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를 그리워하는 파초의 마음

by 산비


“내가 좋아서 했던 일들이 이제는 좋아서 하는 일이 아니라, 내가 책임지고 있는 수많은 것들과의 관계 속에 자리 잡으면서 매일 해야 하는 뻔한 일상으로만 다가올 때 중년은 바로 내 눈앞에 우뚝 서게 된다.”


뭘 봐도 뻔해 보이고 뭘 해도 새롭고 재미있지 않다면 바로 중년이라는 나이의 덫에 걸려든 것입니다. 왜 해야 하는지 모르겠고 의미를 찾을 수도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일을 해야 할 때 우리는 힘들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요는 무엇을 하든 내가 진정 원하는 일을 하고 있는가 입니다.


누구에게 보여주기 위한 삶이 아니라 누가 뭐라 든 내가 원하는 성취를 이루는 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날 모르는 대중의 인정보다는 나를 아는 한 사람의 인정, 더 나아가 자기 스스로에게 ‘너 참 열심히 살았다.’‘이 정도면 쓸 만하지 않아?’라고 말할 수 있다면 그걸로 족합니다.


프로네 님은 제가 볼 때 누구보다도 인생을 열심히 사는 사람이며, 배우고 익히는 것을 사랑하는 사람이며, 현재에 안주하지 않고 늘 새로움에 도전하고 부딪쳐보는 투지가 돋보이는 사람입니다. 벽이 앞에 놓인다면 부수고 나아가거나 넘어가면 됩니다. 그도 힘들면 벽이 끝나는 곳까지 가서 돌아가면 되지 않겠습니까?

‘마라톤 벽’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아마추어든, 프로 선수든 30km 지점을 넘어서면서부터는 몸 안에 저장된 에너지원이 모두 고갈되면서 엄청난 고통과 피로감이 몰려옵니다. 그 고통을 이겨내고 포기하지 않고 달리면 나중에는 그 보상으로 극치의 희열감이 솟아납니다. 그것을 ‘러너스 하이’라고 합니다. 한계를 느끼신다면 그 한계를 뛰어넘으면 될 것입니다. 한계를 넘어서야 한 단계 도약할 수 있습니다.


자, 다시 시작입니다. 우보천리입니다. 책을 잡으십시오. 읽으십시오. 생각하십시오. 그리고 쓰십시오. 죽이든 밥이든 글이 써지는 대로 저에게 보내주십시오. 책을 읽은 생각들을 정리하여 매일매일 저에게 보내주세요. 그것이 당신의 일기가 되고, 당신의 삶이 되게 하십시오. 당신의 생각이 담긴 글을 읽고 싶습니다. 그럼. 파이팅~~


2006 11.16 당신의 신실한 벗 산비


밤이 또 깊었네요. 무척 바쁜 하루였지만 정신을 모아 틈틈이 책을 읽었습니다. 지난번 읽다가 밀어두었던 <마음 하나에 펼쳐진 우주>를 드디어 완독 하였습니다.


비록 화엄의 세계에 대 맛을 본 정도에 지나지 않지만 재미있게 책을 읽었습니다. 나중에 부석사를 방문하여 의상대사의 영정을 보게 되면 남다른 감회가 있을 듯합니다.


이어서 박준규, 최한선 님이 쓴 <시와 그림으로 수놓은 소쇄원 사십팔경>을 읽기 시작했습니다. 책을 읽으며 지난번 가보았던 소쇄원의 전경을 머리로 떠올려 보았습니다.

시간을 머물지 못했고 분위기가 다소 번잡스러웠던지라 옛 정취를 그대로 느껴볼 수는 없었지요. 그래도 책으로 다시 만나니 48 영 하나하나가 새로이 살아나 의미 있게 다가옵니다.


고목통류(刳木通流) : 나무 홈통을 뚫고 흐르는 물, 하서 48 영 중 제7 영입니다.
‘가을로’라는 영화에서 단풍잎을 흘려보내던 바로 그 물길이지요. 지금의 모습은 예전 원래의 그것은 아니라고 합니다. 복원 과정에서 오류가 있었다는 지적입니다. 어쨌든 인위적 물길을 만들어 연못을 채우고 다시 그 물이 물방아에 떨어져 흩어져 날리는 飛流를 볼 수 있게 했다 하니 그 멋스러움에 경탄하게 됩니다.


