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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산비 Dec 29. 2018

그레이트 오션 워크 6

트레킹 6일 차 (8월 5일)

: 렉 비치 주차장 - 12 사도 바위 비지터 센터 18km     


자기만의 프레임을 가져야 한다. 프레임은 내공이다. 내공은 깊이에 비례하는 고배율의 렌즈다. 100 배율의 현미경으로는 보이지 않던 것들이 1000 배율에서는 분명하게 보인다. 나만의 프레임을 가지고 다들 무심히 넘기는 장면을 좀 더 세밀하게 관찰하자. 화려한 경치 뒤의 이면을 살피자. 냄새나는 뒷골목도 뒤져보자. 그림 속에 담긴 화가의 철학과 내면을 분석하자. 나만의 프레임을 가지고.        


새벽 2시쯤 되었을까? 오줌이 마려워져 잠에서 깨고 말았다. 귀찮아서 조금 버텨보다가 결국 참지 못하고 몸을 일으킨다. 텐트를 열고 천막을 걷어 올리며 천천히 밖으로 나오는데, 아~ 나도 모르게 입에서 탄성이 터진다. 하늘의 별들, 하늘을 가득 메운 수많은 별들.

태어나서 지금까지 이렇게 온 하늘을 뒤덮는 별을 본 적이 없다. 지금껏 본 밤하늘 중에 최고다. 이건 은하수를 넘어 그냥 숫제 하늘 전체에 분무기로 우유를 뿜어놓은 듯하다. 나는 지금까지 별은 하늘에만 뜨는 줄로 알았다. 그런데 땅 위에 별이 떠 있다. 저 멀리 지평선 위에서 별이 떠서 밤하늘을 뒤덮고 반대편 땅 끝까지 온통 별이다. 아! 별천지다. 눈물이 날 것 같다. 너무 아름다워서. 사람들을 모두 깨워서 별 좀 보라고 소리치고 싶은 것을 꾹 참고 다시 텐트로 기어들어갔다.       


- 34년의 인연 -    


인기척에 침낭 속에 웅크리고 계시던 교수님이 잠을 깨셨나 보다. 어제 저녁 먹고 9시쯤 바로 잠자리에 들었으니 사실 잘 만큼은 잔 셈이다. 김 교수님과는 34년 된 인연이다. 고등학교 1학년 때 국어 선생님으로 만나서 지금껏 인연을 이어오고 있다. 정말 특별한 인연이다. 나에 대해서는 누구보다도 잘 알고 계시다. 내가 정신적으로 힘들어 할 때마다 이것저것 인생 상담을 많이 해주셨다.

대학교 1학년 때이던가, 내 안에 숨겨진 편향된 감수성 때문에 나는 무척이나 나 자신을 학대한 적이 있다. “나는 왜 그럴까?” 하면서. 그러나 선생님은 단호히 나를 꾸짖으시며 그것은 너만이 가지고 있는 고유한 감성이며 절대 부끄러워하거나 자학할 필요가 없음을 깨우쳐주셨다. 그 감성을 나이 육십, 칠십이 먹을 때까지도 간직할 수 있다면 너는 누구도 갖지 못한 너만의 고유성과 정체성을 가지게 될 거라고 말씀해주셨다. 그 말을 들으며 북받치는 감정에 눈물을 흘렸던 기억이 난다.   

  

교수님과 나란히 누워 두런두런 옛날이야기를 나누었다. 고등학교 시절 이야기부터 대학 때의 만남들, 결혼하고 아이 낳으며 사는 이야기, 운동과 산행에 대한 이야기, 친구들 근황, 사랑과 우정에 대한 논쟁...     

잠깐 눈을 붙였다가 4시 반쯤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오늘 기상 계획 시간은 새벽 5시. 그런데 5시도 채 되지 않은 시각에 주섬주섬 한 명씩 텐트 밖으로 나오며 아침 인사를 나눈다. 서로의 기척에 잠에서 깨고도 그대로 눈을 감고 있다가 더 누워 있지 못하고 몸을 일으킨 것이다. 텐트를 멀찍이 떨어뜨려 쳤음에도 불구하고 말소리가 바로 옆에서 이야기하는 것처럼 소리 전달이 잘 되었다. 사방이 쥐 죽은 듯 고요한 때문이리라. 단장님은 사제지간에 무슨 할 얘기가 그리도 많으냐며 타박이시다.     


