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 대기업에서 마케팅 인턴을 뽑는다는 공고를 보았느냐, 친구에게서 카톡이 왔다. 누구나 이름만 들어도 알만한 기업이었기에 인턴이라도 경쟁력이 어마무시 하겠지. 예상은 했으나 아니나 다를까. 공고를 확인해 보니 사전미션이 있었다. 자사가 보유하고 있는 sns채널을 본인이 운영한다면 어떻게 운영하고 싶은지 예시콘텐츠와 함께 제안할 것. 그리고 새로운 유저를 유입시킬 수 있는 마케팅 프로모션을 기획할 것.
서류마감일까지 남은 기한은 8일. 자기소개서와 2개의 기획안, 예시콘텐츠까지 만들려면 남아있는 8일의 밤낮을 꼬박 투자해야 할 터다. 뽑는 인원은···· 1명.
와···· 정말 장난이 아니구나, 그만 힘이 쭉 빠져 친구에게 아연한 심정을 토로하다 문득 속에서 울분이 차올랐다. 아니, 정직원도 아니고 고작 몇 개월짜리 인턴 뽑는 데 너무한 거 아니야? 그렇다고 채용연계형 인턴도 아니잖아!
마음속에 맺힌 말들을 가감 없이 토해내고 있자 친구로부터 답이 왔다.
“요즘엔 다 그렇잖아··· 갈수록 더 심해져····.”
반짝. 주위가 환기됐다. 맞다, 그랬지 참. 서포터즈만 하더라도 전략과 기획을 적어 내라 요구하는 기업이 태반이고, 인턴은 ‘금’턴이라 불리며, 정규직이 되기 위해선 총 5000자에 달하는 자시소개서와 지난한 필기시험, 3차례 이상의 면접을 통과해야하는···· 그런 시대구나 참.
며칠 전 길에서 우연히 마주친 이모부로부터 “야 너 아직도 그냥 그렇게 지내냐?”라는 말을 들었다.
작년 상반기 전체를 자기소개서와 면접으로 날려먹고, 하반기에 계약직으로 몇 개월 겨우 일하다 이제는 다시 취업준비생이 되었노라, 말을 해야 할까. 아니면 그저 ‘네’ 라고 답해야 할까. 고민하고 있던 찰나 이모부는 떨떠름한 표정을 지으며 “너 이제 진짜 큰일 났다......” 라며 말꼬리를 늘렸다. 그는 바쁜 일이 있는 듯 몸을 돌려 유유히 자기 길을 갔지만 나는 그 자리에 못 박힌 것처럼 한참을 서있었다. 너무 기분이 나빠 아무 생각을 할 수가 없었다.
그날 밤 침대에 누워 내가 가장 좋아하는 인물, 유시민 작가님의 저서 중 한 구절을 떠올렸다.
“내 책임이든 사회의 책임이든, 닥쳐온 고통은 일단 내가 견디고 이겨내야 한다. 세상을 원망해본들 달라질 것은 없다. 누구도 그 짐을 대신 져주지 않는다. 이 시련을 견뎌야 하는 것은 ‘세대’가 아니다, 청년들 각자 이겨내야 한다.”
그래. 그러니까 징징대지 말자. 나뿐만 아니라 모두가 이 처절한 경쟁시대에 발 딛고 있는 걸. 탈락과 거부의 경험을 삼켜내고, 기어이 다시 노트북 위에 손가락을 올려놓고들 있는걸.
