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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린꽃 Aug 22. 2024

내가 시들지 않게 돌보기

임신준비로 퇴사, 그 이후의 삶

결혼 후, 남편을 따라 일할 곳 없는 화천으로 이사를 오며 임신준비를 위해 처음 퇴사를 한다고 했을 때 시아버님이

'시골에서 일을 하지 않으면 뭘 할 거냐,
사람이 일을 하지 않으면 썩는다'라고 하셨다.

시골이라 일할 곳이 없으니 한 시간 반 거리의 인근 도시에 집을 따로 구해 주말부부로 일을 하라고.
나는 어디서 일하든 3교대를 피할 수 없기 때문에 그렇게 된다면
우린 주말부부가 아니라 월간 부부로 살아야 할 텐데.
남편과 살기 위해 충청도 사람인 내가 연고도 없는 강원도 끝자락까지 왕복 500km 넘는 이곳으로 기존의 내 삶을 다 포기하고 온 건데 이곳에는 일할 곳이 없으니 또 다른 인근의 타지로 떠나 혼자 살며 일을 하라니.
같이 살기 위해 결혼한 건데 일을 하기 위해 따로 살라는 말이 나로서는 이해가 되질 않았다.
연애를 할 때도 간호사인 내가 삼 교대를 했던지라 한 달에 많으면 두세 번, 그것도 잠깐 볼 때가 많았다.
양가 부모님께 첫인사도 내가 교대 근무를 하며 주말에 쉬는 날 없이 일을 했던지라 모두 평일에 만났다.
시골에 이사를 오고 기존 직장과 거리가 너무 멀어져 퇴사를 결정할 수밖에 없었던 것도 있었지만 나는 교대근무를 병행하며  지난 유산들을 겪으면서 지칠 만큼 지쳐있어서 일할 여력도 없었다.
교대근무도 하면서 애도 낳으라니.
과중된 업무가 많은 느낌이었다.
폭풍처럼 몰아친 고통 속에 그냥 좀 쉬고 싶었다.
몸도 마음도 다 지쳐있었다.



남편이 당장 이곳엔 일할 곳이 없고 몇 년 안에 타지로 이사를 갈 테니 이사를 가면 일을 하고 그 기간 임신 준비를 하겠다, 당장 계속 교대 근무를 하면 또다시 유산될까 두렵다 시부모님을 설득해 퇴사를 결정하고 결국 남편을 따라 시골로 왔다.
 시골로 온 후 퇴사와 동시에 내게 주어진 과제를 해내야 했다.
곧바로 다양한 임신 준비를 시작 하긴 했지만 뜻대로 되진 않았고 설상가상 임신 준비는 그렇다 치고 당장 시골 살이를 시작한 지 몇 달 지나지 않아 최근엔 정말 내가 '썩어가는 중이다'라고 느꼈다.



아는 사람 하나 없는 첩첩산중에서 설상가상 남편까지 바빠서 며칠씩 집에 들어오지 못하는 날도 많으니 마음속 깊은 곳에서부터 고여있던 것들이 썩어가는 느낌.
남편은 집에 못 들어오는데 나 혼자 배란테스트기는 매일 했지만 만나질 못하니 배란테스트기는 곧 소용이 없었다.
나 혼자 당연히 임신하지 못한 채 이번 달을 보내야 함을 초조해하며 피가 날 때까지 손톱을 뜯으며 멍하니 벽만 바라보는 시간이 늘어갔고 하루 종일 말 한마디 하지 않는 날이 늘었다.
밖에서 어쩌다 사람 소리라도 들리면 강아지처럼 창밖으로 달려 나가 사람을 구경하다가 시야에서 사라지면 또다시 멍하니 벽만 바라보고 있었다.
ott 플랫폼 이것저것을 결제해 놨지만 처음엔 사람 소리라도 들으려 하루 종일 켜놓고는 멍하니 바라만 보다가 나중엔 아무것도 보지 않았다.
울다 지쳐 잠들었다가 깼을 때도 텅 빈 집에 티브이 소리만 가득하고 여전히 나는 혼자였을 때가 제일 괴로웠다.
결혼을 하고 혼자의 삶보다 더 외로워진 이 상황이 너무 당황스러웠다.
아- 겨우 이러려고 퇴사를 선택했나,
결혼을 하면 더 행복해야 하는 건데 왜 나는 더 이렇게 불행해졌나.
역시 아버님 말대로 일을 하지 않으면 이렇게 썩어가는 건가.
일이라도 했다면 남편의 부재도 그런대로 잘 이겨냈을까, 처음 몇 달은 후회도 많이 했다.
울기도 많이 울었지만 울어봐야 상황이 달라지지 않는다는 것도 알고 난 후로는 그저 멍하니, 하루하루 눈을 뜨면 외로운 시간이 지나 밤이 오길 바라며 그저 흘려보내던 나날들이 이어졌다.
나는 넋이 나간 채 눈에 띄게 하루하루 시들어갔다.