- 공주는 잠 못 이루고 -    


커피만 간단히 끓여먹고 짐을 정리하여 바삐 길을 나섰다. 오늘 걸어야 할 거리는 대략 18km. 마지막 종착지인 12 사도 바위 비지터 센터(Twelve Apostles Visitor Center)에 오후 1시까지 도착하는 것이 목표다. 아침은 프린스 타운(Prince Town)에 있는 식당에서 해결하기로 했다. 짐의 무게 부담을 줄이기 위해 애초부터 계획되었던 일정이다.     

어둠을 뚫고 랜턴을 켠 채 숲길을 걷는다. 배낭에 든 것은 마실 물과 비옷, 비상약 같은 간단한 채비뿐. 짐이 가벼우니 발걸음도 가볍다. 엄청난 속보로 저돌적으로 길을 걸었다. 주위가 어두워 둘러보고 조망할 것도 없다. 오직 걷는 일에만 몰두하며 속도를 낼 뿐.

어둠이 불러온 지루함은 조수미의 노래로 멀리 날려버렸다. 블루투스로 연결한 휴대용 스피커의 음량이 빵빵하다. 호주의 숲 속으로 밤의 적막을 뚫고 조수미의 ‘밤의 여왕’이 울려 퍼진다. ‘저 구름 흘러가는 곳’ ‘님이 오시는지’ 같은 가곡이 나오면 같이 따라 부르며 발걸음의 리듬을 맞추었다. 이어지는 파바로티의 ‘남몰래 흘리는 눈물’, ‘공주는 잠 못 이루고’ 장중한 음색이 동이 트는 새벽 분위기와 묘하게 어우러진다. 감동이다. 아! 음악 없는 삶은 얼마나 삭막할까?    

날이 서서히 밝아온다. 길은 평탄하고 여전히 부드럽다. 안내서에 나와 있는 길의 난이도도 Easy 다. 나중에 스마트폰 GPS 트랙에 잡힌 기록을 보니 순간 최고 속도가 7 km/hr를 찍은 구간도 있었다. 이건 걸은 게 아니라 거의 뛰었다고 봐야 한다. 서로 뒤떨어지지 않으려고 경쟁하듯이 걸은 탓이다. 그만큼 길이 좋고 몸 상태가 가뿐했다.     


- 야생마를 연상시키는 -    


벽이 없는 공간은 없다. 벽이 없는 인생도 없다. 벽을 만났을 때 그냥 그 앞에 멈춰 설 지 아니면 벽을 뛰어넘을지는 그 사람의 선택이다. 간절하지 않은 사람은 벽 앞에서 쉽게 포기한다. 그러나 간절한 사람은 어떤 방법을 강구해서라도 벽을 타고 넘는다. 어떡하든 해결책을 찾아내고야 만다. 당신은 지금 간절한가?    

  

아침 공기가 상쾌하다. 파도 소리도 시원하고. 아침을 먹기로 한 프린스 타운(Prince Town)이 저 건너 보이기 시작할 즈음 마을 쪽에서 웬 금발의 미녀  한 분이 머리를 휘날리며 경쾌하게 달려왔다. 트레킹을 시작한 이후 길 위에서 만난 첫 번째 사람이다. 비록 같은 걷기 여행자는 아니지만 굉장히 반가운 마음이 들었다. 아마도 아침 조깅을 즐기는 모양이다. 키가 크고 강인한 인상이 한 마리의 야생마를 연상시켰다. 그녀의 건강미에 반하여 모두 한 마디씩 거든다. “대단하다.” “멋지다.” “나이가 몇일까?” “여기 사는 여자인가?” “마라톤 훈련 중인 것은 아닐까?”     

그런데 휙 지나갔던 그녀가 얼마 안 가 앞쪽에서 다시 달려오고 있는 것이 아닌가. 아마도 길이 동그랗게 원 모양의 트랙을 이루고 있는 모양이다. 그렇게 지나쳐가더니 다시 이번엔 뒤에서 또 득달같이 달려 내려온다. 세 번이나 마주친 우리는 이번엔 그냥 지나칠 수가 없었다. 반가운 마음에 불러 세우고 이것저것 질문과 찬사를 보냈다. 우리는 아폴로 베이에서부터 여기까지 걸어온 트레커들인데 기념사진 한 장 같이 찍을 수 있겠냐고 부탁하니 흔쾌히 포즈를 취해준다. 강인한 외모만큼 성격도 활달하고 마음씨 고운 아가씨이다.     


