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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린꽃 Aug 15. 2024

'그 나이대'에, '그 시기'에 해야 할 것

실패에 대한 인정과 관용은 없는 시대에 산다는 것

내가 항상 모든 일을 시작하는 데에 망설이는 제일 큰 이유는 나이이다.

'이미 늦은 건 아닐까? 나 이제 이십 대 후반인데, 뭘 시작하기엔 많이 늦었는데'

늘 얘기하면 남편을 포함한 내 지인들은 하나같이 이제 시작해도 늦지 않다고 하며 날 응원해 준다.
하지만 벌써 이십 대 후반이다.
나는 조바심이 난다.
기껏 20대 초반 4년을 바쳐 졸업한 대학을 다시 갈 수도 없는 노릇이고,
내 전공으로는 대학원을 가고 싶진 않았다.
이제 와서 하고 싶은 걸 찾는다는 건 낭만처럼 느껴질 순 있어도 고물가 시대에 가계에 보탬이 되지 못하고 돈 벌지 않은 채 적성을 찾는다는 건 철없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내겐 10대 때처럼 뭔가를 하고 싶다고 꿈꾸고, 시작하고, 내가 뭘 좋아하는지 적성을 찾을 시간은 없었다.
대학을 갈 때도 그저 취업이 잘 되는 과를 선택했었고
졸업한 후로는 늘 삼 교대를 하며 일을 했기에 낮밤 바뀌는지도 모르는 채 바쁘게 살다 보니 벌써 20대 후반이었다.
늘 직장에 끼워진 부품처럼 살다가 직장 밖의 세상에 나왔을 때 나는 한낱 세상 물정 모르는 어린아이에 불과했다.


아직 마음은 아이인 것 같은데,
어릴 적 내가 본 이십 대 후반은 어른이었는데 난 여전히 아이에 머물러 있었지만 철이 들어야 했다.

'내 나이에 맞는 일을 해야 할 시기'였다.

결혼도 인생의 업무처럼 이십 대가 지나기 전에는 해야 할 것 같아 애초에 지금 남편을 만날 때 결혼 생각이 없으면 연애를 이어가지 않겠다 선언하고 만난 지 몇 달 만에 속전속결로 해치웠다.
그렇게 결혼을 하고 낯선 시골로 이사를 오며 퇴사를 하게 되었을 때 직장에서는 '일을 그만하기엔 너무 어린 나이'라고 했다.
그 말은 나도 동의한다.
그래서 일할 곳 없는 전방의 시골로 이사 와서도 끊임없이 불안에 사로잡혀 구직 플랫폼을 들어갔다 나왔다를 반복하며 정체되어 있는 삶에 좌절했다.


내가 결혼하자마자 퇴사와 동시에 임신에 집착하게 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일을 하지 않으면 애를 낳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애라도 낳아야 내가 뭘 한 게 되니까.

궁극적으로는 임신과 출산을 위해 퇴사를 했으니 당연히 해내야 할 커다란 업무와 같았다.

언제부턴가 임신이 내겐 커다란 스트레스로 자리 잡았다.
이직을 할 때 '공백기'를 설명하는 게 내가 학교를 다니거나 자격증을 따서 수치화하는 것보다 더 어려운 난제라는 건 늘 알고 있었다.
그래서 결혼=임신 이 같은 맥락이 되어 남들이 사는 삶의 정해진 수순 같은 과정을 똑같이 밟아야 한다 생각했다.



매년 8시간씩 듣는 올해 보수교육도 퇴사를 했어도 똑같이 들었다.
유예를 할 수밖에 없었다는 서류를 내는 게 더 귀찮은 과정이고, 어차피 추후에 업무에 복귀하면 유예된 것만큼 보수교육을 더 받아야 하니까.
일하지 않겠다 해놓고 뭐라도 해야 할 것 같은 마음에 보수교육을 듣고 있는 내 모습도 아이러니했다.
뭐 하나 선택하지 못하고 갈팡질팡,
이런 내 모습에 나조차 혼란스러운 시기가 요즘이었다.



