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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예란 Sep 13. 2021

그 일 하라고 너한테 월급 주는 거야


  직장 생활을 하다보면 일이 너무 많고 힘들어 화가 날 때가 많다. 상사에게 굽신, 계약업체에 굽신, 중간에 끼여 내 잘못이 아님에도 사과하는 일이 더러 있다. 전 직장에서도 그랬다. 나는 상사와 디자인업체 사이에 껴서 이도저도 못한 채 연신 죄송하다는 말만 반복했다. 그러다가 어느 날은 왈칵 짜증이 나서 언니에게 하소연을 했다.


  “아! 도대체, 우리 상사말이야! 처음부터 제대로 보고 확인했으면 됐잖아, 왜 디자인 다 해놨더니 이것저것 트집을 잡고 자꾸 수정사항을 만드는 거야? 그럼 중간에서 그걸 전달하는 나는 뭐가돼? 디자인 업체한테 죄송하다고 말하는 것도 이제 지쳤어! 다 짜증난다고!”

그러자 언니가 말했다. 

“야, 그 일 시키려고 너 고용한 거야. 지네들이 굽신 거리기 싫으니까 그 역할 너보고 하라고 매달 따박따박 월급 주는 거라고.”

“...”


순간 언니의 발언에 말문이 막혔다. 억울했지만 완벽히 맞는 말이었다. 그들은 나에게 이 엿 같은 업무를 시키려고 나를 고용했고, 나는 이 엿 같은 일을 처리함으로써 노동에 대한 대가를 받는다. 말하자면 정당한 노동에 대한 대가가 아니라, 대가에 따른 정당한 노동을 제공해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받은 월급으로 나는 겨울에 방을 데우고 여름에 에어컨을 틀며 수도세와 관리비를 내고 일용할 양식을 사고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줄 선물을 산다. 그 월급으로 어리숙한 나를 어르고 달래서 잘 데리고 살아 보려 한다.


  그 사실을 인정한 후로 일을 대하는 나의 태도는 조금 달라졌다. 예전에는 일이 많아 도망치고 싶을 때 상사와 회사 욕을 하며 다 때려 치고 싶다고 말하고 다녔지만, 이제는 이게 내 할 일 이겠거니, 나는 이 일을 하려고 고용된 것이며 그에 따른 월급을 받는 것이려니 생각하고 눈앞에 산더미처럼 쌓인 업무를 순순히 받아들인다. 상사한테 싫은 소리를 들을 때도 이것까지 내가 감수해야 할 일의 일부라고 여긴다. 그러니까 이것도 내 월급값에 포함되는 정신노동이려니.


그래서 회사동료나 친구가 “왜 이런 일을 나한테 시키는 거냐”며 짜증을 부릴 때, 옆에 가서 조용히 말해준다. “아니야··· 회사는 이 일을 시키려고 우리를 뽑은 거고, 우리는 그로인해 월급을 받을 수 있는 거야” 그렇게 말하고 나면 다들 조용히 “그건 그렇지”라고 인정하며 숙연히 자리로 돌아간다. 그리고 각자 해야 할 일을 모니터에 띄우고 타닥타닥 키보드를 두들긴다.


 몹시 추운 1월의 어느 겨울날, 나는 일기장에 이렇게 썼다. 

“오늘은 부산에 역대급 한파가 불어 닥친 날이다. 최저기온 –12도. 창문을 열어보니 밖은 냉골과 다름없다. 뼈가 시큰해질 만큼 찬바람이 분다. 이 안락하고 따뜻한 집을 유지하기 위해서, 밖에 나가 앉지 않기 위해서는 싫은 것을 감수하고 바지란히 일을 해야 한다. 따뜻하고 쾌적한, 안전한 보금자리를 유지하는 데는 대가가 필요하다.”


다시 현재로 돌아와서 2021년 가을 수요일 오전 7시. 나는 오늘도 겸허하게 내게 주어진 일을 받아들일 준비를 한다. 대가에 따른 정당한 노동력을 제공해야 한다는 마음가짐으로 출근 준비를 한다. 그 대가로 인해 지금 스스로를 먹여 살리고 있다는 사실을, 이 안락한 잠자리와 편안한 방을 유지하기 위해선 나의 노동력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다시금 상기한다. 자, 그럼 오늘 하루도 열심히 노동이라는 것을 해볼까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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