 화장하면 예쁘겠다.” “너 안경 빼면 예쁘겠다.”살면서 한번쯤은 이런 말을 들어봤을 것이다. 나의 경우엔 쌍꺼풀이었다. 어딜 가나 반으로 나뉘었다. 쌍꺼풀 수술을 해라는 쪽과 하지 말라는 쪽으로. 처음 가는 미용실의 아줌마도, 같이 사는 하숙집 친구들도, 심지어 엄마와 친척들까지도 내 눈을 화두에 올렸다. 나는 이전까지 한 번도 내 눈에 불만을 품은 적이 없었으나(쌍꺼풀이 없지만 작은 눈이 아니었고, 나름 올망졸망 귀여웠다.), 반복적으로 수술 제안을 들으니 무의식 속에서 의구심이 자라났다.
‘그럼 지금 내 눈은 별로라는 말인가···?’ ‘정말 하면 더 예뻐질 수 있을까?’ 그런 의구심은 평소에는 잠잠히 움을 트고 있다, 자존감이 바닥으로 내팽겨 쳐지는 순간 번뜩 수면위로 솟구쳤다. ‘쌍꺼풀이 없는 너는 못생겼어’ ‘안 그래도 평범한 얼굴인데 눈이라도 커야 될 거 아니야’ 하고.
결국 나는 내 인생에서 자존감이 가장 바닥이었던 시절 쌍꺼풀 수술을 결심했다. 사람들의 말처럼 수술을 하면 더 예뻐질 수 있다고 믿으며, 그렇다면 스스로의 모습을 긍정할 수 있을 거라고 믿으며. 하지만 결과는 역시. 내면에 문제가 있는데 애꿎은 외면을 바꿨으니 상황은 제자리걸음일 수밖에. 쌍꺼풀 수술을 한 후에도 여전히 자존감은 바닥이었고, 나는 계속 깊고 깊은 수면 아래에서 둥그렇게 몸을 웅크리고 있었다.
그리고 세월이 흘러 깨달았다. 언뜻 상대방을 위한 것처럼 보이는 외모에 대한 ‘조언’들은, 사실은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긍정하기 힘들게 만드는 장치였다는 것을. 어떻게 하면 예쁠 것 같다는 말은, 다르게 말하면 현재의 너의 모습은 결점이 있으며 그렇기에 썩 좋아 보이지 않는다는 뜻이니까. 그리고 그런 말들이 누적되어 자신의 현재 모습에 의문을 품게 되고, 그 의문은 곧 불만이 되며, 쌓인 불만들은 다시 억압이 되어 스스로의 숨통을 조이게 된다고.
그리고 또 한 가지. 외모에 대한 칭찬도 경계할 필요가 있다. 외모에 대한 칭찬이 커질수록 그에 대한 집착도 커져갈 수 있으니까. 나의 경우엔 피부가 그랬다. 나는 23살 이전까지 피부가 정말 좋았다. 얼마나 좋았느냐면, 사람들이 무언가를 말하다 문뜩 말을 멈추고 “야, 근데 너 피부 진짜 좋다”라고 할 정도였다. 하루에 몇 번씩 도대체 어느 피부과에 다니길래 그렇게 피부에서 윤이 나냐는 소리를 들었다.
나는 그럴수록 피부에 집착하게 되었다. 피부는 내가 가진 유일무이한 무기이자 장점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뾰루지 하나만 생겨도 엄청난 스트레스를 받았으며 얼굴에 손이나 물건이 닿는 것을 극도로 싫어했다. 강박적으로 손을 씻었으며 피부가 나빠질까 집이 아닌 다른 곳에서 숙박하는 것을 꺼려했다. 그리하여 건강에 문제가 생겨 피부에 여러 개의 수포가 지속적으로 났던 시절, 나는 우울증과 대인기피증에 걸려 스스로를 깊은 구덩이 속으로 밀어 넣었다,
얼평과 몸평이 난무하는 사회. 머리스타일부터 패션까지 어느 곳 하나 남 눈치를 안 보는 데가 없는 사회. 이와는 정반대의 지점에 있는 서 있는 또 다른 사회가 있다. 바로 독일이다. 독일에서는 외모에 대한 지적은 물론 칭찬까지도 입 밖으로 꺼내는 것을 경계한다고 한다. “너 오늘 화장 잘 됐다.” “요즘 살이 빠진 것 같아” 우리나라에서 일상적으로 들을 수 있는 말이, 독일에서는 비 일상의 범주에 속한다고 한다. 아주 친한 관계가 아닌 이상 타인의 외모에 대한 언급은 섣부르고 무례한 판단이라는 생각에서다.
나는 우리사회가 이와 닮아가길 희망한다. 외모에 대한 지적이 무례한 행동으로 점점 인식이 바뀌어 온 것처럼, 외모와 관련된 칭찬이나 어떤 코멘트까지도 우리의 일상적인 대화에서 사라지기를. 서울 강남역과 부산 서면역에 도배된 성형외과 광고가 전부 사라지기를.
그리하여 사람들이, 특히 여성들이 자신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긍정할 수 있는 시대가 오기를. 자신의 둥그스름한 또는 각진 얼굴형을, 통통한 하체를, 올망졸망 작은 눈을 자신의 고유한 개성으로 인식하고 소중하게 대할 수 있기를, 그럴 수 있기를 간절히 희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