누군가 나에게 이래야 한다고 정해준 건 없었지만
아주 오래전부터 그 나이대에, 어느 시기에 해야 할 것들은  당연하게 자리 잡아있다.
어떻게 보면 이게 바로 SNS의 폐해이다.
내 대학 동기들이 20대 후반이 되어 하나둘씩 결혼 소식을 알리기 시작하더니 점점 더 많이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는 걸 보면 늘 초조했다.
남들 따라 20대에 인생의 큰 과업인 결혼까지는 해 냈지만 결혼을 하니 당장 다음 과업이 보였다.
결혼한 지인들과 내 상황을 비교하며 '결혼한 지 얼마 만에 아기가 생겼는지' '몇 살에 출산했는지'
결혼을 했으니 당연히 이뤄야 할 과업에 대해서 또다시 조급해했다.
어느 나이에 어느 정도의 지위와 경제력과 배경이 요구되는 세상이다.
조금이라도 뒤처졌다가는 나는 그저 거기서 끝인, 낙오자가 될 거다.
이미 오랜 경험으로 실패로 인한 좌절이 오래 지속되면 안 된다는 건 알고 있었다.


실패에 대한 격려는 누구나 다 한다.
실패해도 괜찮아, 다시 해보면 되지- 하면서.
경쟁 사회이기 때문에 당연히 실패할 수도 있는 건데
실패도 경험이라 말하는 시대이지만 모순적이게도 오랜 실패와 좌절은 용납되지 않는다.
오죽하면 아프니까 청춘이라는 말이 나왔을까 싶다.
실패에 대한 인정과 관용은 없는 시대이다.
그래서 실패를 하면 끝없는 어둠에 잠식되기 쉽다.
어둠 속에 숨어서 다시 일어날 용기도 내기 힘들어진다.
실패를 하고 용기를 내 다시 일어나면 세상은 '공백기'에 뭘 했냐, 증명을 하라며 수치화된 무언가를 요구하는 시대이다.
실패도 스토리가 되어야 하는 세상이라니.
'실패해서 뭘 시도할 용기가 나질 않아 쉬었다'
일 수도 있는 건데, 그럼 그건 그저 세상에서 내가  낙오자가 되었다는 걸 증명하는 일일 뿐.
실패해서 어떻게 다시 일어났다, 어떻게 성공했다,  사람들은 그것만 궁금해하지 왜 실패하게 되었는지 얼마나 좌절 속에 빠졌는지는 궁금해하지 않는다.
그건 그냥 내 사정일 뿐인 것이다.
그렇다면 나는 지금 실패한 사람인 건가?

퇴사의 이유이자 유일한 목표였던 아기도 갖지 못한 채 한 달, 한 달이 흐를수록 나는 조급하다.
훗날 나는 나의 공백기, 이 시간에 대해 왜 실패할 수밖에 없었는지 누군가의 앞에서 얘기할 수 있을까?
앞으로도 계속 내가 뒤쳐지는 게 아닐지 실패로 기억되어 내 삶이 잊힐까 너무 두렵다.



나는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지,
철없는 어린애처럼 실재하지 않는 꿈이나 좇으면서 낭만 따라 살 수도 없는 일이고
여기서 뭐든 더 멈춰있으면 안 될 것 같은데.
지금 이 시기를 어떻게 활용하느냐가 앞으로의 인생에 큰 관건이 될 듯싶은데 나는 여전히 너무 혼란스럽다.
나 스스로 합리화하며 받아들인 실패를 앞장 세워 자꾸만 세상 앞에 숨는다.
'추후에 수치화해야 할 공백기'라는 지독한 어둠 속을 헤매다 보면 다시 뭘 시작할 용기도 내지 못한 채 자꾸만 어둠 속으로 더 깊이 파고든다.
그러다 보면 어느덧 어둠 속에 있을 때 가장 큰 안정감을 느끼는 나를 발견한다.
남편 따라 일자리 하나 없는 시골로 왔으니 어쩔 수 없었다고, 또다시 유산하게 될까 두려웠다고, 더 이상 남편과 날 떠난 아기의 그림자 뒤에 언제까지 숨어있을 수는 없다는 걸 잘 안다.
앞으로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
실패에 대한 인정과 관용은 없는 세상에서, 나는 내게  '한 번쯤 실패할 수도 있지. 근데 언제까지 그렇게 있을 거야?'
세상이 내게 그래왔던 것처럼 내게도 잔인하게
매일매일 끝없이 채찍질한다.


나는 추후에 수치화해야 할 나의 하루하루가 너무 두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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