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속 듣고 싶은 나의 호칭
출산 전 혼자 떠난 여행의 마지막 밤, 이전에 먼저 이 공간에 머문 사람들이 남긴 방명록에 나의 흔적을 남기다 자연스럽게 내 이름이 아닌 내가 글을 쓰는 '린꽃'이라는 호칭을 적었다.
지금의 내겐 제일 소중한 이름이 된 나의 호칭.
살면서 내게는 다양한 호칭들이 거쳐갔다.
우리 부모님의 딸, 시부모님의 며느리, 남편의 아내, 소속된 곳에서의 직책으로 불렸던 호칭들과 같이 당연히 사회적으로 불리는 단어들이 대다수였지만 그중에는 특히 애착이 가던 호칭들도 많았다.
애정표현이 서투른 남편은 종종 나를 애칭이랍시고 '꽃돼지'라고 부르곤 하는데 처음엔 탐탁지 않았지만 요즘엔 웃으며 받아들이게 된다.
워낙 무뚝뚝한 남편에게 연애 시절부터 '사랑해'와 같은 단어는 한 번도 들어본 적 없지만 어쩐지 '꽃돼지'라는 말을 할 때의 남편의 눈에 사랑이 담긴 게 보인다.
지금은 남편이 나를 부를 때, 그 만의 방식으로 사랑한다는 말이 함께 들려오는 듯하다.
이와 마찬가지로 내가 간호사로 일하던 때에 늘 다정하게 말을 걸어주시던 보호자분들이 내가 토끼를 닮았다며 애정 섞인 말투로 '토끼 선생님-' 불러주던 말도 병원을 떠난 지금도 오래 기억에 남는다.
친한 친구가 개명하기 이전의 과거의 내 이름으로 내게 붙여준 '린꽃'이라는 호칭도 특히 애착이 갔고, 지금도 친구와 통화를 할 때면 해맑은 목소리로 '린꽃'이라는 내 호칭을 불러줄 때마다 정말 행복하다.
지금은 친구가 불러주던 린꽃이라는 호칭이 필명이 되어 글을 쓰고, 그 호칭 덕에 세상에 더 가까워지고 있다.
지금의 내 이름에는 린 꽃의 '린' 자도 들어가지 않지만 친구와 사람들이 린 꽃으로 나를 불러줄 때마다 이전의 내가 아직 그대로 살아 숨 쉬는 것 같아 행복하다.
책을 좋아하고 글을 좋아하던 어린 날의 나로 돌아가는 나의 이름.
나를 아껴주는 사람들이 그들만의 방식으로 나를 불러줄 때, 나는 비로소 그 단어 속의 내가 되는 것 같았다.
최근의 내게는 새로운 호칭이 생겼다.
임신을 한 이후에 보건소에 임산부 등록을 하러 갔을 때나 조리원을 알아보고, 예약하는 과정에서 많은 사람들이 나를 '어머님'이라고 불렀다.
아직 아기가 태어난 것도 아닌데 어머님이라는 말을 들을 때마다 날 부르는 게 맞는지 믿기지 않아 너무 낯설고 의아했지만 몇 번 듣다 보니 더 듣고 싶었다.
입덧약을 먹어도 입덧이 너무 심해 화장실에 주저앉아있던 때에는 보건소에서 걸려온 전화의 시작에 ' 어머님-'이라는 말을 듣고 기력을 찾았다. 정신없이 끊은 통에 전화 내용은 기억나지 않지만 어머니라는 단어를 듣자마자 뱃속에 내가 책임질 생명이 있다는 생각에 정신을 차리고 물을 마시고, 아기를 위해 뭐라도 먹어야 한다는 생각에 그날 첫 끼니를 챙겨 먹었다.
입덧 약도 듣질 않아 힘들어하던 와중에 아마 어머님이라는 단어는 엄청난 힘이 있는 단어가 아닐까, 생각을 했다.
문득 지금껏 내가 기다려온 말이기도 하고 살면서 내가 제일 듣기 좋았던 말, 앞으로도 계속 듣고 싶은 말은 언제까지나 어머니일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불현듯 나를 낳고 기른 친정엄마가 엄마를 처음 들었을 때가 궁금해 친정 엄마에게 전화를 걸어 내가 처음 엄마라고 말했을 때를 물었다.
그때의 기분이 어땠냐고, 감동하지 않았냐는 나의 물음에 엄마는 잠시 생각에 잠겨있다가 ' 음.. 말할 때가 되어서 말을 하는구나 생각했지, 별로 감흥은 없었던 것 같아. 오히려 말할 때가 됐는데 말을 못 하면 그게 문제니 걱정을 했겠지..'라는 답을 했다. 내가 생각했던 대답이 아닌 너무 이성적인 대답이라 실망하려던 찰나에 다음 말이 뒤를 잇는다.
'너는 엄마라는 말에 감동도 하고, 감성적이게 애를 키워. 나는 그러지 못했어.. '
그 말에 나는 지금도 하루하루가 감동이라고, 병원에 갈 때마다 하루가 다르게 자라 있는 걸 보는 것만으로도 얼마나 기쁜지 모른다고 얘기했다.
사소한 것들에 감동하고 잘 웃고 우는 지금의 나를 보면, 엄마는 지금의 나를 충분히 감성적으로 키워냈다.
어린 시절 엄마가 길을 걸을 때 작은 풀들을 보며 말을 걸던 모습이나, 꽃들의 이름을 내게 알려주며 행복해하던 얼굴이 지금도 선하다. 그런 엄마에게서 자라며 내가 자연을 사랑하는 건 필연적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훗날 나도 길을 걷다 마주치는 꽃과 풀들의 이름을 아이에게 알려주고 싶다.
내 모든 사랑을 다 주고 싶은 나의 아기를 부디 무사히 만날 수 있기를 바란다.
아직은 짐작조차 되지 않지만 훗날 나의 아기에게 어머니라는 말을 듣게 될 때, 정말 세상을 다 가진 기분이 아닐까? 생각만으로도 행복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