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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산비 Nov 22. 2018

웨스트 하일랜드 웨이(WHW) 1

트레킹 1일 차 (7월 23일)


:  멀가이(Milngavie) - 드리멘(Drymen)  / 19km   

 

떠남과 만남, 그리고 돌아옴. 이것이 여행의 기본 얼개이다. 떠나기 위해서는 용기와 열정이 필요하다. 늙어서 안식이 필요한 나이가 되기 전까지는 줄기차게 떠남을 추구해야 한다. 노마디즘.

떠나면 만날 수 있다. 새로운 삶, 새로운 세계, 새로운 자아를.

만남 후에는 변화가 일어난다. 변화는 성숙과 발전을 불러온다. 자아를 끊임없이 성숙시켜나가는 것, 그것이 우리 삶의 과제이다. 삶은 여행이고, 여행이야말로 진정한 삶이다.    

  

첫날의 일정은 멀가이에서 드리멘(Drymen)까지 19km의 여정. 한 시간에 3km씩 걷는다고 쳐도 최소 6시간은 걸리는 거리다. 중간에 마땅한 숙소가 없어 대부분의 트레커들은 첫날의 일정을 드리멘까지 가서 마친다.

비행기가 글래스고 공항에 도착하는 시간이 12시 35분. 수속하고 공항 빠져나오면 오후 1시. 점심 먹고 이동하고 어쩌고 하면 트레킹은 결국 오후나 돼서 시작하는 수밖에 없다.     

첫날의 일정을 소화하기 위한 시간의 확보가 절실했다. 그래서 조금이라도 시간을 아끼기 위해 글래스고 공항에서 시내로 들어가지 않고 ‘멀가이’까지 바로 택시로 이동하는 방법을 선택했다. 6명이 한 대의 택시에 탈 수 있어 비용적으로도 크게 나쁘지 않은 선택이었다. 멀가이까지는 공항에서 택시로 20분 정도 걸렸고, 요금은 27파운드가 나왔다. 공항에서 시내로 나와 다시 기차로 이동했다면 한 시간 이 소요됐을 것이다.   

  

트레킹 일정을 짤 때 가장 먼저 고려했던 사항이 하루 걸어야 할 거리와 숙소의 위치였다. 일반적인 일정은 154km의 거리를 7박 8일 동안 나누어 걷는 것이다. 때로는 6박 7일에 걷기도 한다. 우리는 그것을 5박 6일 동안 주파하려고 계획했고 결국 해냈다. 그 어려운 일을. 주어진 시간이 그뿐이니 거기에 맞추는 수밖에. 덕분에 하루 평균 27km 이상을 걸어야 했던 고된 트레킹이었지만 길게 걸은 것에 대한 불만은 없었다.

원 없이 걸으러 와서 실컷 걸었을 뿐.
단지 불타는 투지에 비례하는 불타는 통증이 있었다는 것, 두 발바닥에.     


- 순조로운 출발 -    


들머리인 멀가이에 도착하기까지 일정이 너무나 순조롭게 진행되어 우리도 스스로 놀랐다. 그동안은 여행 초반에 비행기가 연착된다던지, 짐이 도착되지 않는다던지 하는 예기치 못한 사건들이 벌어졌었다.

한 가지 사소한 불운이라면 들머리에 당연히 있어야 할 인포메이션 센터가 보이지 않았던 것. 그곳에서 여행을 기록하고 증명할 스탬프 북과 지도를 구입할 요량이었다.   

  

가이드북에도 분명하게 표시되어 있고, 사이토 마사키의 책에도 언급되어 있는 ‘웨스트 하일랜드 웨이 인포메이션 센터’는 현재 폐쇄된 상태다. 건물 일부만 ‘네일 숍’으로 임대 운영되고 있었다. 근처를 지나는 주민에게 물어보니 얼마 전까지도 운영되고 있었다며 자신도 이유를 모르겠다고. 지도가 필요하다고 하니 근처 도서관에 가서 복사를 하면 어떻겠냐고 하신다.

사실 ‘웨스트 하일랜드 웨이’는 이정표가 잘 되어 있어 지도가 없어도 길을 잃을 염려는 거의 없다.     

        

조그만 광장을 형성한 WHW의 들머리에는 길의 시작을 알리는 오벨리스크 모양의 탑이 하나 서있고, 긴 벤치 위에 커다란 현판이 걸려있었다. 그곳에서 각자 비장한 각오로 기념사진 한 장씩을 남겼다.

단체사진은 네덜란드에서 온 트레킹 팀에게 부탁을 했다. 이십대로 보이는 남자 셋, 여자 셋으로 구성된 혼성팀이다. 백패킹을 하려는지 커다란 배낭 밑에 발포 매트를 한 꾸러미씩 달고 있다. 먼저 출발했던 그들은 짐이 무거워서 그런지 초입부터 우리 뒤로 처지기 시작해 그 뒤로는 한 번도 마주치지 못했다.   