오랜만에 만난 사람들은 내 모습을 보고 눈물 흘렸다.

정말 괜찮은 게 맞냐고,

이대로 괜찮겠냐고.

모두가 초점을 잃고 앙상하게 시든 날 걱정했다.


 

나도 내가 괜찮은지 알지 못한 채
매일매일을 외로움에 허덕이던 와중에 문득 내 시야 끝에 집구석 한편에서 밖으로 뿌리를 내밀며 화분을 뚫고 씩씩하게 자라고 있는 몬스테라가 눈에 띄었다.
결혼을 하며 몬스테라를 사 왔는데, 처음에 작고 귀엽던 몬스테라가 지금은 몇 달 새 두 배나 자랐다.
화분을 뚫고 나오는 뿌리들에 더 큰 화분으로 옮겨 줬음에도 화분을 옮겨준지 며칠 새에 밖으로 뿌리도 더 자라고 새 잎도 꾸준히 자라나고 있었다.
나는 시들어가고 있었는데 너는 자라나고 있었구나.
당장의 내가 시드는 데만 급급해서 신경 쓰지도 못했는데 그래도 어떻게든 살아가려 스스로 뿌리를 내리고 있었구나,
열심히 자라고 있는 몬스테라가 기특해서 괜히 잎도 더 닦아주고,
식물 영양제도 주문해 꽂아뒀다.
그러고 나니 왜 나는 내게 이렇게 잘 자라줘서 고맙다고 칭찬을 해주지 않았나 하는 생각에 나를 더 사랑해 줘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외로운 생활이지만 나는 내가 썩어가지 않게, 나름대로 꽤 씩씩하게 지금까지 견뎌내고 있었다.
문득 돌아보니 외로움에 잠식되지 않기 위해 늘 바쁘게 집 곳곳을 항상 정리를 하고, 서툴지만 음식 연습을 하고, 하루에 한 번씩 밖으로 나가서 산책을 하면서 나를 돌봐왔던 또 다른 내가 보였다.
사실은 나는 끊임없이 자라고 있었다.
내가 썩어버릴까 걱정되는 마음에, 썩지 않게 돌보고 있었다.
내가 나를 걱정했던 마음, 그거면 됐다.
꼭 누가 나를 돌보지 않아도 나라도 나를 돌본다면
오늘처럼 또 하루씩 조금씩 자라며 살아갈 테니까.

하루가 다르게 크는 우리집 몬스테라 변천사

내일도 외롭고 힘든 날들의 연속이겠지만
그래도 다행인 건 8월, 내가 사는 이곳이 가장 푸르를 계절이라는 거다.


푸른 화천의 8월, 길을 걷다 발견한 빛나는 순간

발 닿는 곳마다 푸르른 이곳.

내가 시들려고 할 때마다 같이 피어나자며 내게 위로를 가져다주는 자연.

이 상황을 전화위복으로 삼아 자연 속에서 내가 시들지 않게, 나를 잘 돌봐야겠다.
내가 시들지 않고 더 자라날 수 있게 나를 사랑해 줘야겠다.

언젠가 내가 나를 사랑할 훗날에는

내게도 소중한 존재가 찾아오리라 믿고 굳건히 내일을 살아가려 한다.

내가 조금 더 강한 마음을 갖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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