- 모닝 세트와 모닝커피로 -    


갤리브랜드 강(Gellibrand River)에 도착했다. 강물이 느린 속도로 유유히 흐르고 있다. 누런 억새와 어우러진 강의 풍경이 무척이나 평화롭다. 갤리브랜드 강을 끼고 프린스 타운 마을이 아담하게 자리 잡고 있다. 마을 이래 봐야 몇 가구 되지 않는 작은 시골 마을이다. 이곳에는 제법 넓은 공간에 캠핑을 할 수 있는 시설을 갖춘 사설 캠핑장이 있다. 지금은 비수기라 문을 닫은 상다.    

 

다리를 건넌다. 건너편에 아저씨 한 분이 낚시를 즐기고 있다. 다가가 혹시 카페나 식당이 어디 있는지 아느냐고 물어보니 자기도 이곳이 처음이라며 난감해한다. 대략 방향을 잡고 식당의 위치를 가늠해본다. 표지판이라도 세워두지. 지도를 가지고 있었다면 바로 확인이 가능했을 터인데 그만 짐차에 놔두고 와버렸다. 기억에 의존해 저 집일 것 같은 데 하며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데 이장님이 마크와 통화를 한 후 그 집이 맞다고 확인을 해준다.    

식당은 뒤에서 본 것과는 달리 전면은 도로에 붙어있고 주유소도 겸하고 있었다. 차량을 이용하는 사람들이 오며 가며 식사도 하고 주유도 하는 모양이다. 식당은 연중무휴로 운영되며 아침 7시부터 영업을 시작한다고 한다.

식당 안쪽에 여럿이 함께 식사를 할 수 있는 큰 식탁이 마련되어 있다. 우리는 토스트와 계란 프라이, 소시지 등으로 이루어진 아침 세트 메뉴와 커피를 주문해서 먹었다. 단장님이 빵이 너무 탔다며 새로 다시 구워 달라 신다. 험상궂은 얼굴과는 달리 주인아주머니는 얼굴에 미소를 가득 지으며 두말 않고 빵을 새로 구워주셨다. 사람은 외모만 가지고 평가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또 배운다.    

식당 안으로 멋진 커플 한 쌍이 들어왔다. 패션이 스타일리시하다. 단체사진을 좀 찍어달라고 부탁하면서 몇 마디 말을 붙여보았다. 이탈리아에서 막 결혼하고 신혼여행을 떠나왔다고 한다. 차를 렌트해서 여행 중인데 이제 멜버른을 거쳐 시드니로 갈 예정이라고. 남자가 영화배우 뺨치게 잘 생겼다. 혹시 영화배우냐며 핸섬하다고 추켜세우니 옆에 있는 신부의 입이 귀에 걸린다. 서로의 행운을 빌어주고 작별 인사를 나누었다.   

  

- 복 받은 사람들 -    


한결같은 마음은 가능할지 모르지만 한결같은 젊음은 가능하지 않다. 우리는 모두 자연의 법칙에 따라 늙어간다. 삶은 유한하다. 이 값진 시간을 어떻게 써야 할까? 이제 목적지인 12 사도 바위까지 남은 거리는 7 km. 새벽에 속도를 내서 걸은 덕에 짧지 않은 거리를 단숨에 해치웠다.   

  

그레이트 오션 워크는 이제부터가 하이라이트이다. 지금부터는 천천히 걸으며 마음에 여유를 가지고 주변 풍광을 음미할 생각이다. ‘트레킹의 마지막 대미를 멋지게 장식하자.’ 한 발 한 발 내딛는 발걸음이 진중하다. 마치 아이가 막대사탕을 단박에 깨 먹지 않고 아끼면서 야금야금 빨아먹듯, 사부작사부작 발걸음을 옮긴다.  

숲길을 걷다가 바닷길로 접어들자 드디어 저 멀리에 12 사도 바위가 보이기 시작했다. 아, 얼마나 만나고 싶던 그대들인가! 드디어 만나게 되는구나! 가슴이 흥분으로 벅차오른다. 천국을 향하는 순례자가 되어 한 발씩 12 사도 바위를 향해 나아간다. 한 발짝 다가갈 때마다 풍경이 한 배율씩 확대된다. 바다에 우뚝 선 거대한 바위를 바라보노라니 굳이 신심을 들먹이지 않더라도 어떤 거룩한 성스러움이 저절로 마음에 스며든다.     