예전에 ‘죽설헌’에 가 보았을 때 박태후 님의 작업실 뒤쪽 통창 너머로 죽통을 놓아 물이 흐르게 했던 것이 기억에 납니다. 법정 스님도 거처에 이 물길을 만들어두고 물 떨어지는 소리를 듣는 다지요. 저도 나중에 산속에 집을 짓게 되면 반드시 이 죽통 물길을 만들어보고 싶습니다. 고요한 밤에 물 흐르는 소리는 얼마나 청아하고 낭만적이겠습니까?


천간풍향 千竿風響 : 대숲에서 들려오는 바람소리, 제10 영입니다.
소쇄원도에 보면 제월당 바로 뒤로 청죽이 우거진 대숲이 있었다고 합니다. 지금은 자취를 감추고 집 뒤로 멀리 떨어진 산자락에 대숲이 형성되어 있습니다. 영화 ‘봄날은 간다’에도 대숲에 이는 바람소리를 녹취하기 위한 작업을 하는 장면이 나오지요. 대 자체가 피리 등의 관악기를 만드는 필수 제제이니 그 자체로 피리소리를 연상시키는 데다, 댓잎이 바람에 일어나는 음향이 몽환적 정취를 자아내기에 부족함이 없습니다.

이제 집에 가야 할 시간입니다. 프로네 님이 이 세상에 존재해서 얼마나 다행인지 모릅니다. 편히 쉬십시오.

2006 11.16 비 갠 뒤의 맑은 바람 산비 보냄


금요일 아침입니다. 하루하루가 화살처럼 흘러갑니다. 정신 바짝 차리고 오늘을 살 일입니다.

“관계없는 성장이란 없다. 내 안의 가능성을 이해하고 긍정해주는 사람, 자신의 불안과 약점을 드러내도 수치심을 느끼지 않게 해주는 사람, 자신을 내맡긴다는 불안이나 감정을 이용하지 않을 것이라고 믿게 해주는 사람이 바로 사랑하는 사람이다.”


우리는 이제 서로의 약점을 드러내도 수치심을 느끼지 않을 정도의 사이가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격의 없이 서로의 모자란 점을 지적하고 충고하고 격려해주는 사이였으면 좋겠습니다. 그것이 인격적으로 교감하는 상태에서 이루어지는 것이기 때문에 결코 부끄럽거나 창피해하지 않고 오히려 고마워할 것임을 믿습니다.


살아있는 동안에 오르가즘을 최대한 느끼다가 가는 인생이 성공한 인생이라고 합니다. 그중 최고의 낙은 ‘마운틴 오르가즘’이라고 조용헌 님은 말합니다. 그는 몸이 찌뿌드드하거나 감기 몸살 기운이 있다 싶으면 바위산을 오른답니다. 그러면 몸과 마음이 개운해지고 삶의 의욕이 생긴다는 것입니다.

이번 주 일요일에 북한산에 오릅니다. 북한산을 관통하여 도봉산까지 완전히 종주하는 코스로 산행시간은 10시간 정도 예상하고 있습니다. 좀 고되고 힘들겠지만 그만한 보람이 있을 것입니다. 가서 바위산의 정기를 마음껏 받아오겠습니다.

거창하고 허무맹랑한 계획보다는 실질적이고 실제적인 하루의 계획을 정해 실천하도록 합시다. 오늘 저는 열심히 일하고 틈틈이 신문 구독하고, 막간을 이용해 영어 공부하고 오후에 소쇄원 사십팔경 책을 열심히 읽을 생각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에 나의 생각을 정리하여 프로네 님에게 띄우는 편지를 쓸 계획입니다. 오늘 하루도 씩씩하게 살아봅시다.


2006 11.17 산비


옥추횡금 玉湫橫琴 : 맑은 물가에서 거문고 비껴 안고. 제20 영입니다.
<분서>에서도 보았던 백아의 이야기가 나오고 있습니다. ‘지음’이라는 말이 친구를 뜻하는 것인지는 알고 있었지만 그것이 백아에서 연원한 것이지는 오늘에야 알았습니다. 백아의 거문고 소리를 듣고 무엇을 뜻하는지 쉬이 간파했던 종자기. 그가 죽자 거문고 줄을 끊어버리고 소리를 내지 않았다는 고사가 바로 백아절현 伯牙絶絃입니다. 그리하여 소리를 통해 속마음까지 잘 아는 다정한 사이를 두고 知音之友 라 합니다.