그렇게 생각을 마치고 돌아눕는 순간······ 아니야···· 그렇다고 이게 정상적인 건 아니잖아. 100명 중 한명 꼴로 공무원시험에 합격하고, ‘취준생’, ‘취업준비기간’ 이라는 단어가 따로 생겨나 어느새 하나의 고유명사로서 아무렇지도 않게 사람들 사이에서 통용되는 그런 세상이, 매일 밤 침대에 누우면 좌절감과 무력감에 눈물이 주륵주륵 흘러나오는 이 현상이···· 정상적이고 당연한 게 아니잖아. IMF세대, 88만원 세대를 비롯한 각 세대의 청년들이 겪었던 애환과 부당함이 ‘어쩔 수 없다’라는 말로 정당화 될 수 없는 것처럼. 그러니까 내 말은····이런 시대에 태어났다고 해서 모두가 이 미친 경쟁에 적응하고 시대의 고난을 돌파해낼 수 있는 것이 아니며···· 그러므로 이 애환을 징징거린다, 투정부린다는 식으로 치부해 버릴 순 없는 거잖아···· 누구도 그래선 안 되는 거잖아. 이모부 당신이 내게 그런 식으로 말 할 순 없는 거잖아.
모 기업에서 인턴으로 일하고 있는 친구가 상사와 밥을 먹다 나눈 대화를 들려주었다. 전 인턴에 대한 이야기였는데, 그 분은 당사의 정규직 시험을 2차례 준비하다 떨어진 후 외국으로 워킹홀리데이를 떠났다고 한다. 상사는 그 인턴에 대해 간절함이 없다고 했다. 시험, 그거 조금 더 준비해서 또 도전했어야지, 왜 그만두었느냐는 식으로. 그 말을 들은 친구는 “에이~ 그분은 워킹홀리데이가 오랜 버킷리스트였대요. 나중엔 더 못 갈 거 같아 지금 가기로 결심했대요.” 라고 답했다. 이에 상사는 그것도 문제라고, 지금이 워킹홀리데이나 갈 때냐, 라며 맞받아쳤다. 그리고 결국엔 모든 게 간절함의 문제라고, 간절하지 않아 그런 것이라고.
그 놈의 간절함. 도대체 왜 모든 순간 아등바등 기를 쓰며 살아야하는지. 그냥 이리저리 살다가 내가 간절하고 싶은 순간에만 간절해질 수는 없는 건지. 그저 회사에 들어가 일을 하고, 풍족하진 않지만 내 몫의 노동의 대가를 받는····그런 ‘평범한’ 일상을 얻는데 왜 이토록 간절해야만 하는 것인지.
직장을 얻고 차근차근 경력을 쌓아 진급을 하고, 그러다 결혼을 한 후에 모아놓은 자금으로 언젠가 내 집을 마련하고, 서로 늙어가며 노후를 대비하는 것이 소위 말하는 ‘평범한 삶’이라면. 이 평범한 것들을 얻기 위해서 이토록 간절하고 열심이어야 한다면, 그렇다면 이제는 그 ‘평범함’의 기준이 바뀌어야 하지 않나.
직장대신 아르바이트, 정규직 말고 계약직, 결혼 아닌 평생 애인, 쥐꼬리월급 아등바등 모으는 대신 좋아하는 거 먹고 좋아하는 곳 가고, 소중한 사람들과 먹고 마시고. 이런 것들이 평범함으로 대체되어야 하지 않나. 그래서 저런 삶을 택한 사람들도 ‘열심을 내어 자기 몫의 삶을 살아왔구나.’ ‘이제껏 스스로를 착실히 데리고 살았구나.’ 그렇게 인정해줘야 하지 않나. 그렇다면 적어도 지금처럼 경쟁에서 낙오된 실패자로 낙인 찍히지는 않겠지. 의지박약의 나약한 사람으로 치부되진 않겠지. 애잔하고 안타까운 시선을 받는 것도.
모르겠다. 트랜드와 사회는 하루가 다르게 바뀌고, 픽미세대, N포세대. 시대를 규정하는 허울 좋은 단어는 이리도 휙휙 변하면서 왜 평범함의 기준은 아직도 그 자리 그곳 일까. 왜 그 범주는 이리도 견고해서 사람을 이다지도 유약하게 만드나. 위축되게 만드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