     

근처 마트에서 ‘미찌 기피제’를 구입하고 채비를 갖춘 후 바로 트레킹에 나섰다. ‘미찌’는 깔따구처럼 생긴 작은 날벌레로 떼로 몰려다니며 물기도 하고 피를 빨아먹는 성가신 놈들이다. 걸을 때는 잘 보이지 않다가 자리만 잡고 앉으면 어김없이 몰려들었다. 후기 글들에 이놈들의 악명이 자자했다.     

광장을 벗어나면 보도 터널 하나를 지나 바로 알렌더 공원(Allander Park)으로 길이 이어진다. 공원에는 반려견의 나라 영국답게 개를 끌고 가족 단위로 산책 나온 사람들이 많았다. 개의 품종도 다양해서 키가 작은 비글, 테리어 종부터 키가 늘씬하고 덩치가 큰 녀석들까지 각양각색이었다. ‘웨스트 하일랜드 화이트 테리어’는 스코틀랜드 고유의 견종으로 유명하다.    


- 비로소 바람의 나라에 와 있음을 -    


평탄하게 이어지던 길은 머독 숲(Mugdock Wood)을 지나고 곧 크레이갈리안 호수(Craigallian Loch)에 다다른다. 잔잔한 호수 위에 떠 있는 한 척의 조각배가 무척 평화롭다.

호숫가에는 스코틀랜드의 국화인 엉겅퀴 꽃이 군락을 이루고 있다. 엉겅퀴는 척박한 환경을 강인하게 이겨내는 스코틀랜드인의 기상이 담긴 꽃이다. 웨스트 하일랜드 웨이(WHW)의 상징마크도 이 엉겅퀴 꽃을 도식화한 것이다.     

잠시 도로와 맞닿았던 길은 이내 목장 안으로 이어진다. 목장을 들고 날 때는 반드시 문의 개폐를 확인해야 한다. 문을 열 때는 머리와 힘을 써야 하지만 닫는 것은 힘을 가하지 않아도 자동으로 닫히게 되어 있다. 별 것 아닌 듯 보이지만 창의적인 아이디어가 내장된 기발한 장치다.

목장을 빠져나가기 전에 몇 그루의 나무가 우거진 돌무덤에서 잠시 휴식을 취했다. 불어오는 바람이 시원하다 못해 서늘하다. 비로소 바람의 나라 스코틀랜드에 와 있음을 실감한다.     

탁 트인 전망의 초원길을 지난다. 이 길은 최근에 만들어진 존 뮤어 웨이(John Muir Way)와도 겹치는 구간이다. 존 뮤어는 미국 국립공원의 아버지로 추앙받는 인물로 미국 서부 시에라 산맥에는 그의 업적을 기리는 ‘존 뮤어 트레일’이 조성되어 있다. 11살 때 미국으로 이민 온 ‘존 뮤어’의 고향이 바로 이곳 스코틀랜드이다.

그가 태어난 스코틀랜드 동쪽의 던바어(Dunbar)에서 서쪽 끝의 헬렌스버그(Helensburgh)까지 해안에서 해안으로(Cost to cost) 조성된 트레일이 ‘존 뮤어 웨이(JMW)’이다. 이 구간의 이정표에는 WHW 엉겅퀴 마크와 JMW 존 뮤어 마크가 함께 찍혀있다.   

  

- 여민락, 여민행 -    


양들이 한가로이 풀을 뜯는 목가적인 풍경이 한동안 펼쳐진다. 푸른 초원 위에 그림 같은 집들이 띄엄띄엄 서있을 뿐 길은 계속 곧고 평탄하다. 이런 길이라면 한 시간에 4km도 걸을 수 있을 듯하다. 그래서인지 가이드북에는 19km 소요시간을 4시간에서 5시간으로 표기하고 있다.

얼마 안 가 글렌고네 위스키 증류소(Glengoyne Distillery)로 갈라지는 이정표가 나타났다. 와인 양조장은 와이너리(Winery), 맥주 양조장은 브루어리(Brewery)라고 부르고 위스키를 증류해서 생산하는 곳은 디스틸러리(Distillery)라고 한다. 스카치위스키의 종주국답게 스코틀랜드에는 곳곳에 유명한 디스틸러리들이 있어 방문해서 견학하고 시음할 수 있다.   

  

길을 나선 지 두 시간쯤 지났을까? 시간을 아낀다고 점심을 건너뛰고 출발한 탓에 배가 출출하던 참에 잠시 쉬어 갈 수 있는 산장(Beech tree Inn)을 만났다. 목적지인 드리멘까지 길 위의 유일한 휴게소 쉼터이다. 아침에 출발한 트레커들은 보통 이곳에서 점심을 해결한다. 일요일이라 혹시 영업을 하지 않으면 어떡하나 걱정했지만, 다행히도 이미 몇몇 손님들이 자리를 차지한 채 맥주를 마시고 있었다.     