수계산보 脩階散步 : 긴 섬돌을 거닐며. 제23 영.
소쇄원에는 흙과 돌로 쌓은 갖가지 축대들이 있습니다. 소쇄원도를 자세히 보시면 입구에서 대봉대를 지나 애양단 앞쯤에 세 사람의 행인이 그려져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눈을 감고 옛날로 돌아가 보십시오. 광풍을 쐬며, 아름다운 소쇄원의 경치를 보며 유유자적 소요하는 모습이 그려지지 않습니까? 가히 장자 逍遙遊 의 시취가 느껴지는 바입니다.

보내주신 ‘추사 김정희 전’ 답사기 잘 읽어보았습니다. 한 마디로 ‘괄목상대’입니다. 며칠 사이에 필력이 일취월장하셨습니다. 마치 제가 미술관을 다녀온 듯 글에서 생동감이 느껴집니다. 아마도 담금질의 효과가 나타나나 봅니다. 인용도 잘하셨고, 중간중간 필자의 생각이 스며들어 있어 글을 읽는 맛이 있습니다. 문체도 한결 간결해져 글을 읽는 호흡이 경쾌합니다. 글도 자꾸 써보면 늘게 되어 있습니다. 앞으로도 좋은 글 많이 부탁드립니다.


2006 11.17 금요일 밤에 산비


바쁜 하루였습니다. 피로가 아직 덜 풀린 데다 감기 기운마저 있어 머리가 아프고 몸이 축축 쳐집니다. 그 와중에도 기를 모아 책 몇 줄을 읽었습니다.


제36 영 복사꽃 언덕에서 맞는 새벽. 도오춘효 桃㮧春曉
멋있는 말 아닙니까? 만물이 생동하는 봄날, 복사꽃 흐드러지게 피어있는 언덕에서 맞는 새벽. 만약 물안개라도 자욱이 피어난다면 가히 仙界라 할 만할 것입니다. 복사꽃은 비록 사군자나 세한사우는 아니지만 봄을 대표하는 사계화의 하나입니다. 四季花란 도리화桃李花, 연화, 국화, 매화를 일컫습니다.


제40 영 골짜기 건너편 연꽃. 격간부거隔澗芙渠
연꽃은 부거, 부용이라고도 불리는 데 그 향이 지란의 향을 뛰어넘는다고 하서는 찬미합니다.

제42 영 산골물 가까이에 핀 배롱나무. 츤간자미櫬澗紫薇
배롱나무가 백일홍을 말하는 거더군요. 또한 자미 紫薇 라고도 불립니다. 자미, 백일홍, 배롱나무가 다 한 가지를 말하는 것이었는데 각각 다른 것으로 알고 있었으니 무식의 소치입니다. 하서 김인후는 백일 동안이나 붉은 꽃을 피운다 하여 홍방紅芳이라고 읊고 있습니다. 또한 다른 말로는 ‘파양화’라고도 하는데, 간지럽거나 간질간질한 것을 파양이라고 하는 것에서 연유합니다. 나무의 껍질을 손톱으로 긁기만 해도 간지럼을 타서 나무 끝까지 움직인다고 하여 ‘파양화’라고 불린다네요. 재미있죠?


제43 영 빗방울 떨어지는 파초잎. 적우파초 滴雨芭蕉


조국을 언제 떠났노.

파초의 꿈은 가련하다.

남국(南國)을 향한 불타는 향수(鄕愁),

너의 넋은 수녀(修女)보다도 더욱 외롭구나!

소낙비를 그리는 너는 정열의 여인,

나는 샘물을 길어 네 발등에 붓는다.

이제 밤이 차다.

나는 또 너를 내 머리맡에 있게 하마.

나는 즐겨 너를 위해 종이 되리니,

너의 그 드리운 치맛자락으로 우리의 겨울을 가리우자. - 김동명 ‘파초’


저자가 ‘파초’하면 이 시가 떠오른다고 하길래 따로 한번 찾아서 옮겨봅니다. 이 시가 비록 일제시대의 암울한 현실 속에서 조국의 광복을 염원하는 속뜻을 담고 있다고는 하지만 열대의 소낙비를 그리워하는 파초의 마음이 또한 애절합니다.


몸이 고단합니다. 그래도 틈틈이 책을 읽고 정리하여 편지를 써 보냅니다. 나의 편지를 간절히 기다릴 벗을 생각 하며 온 정신을 모아 한 자 한 자 정성껏 써서 보냅니다. 이 편지를 읽으며 환한 미소 지으실 프로네 님을 생각하면 힘이 납니다.

2006 11.20 산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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