‘그레이트 오션 워크, 빅토리아의 상징’ 전망대에 도착했다. 12 사도 바위가 가장 잘 보이는 포인트에 나무 데크로 근사한 전망대를 만들어 놓았다. 떠나오기 전 많은 사람들이 이곳에서 찍어 올린 인증 사진들을 보고 또 보았었다. 우리도 멋진 자세로 추억 한 장씩을 남겼다.

당일 패키지 투어를 하는 사람들은 이곳 전망대에서 12 사도 바위까지 1시간 정도 걷는 트레킹  프로그램에 참여하기도 한다. 날이 흐리고 비가 오면 전망이 잘 안 보인다는데 오늘은 날씨가 기가 막히게 좋다. 결정적인 풍경을 보게 되는 마지막 날 이리도 좋은 날씨라니. 우리는 참으로 복 받은 사람들이다.        

   

- 이대로 며칠 더 걷고 싶다 -   

 

깁슨 스텝(Gibson Steps)에 도착했다. 깁슨 스텝은 깎아지른 절벽으로 둘러싸인 해변으로 계단을 걸어 한참 아래로 내려가야 한다. 이렇게 계단을 걸어야 하기에 ‘스텝’이라고 이름 했나? 기묘한 형상의 바위와 절벽이 압도적인 풍광을 빚어낸다. 파도가 일으키는 거대한 물보라가 장관이다.     

깁슨 스텝에서 비지터 센터까지 남은 거리는 1.2 km. 순례자처럼 느리고 거룩한 걸음을 옮겨서 마침내 목표했던 오후 1시에 목적지 12 사도 비지터 센터(Twelve Apostles Visitor Center)에 무사히 당도했다. 104 km 걷기 여행의 대장정이 드디어 끝이 났다. 그런데 너무나 덤덤하다.  긴 트레킹을 마치면 느끼던 벅찬 감격이나 포효의 몸짓이 없다. 오히려 몸과 마음이 현재 진행형이다. 이대로 며칠 더 걸어도 좋을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아마도 짐에 대한 부담 없이 편하게 걷기 여행을 했기 때문 아닐까? 배낭을 무겁게 메고 거친 길을 오르내리며 고생을 했다면 마지막 순간 끝장을 본 시원함에 온 몸이 전율했을 텐데...     


- 축제의 시간 -    


이제 축제의 시간이다. 12 사도 바위 전망대를 향한다. 비지터 센터에서 전망대까지는 왕복 20분 정도의 거리. 멋진 12 사도(현재 바위 4개는 쓰러지고 8개만 남아있다고 한다)를 배경으로 기념사진을 찍었다. 바람과 파도와 시간이 빚어낸 자연의 걸작이다. 수천 만 년, 수 억 년 세월의 시간이 바위에 새겨져 있다. 고작 칠십 년, 팔십 년을 살다가는 우리네 인생은 거기에 대면 얼마나 허황한가? 안달복달하지 말고, 살아있는 동안 즐겁고 보람되게, 알차고 행복하게  인생을 살 일이다.     

12 사도 바위 관광을 마치고 간단히 요기를 한 후 2시에 픽업 기사님을 만났다. 짐들은 이미 워크 91의 로벤으로부터 인계받은 상태였다. 짐 정리를 다시 한 후 멜버른으로 바로 돌아가지 않고 서쪽으로 6km쯤 떨어져 있는 명승지를 찾아갔다. 면도날 등(Razorback)과 로크 아드 조지(Loch Ard Gorge)라는 곳이다. 레이저 백은 왜 그런 이름이 붙었는지 알만했다. 면도날처럼 바짝 선, 깎아지른 바위가 절경이다. 로크 아드 조지도 협곡과 종유석 절벽이 멋진 풍경을 자아냈다. 마지막 피날레를 공중부양 샷으로 장식하고 우리의 호주 그레이트 오션 워크 대장정을 여기서 마무리했다.     

장장 일 년에 걸친 기획과 사전조사, 일정 확정과 티켓팅, 세 차례의 예행연습과 출발 전 미팅 및 출정식. 그 모든 과정들이 오늘의 걷기 여행을 성공으로 이끈 밑받침이 되었다. 걷는 일은 숭고하다. 내 두발로 산과 들을 걸을 수 있음은 크나 큰 축복이다. 목숨이 붙어 있는 한 나는 걷고 또 걸을 것이다. 이제 지난 여행을 마무리하고 새로운 여행을 꿈꾼다. 내년에 걷게 될 스코틀랜드는 또 어떤 모습으로 우리를 반겨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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