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주일간의 나는 정말 조심조심 살았다. 원래 이번 주 평일엔 먼 친정도 내려가야 하고, 주말엔 왕복 여덟 시간의 여정을 떠나 결혼식장에도 가야 하고 돌아오자마자 춘천으로 벌초도 가야 해서 무리한 일정으로 나 없이 남편만 가네 마네 했다가, 당장 다음 주에 예정됐던 여행도 취소를 해야 할 것 같아서 앞으로의 모든 일정을 바꿔가며 고민 중이었다. 그 이유는 최근의 내 몸 상태가 안 좋았기 때문이다. 혹시나 하고 기대했지만 또다시 화학적 유산을 겪었다. 이제는 익숙하다. 뭔지도 몰랐던 화학적 유산을 처음 겪었을 땐 울고불고 상실감이 심했는데 몇 번 겪어본 일이라고 이젠 이 과정이 익숙한 게 슬프다.
그동안 화학적 유산을 기록에 남겨본 적은 없지만, 이번이 마지막이길 바라며 남겨보는 기록
8월 29일, 생리 예정일 이틀 전
가슴이 아프고 미열을 동반해 두통이 심하다. 기존의 생리 전 증상과는 달라서 얼리 테스트기를 했는데 매직아이도 안 보인다. 이 정도면 아니겠지 싶어서 계획했던 일들을 그대로 하기로 했었다.
8월 31일, 생리 예정일
원래라면 집에 내려갔어야 하는 날. 칼 같은 주기의 나는 핑크다이어리의 생리예정일 아침이면 늘 생리를 한다. 점심이 되었는데도 생리는 시작되지 않고 여전히 가슴이 아프고 식은땀이 난다. 가만있어도 덥고 두통은 갈수록 심해진다. 지난번 임신들에서도 두통이 심했기에 아무래도 이상해서 집에 출발하기 전, 점심을 먹고 임신테스트기를 해봤는데 흐릿하게 두 줄이 보인다. 믿기지 않아 배란테스트기도 해봤다. 배테기도 동일한 수준으로 두 줄이 나왔다. 동아얼리임테기에서도 흐린 두 줄이 보인다. 정말 임신인가? 싶었던 순간. 집에 내려가기로 한 일정과 오랜만에 집에 내려가며 잡은 약속들을 취소하고 그날로 며칠간 집에만 있었다.
9월 1일 생리 예정일 +1
집에서 하루 종일 아무것도 안 하고 쉬었다.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도 피곤해서인지 코피가 났다. 잠이 쏟아지고 분명 증상들은 있는데, 여전히 임테기의 선이 흐리다. 배태기는 전날과 동일하게 두 선이 진하다. 얼리임테기도 흐린 두 줄이 나와 이때부턴 불안했다.
9월 2일과 3일, 4일
임테기에 대한 집착을 내려놓으려고 하루에 한 번씩만 했다. 제대로 더블링 되지 않고 아주 연하다. 얼리 임테기를 더 사 와서 해봤는데 여전히 연하다. 이때부턴 화학적 유산을 예견했다.
9월 5일
생리 예정일 일주일 뒤, 이젠 흐린 선도 거의 보이지 않는다. 체념하고 주말부터의 계획들은 취소하지 않고, 다음 주 여행도 그대로 가기로 했다. 지난번 화유 때는 2주 반이나 지나서 생리가 시작되었기에 그저 많이 늦지는 않길 바랐는데, 다행히 점심 즈음 생리가 시작되었다. 그와 동시에 코피가 또 났다.
임신테스트기들을 모아보고 나니 나는 일주일간 집착하지 않겠다 해놓고 많이 집착했었던 것 같다. 이 정도 진하기면 피검도 분명 낮게 나올게 분명해서 이 과정을 겪으면서 이번엔 병원을 가지 않았다. 생리가 너무 늦는다면 그때 가볼 생각이었다. 마음 아프지만 곧장 미련 없이 일주일간의 임테기들을 버렸다. 생리가 시작되고 덤덤하게 남편한테 알렸다. 이번에도 또 그렇게 됐다고, 근데 나는 괜찮다고. 지금이 때가 아니었을 뿐일 거라고.
이번 주 초에 주말에 예정된 시댁 일정들을 나는 못 간다고 얘기하면서 남편이 시부모님한테 내가 몸이 안 좋다고 말했는데, 전화기 너머로 시부모님이 내가 임신한 게 아니냐며 좋아하시는 목소리가 들렸다. 맛있는 거 많이 사주고 잘해주고 쉬게 해 주라고. 아닐 수도 있다고 얘기했지만 들뜬 시부모님의 목소리는 감출 수 없었다. 주말에 시부모님을 만나면 또 그렇게 된 일이라고 어떻게 얘기를 해야 하나 그게 좀 막막하다. 생리를 시작하자마자 씁쓸한 마음에 조금 울면서 술을 마시고, 그 와중에도 배란테스트기와 임신 테스트기를 더 주문했다. 그래도 인생지사 새옹지마라고 했던가.. 이번주는 모든 일정을 취소하고 집에만 있었는데 앞으로의 여행은 예정대로 갈 수 있고 당장은 일주일 만에 생리가 시작되어서 다행이라는 생각뿐이다.
'너를 만날 여정' 을 처음 시작할 땐 이쯤이면 임신 기록들을 올리고 있을 줄 알았는데..
나는 언제가 되어야 너를 만날 수 있는걸까? 너무 막막하지만 그래도 오랜만에 본 두 줄에 나는 며칠이라도 정말 행복했다. 씩씩하게 써 내려가고 있지만 언제 다시 무너져버릴지는 나도 모른다. 나는 내가 괜찮았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