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담당자임에도 억울했다. 아니, 내가 담당자여서 억울했다. 내가 왜 이걸 책임져야 해, 난 아무것도 몰랐는데!
사건을 간략히 말해보자면 이렇다. 2월 중순쯤이었나. 입사하고 한 달 정도 지난 후에 학과 특성화 사업 프로그램 계획서를 제출하라고 하길래, 제출했다. 담당자는 아무 문제없이 승인처리를 해주었고, 그렇게 프로그램은 여름방학동안 무사히 진행됐다.
그런데 강사비를 지급하는 과정에서 문제가 터졌다. 예산 담당 선생님이 나를 불러 용역 계약을 했냐고 물어봤다. 뭐? 용역계약? 그걸 왜 해야 하는데? 싶었다. 하지 않았다고 대답하자 선생님은 기가 차다는 듯 계약을 안 하면 어떻게 강사비를 지급할 수 있겠느냐고 나를 다그쳤다.
당황스러웠다. 아무도 내게 용역계약을 해야 한다고 말해주지 않았다. 계획서를 승인처리 하신 선생님도 아무 말씀 없이 서류를 통과시켜줬고, 그렇기에 나도 아무 문제가 없는 줄 알았다. 그런데 이제 와서 용역계약을 안했다고 나한테 따지다니, 억울했다! 입사한지 한 달도 안 된 사람이 혼자서 계약이니 용역이니 내부결재니 그런 걸 어떻게 안단 말인가!
어쨌든 돈은 지급해야하니, 예산 담당자와 나는 강사비 430만원을 두고 머리가 터지도록 고민했다. 필요한 서류가 10개가 넘었고 견적서에 교육일정과 교육소모품 단가를 계산하여 세세히 기재했다. 타견적서도 2부나 필요했다. 그 와중에 예산 담당자도 짜증이 났는지 나한테 한껏 소리를 질렀고 나도 억울해 떠듬떠듬 할 말을 했다. 우리는 그렇게 3일 동안 절박한 심정으로 방법을 간구했다. 정말 머리가 다 빠지는 줄 알았다, 스트레스 받아서.
어찌저찌하여 우리는 지난 주 금요일에 방법을 찾아 일을 대략적으로 정리할 수 있었다. 드디어 한시름 놓게 된 것이다. 그날 오전 아홉시부터 퇴근할 때까지 그 문제만 잡고 있었더니 머리가 깨질 듯 지끈거렸다. 아픈 머리를 부여잡고 퇴근하는 길에 마침 엄마에게 전화가 왔다. 상황을 대략적으로 설명했더니 엄마는 수고했다며, 집 가는 길에 네가 좋아하는 음식 하나 사서 저녁을 챙겨 먹으라고 했다. 그리고 한 마디 덧붙였다.
퇴근하면 회사일은 잊어, 원래 회사생활은 그렇게 하는 거야.
하하, 회사생활을 한 번도 제대로 해본 적 없는 엄마가 그런 말을 하다니. 조금 아이러니하다고 생각했지만 과연 맞는 말이었다. 퇴근하면 회사 일은 더 이상 생각하지 말아야 한다. 그래야 건강한 정신과 육체를 보존하며 살 수 있다. 그래서 나는 가는 길에 정말 충동적으로 좋아하는 카페에 들러 커피와 케이크를 시켰다. 원래는 곧장 집으로 가 냉장고에 남은 음식으로 대충 끼니를 때울 생각이었다.
시원한 에어컨 아래 따뜻한 아메리카노와 부드러운 당근 케익을 먹고 있자니, 나를 끈질기게 괴롭히던 두통이 슬슬 물러나는 것이 느껴졌다. 고소한 커피와 달콤한 케익을 먹으며 책을 음미하듯 천천히 읽었다. 그리고 생각했다. 어쩌면 우리는 무언가를 잊기 위해 운동을 하고 음식을 먹고 게임을 하고 책을 읽고 SNS를 하는 것이라고. 언젠가 봤던 책에서 이런 내용을 읽은 적 있다. 몸이 아픈 어린 아들을 둔 엄마가 아이에 대한 걱정과 근심, 나쁜 상상들을 멈추기 위해 온갖 종류의 책을 닥치는 대로 읽었다는 이야기를.
정말로 그럴지도 몰랐다. 퇴근하면 회사일은 잊어야 하고, 회사생활은 원래 그렇게 하는 것이며, 우리는 깨어있는 동안 수시로 우리를 방문하는 걱정과 불안, 초조함과 골치 아픈 일들을 잊기 위해 끊임없이 무언가를 하고, 그것에 집중하는 것일지도. 내가 회사 일을 잊기 위해 그날 카페에 들어갔듯이. 비단 심심하거나 생존을 위해서가 아니라, 잊기 위해서 우리는 해야 할 일 이외의 것에 그렇게 몰두하는지도 모르겠다고.
그러니 나는 건강한 정신을 유지하기 위해, 덜 불행해지기 위해, 오늘도 잊기 위해 퇴근 후에 바지런히 책을 읽고 운동을 할 것이다. 친구에게 전화를 걸어 수다를 떨고 맛있는 음식을 천천히 음미하여 먹을 것이다. 쓸데없이 SNS를 뒤적이고 카톡으로 시답잖은 농담을 주고받으며 낄낄거릴 것이다. 퇴근하면 회사일은 잊어야 하는 법이니까. 원래 회사 생활은 그렇게 하는 것이니까. 어느 집 여사님의 말씀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