우리도 시원한 야외 테이블에 자리를 잡았다. 요기도 할 겸, 영국의 대표 서민음식 ‘피시엔 칩스’를 시키고 맥주는 스코틀랜드를 대표하는 라거 맥주 ‘테넌트’를 선택했다. 피시도 맛있고 칩스도 맛있다. 맥주는 더할 나위 없이 시원하다. 걷는 중간에 시원한 맥주 한 잔을 할 수 있음은 지친 도보 여행자에게 큰 축복이고 행복이다.  

   

첫날 길을 나서며 바짝 긴장하고 날 섰던 마음이 서로 건배하며 부딪치는 맥주 한잔에 스르르 풀어지고 만다. 잔을 높이 들고 미소 가득한 얼굴로 서로의 눈빛을 교환한다. 이것이 함께 하는 여행의 즐거움이다.

진정한 즐거움이란 독락이 아니라 여러 사람과 함께하는 ‘여민락’이어야 한다고 맹자는 말했다. 더불어 즐기는 것. 좋은 것을 나 혼자만 알기보다는 함께 즐길 수 있게 개방하는 것. 나 혼자만을 위함이 아닌, 보다 많은 사람들이 함께 행복할 수 있는 길을 찾는 것, 그것이 ‘여민락’이고 ‘여민행’이다.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웨스트 하일랜드 웨이’의 여정을 표시한 장식 앞에서 트레킹의 무사 완주를 기원하며 다리를 들고 재밌는 퍼포먼스를 벌여본다. 이제부터가 본격적인 걷기 여행의 시작이다.

힘차게 길을 걷다가 눈을 들면 파란 하늘과 녹색 언덕의 향연이다. 양과 소가 어우러진 푸른 초장은 전형적인 영국의 시골 풍경이다.   

  

양의 종류도 각각이고 소의 종류도 다양하다. 뿔 있는 양, 없는 양, 흰 얼굴, 검은 얼굴, 흰 소, 검은 소, 얼룩소. 길은 분명하고 발걸음은 가볍다. 날이 저물고 있지만 큰 걱정은 없다. 서머 타임제를 실시하고 있는 영국의 여름은 밤 9시가 넘어서까지도 랜턴이 필요 없을 정도로 환하다.     


- 멸치가 씹히는 피자 -    


황혼이 지고 어둠이 엷게 내려앉을 즈음 드리멘(Drymen)에 도착했다. 드리멘은 호텔, 마트, 학교가 있고 노선버스가 다니는 인근에서는 제법 큰 마을이다. 메인 루트를 살짝 벗어나서 도로를 따라 십 여분 안으로 걸어 들어가야 마을이 다.

우리가 오늘 묵을 B&B 숙소, kip in the kirk에는 저녁 8시에 도착했다. 직역하면 ‘교회에서의 잠’이라는 말로 예전 교회로 쓰였던 건물을 개조해서 만든 숙소란다. 1층에는 욕실을 갖춘 몇 개의 작은 방이, 2층에는 10명이 함께 쓰는 큰 방이 있다.     

우리가 사용할 큰 방에는 미국에서 온 아가씨 한 명이 이미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캐서린’이라는 이름의 이 아가씨는 이틀째와 삼일 째에도 우리와 같은 숙소를 이용하는 인연을 이어갔다. 미국에서 에딘버러에 홀로 유학 와 있는 당찬 대학생이다. 방학을 이용해서 웨스트 하일랜드 웨이 트레킹에 나섰다고. 용기가 가상하다.     

여장을 풀고 샤워를 마친 후 저녁을 먹기 위해 마을 광장으로 나갔다. 친절하게도 숙소의 여주인이 예약을 미리 해주어 쉽게 식당 자리를 잡을 수 있었다. 다른 가게들은 일찍 문을 닫지만 ‘클라칸 인(Clachan Inn)’ 레스토랑은 늦게까지도 영업을 했다.

샐러드와 파스타, 피자를 시키고 와인을 곁들여 트레킹 첫날밤을 자축했다. 다른 음식들은 맛있었지만 단지 메뉴판 맨 위에 있다는 이유로 주문한 ‘클래식 마리나라’ 피자는 완전 실패였다. 엔초비로 토핑한 피자로 멸치가 씹히고 짠맛이 났다. 이런 피자는 태어나서 처음 먹어본다.   

  

숙소로 돌아왔지만 바로 잠자리에 들지 못하고 숙소 현관 앞 테이블에 다시 모였다. 수면 유도를 핑계로 동네 마트에서 사 온 위스키를 홀짝인다. 먼 이국 낯선 땅에서 마시는 오리지널 스카치위스키. 밤의 정적을 가르며 꼬륵꼬륵 위스키가 목젖을 타고 넘어간다. 식도가 타는 듯했다. 아! 스카치위스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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