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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산비 Nov 23. 2018

웨스트 하일랜드 웨이(WHW) 2

트레킹 2일 차 (7월 24일)

: 드리멘 - 발마하(Balmaha) - 로워데난(Rowardennan)  / 22km    


하루는 매일 반복되지만 늘 같은 하루가 아니다. 매번 속도와 방향을 달리하며 새롭게 밀려오는 파도와 같다. 새로 온 파도의 방향을 잘 읽어서 타고 넘어야 오늘 하루를 넘어지지 않고  버틸 수 있다. 파도를 많이 타면 서핑 실력이 늘 듯이 여행을 많이 하면 삶을 성찰하는 ‘삶력’이 늘게 된다.   

  

아침 햇살이 눈부시다. 기분 좋게 시작하는 아침이다. 스코틀랜드에는 이렇게 화창한 날이 많지 않다던데 우리는 복 받은 사람들이다. 여행 오기 전에 날씨에 대한 걱정을 많이 했었다. 스코틀랜드의 날씨는 ‘비가 오고 있거나’ 혹은 ‘비가 올 예정이거나’ 둘 밖에 없다지 않은가. 비에 대한 대비를 단단히 하고 왔다. 일부러 비 오는 날을 택해 우중 산행 연습을 하기도 했다. 그런데 연일 찬란한 햇빛이라니.    


- 비밀의 숲을 거닐다 -   

 

구민체육센터 조기 건강교실. 아침 운동으로 일찍 일어나는 것이 습관이 되어 있는 우리들. 누적된 피로에도 불구하고 모두 새벽에 일어나 동네 산책에 나섰다. 마을이 아담하고 정갈하다. 마당의 잔디며 나무와 화초들이 잘 다듬어져 있다. 집주인의 정성 어린 손길이 느껴진다. 이런 집에서 한번 살아보고 싶다.     

마을 어귀에서 예쁜 공원을 발견했다. 규모는 크지 않지만 나무가 제법 우거져 숲을 이루고 있다. 숲 속에 한 발 들여놓으니 동화 속 한 장면으로 살금살금 걸어 들어가는 기분이 든다. ‘혹시 이 숲 속에 ‘피터 래빗’이 살고 있는 것은 아닐까?’ 유쾌한 상상을 하며 동화 속 토끼가 되어 비밀의 숲 속을 거닐었다.    


아침은 시리얼 몇 가지와 베이글을 포함한 몇 종류의 빵으로 해결한다. 에그, 주스, 우유, 커피와 함께 딸기잼과 피넛버터, 피클도 제공되었다. 주인장이 직접 만들었다는 오렌지 마멀레이드의 맛이 아주 일품이다.

    

아침을 먹고 가벼운 몸과 마음으로 2일 차 트레킹에 나섰다. 오늘 하루 걸어야 할 거리는 22km. 물론 긴 거리지만 30km를 걸어야 하는 다른 날들에 비해서는 상대적으로 짧은 편이다.

오늘 트레킹의 하이라이트는 361m 높이의 코닉 힐(Conic Hill). 정상에 오르면  국립공원인 로몬드 호수(Loch Romond)의 멋진 절경을 감상할 수 있다.      


- 제주의 오름을 닮은, 남해의 다도해를 닮은 -  

  

드리멘 마을을 벗어나서 다시 웨스트 하일랜드 웨이(WHW) 본 루트에 합류했다. 비슷한 시간에 출발한 트레커들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줄을 잇는다. 이곳은 영국 현지인들뿐만 아니라 여름 성수기에는 세계 각지에서 많은 트레커들이 찾아온다.

마침 가족으로 보이는 한 무리의 사람들과 나란히 걷게 되었다. 부부로 보이는 나이 든 커플은 부부가 아니라 오누이 사이라고 했다. 여동생과 여동생의 딸 그러니까 조카 그리고 처제가 한 팀을 이루었다.  

   

턱수염이 수북한 제이크는 놀랍게도 삼십 년 전에 2년간 주한미군으로 한국에서 근무한 적이 있다고 한다. 좋아하는 한국 음식이 있냐고 물었더니 불고기와 비빔밥을 대며 엄지 척한다.

조카 아가씨는 고등학교 졸업반이란다. 무엇을 전공할 것인지 진로를 정했냐고, 미래에 어떤 직업을 가지고 싶은지 물었더니 수줍게 웃음 지으며 생물학을 전공하고 싶단다. 엄마는 그런 딸이 사랑스러운지 뒤에서 배시시 미소를 짓는다.    

 

정말 걷기 좋은 길이다. 신 단장님과 김 교수님은 신발까지 벗으셨다. 발바닥에 지압이 돼서 좋다나. 하늘은 푸르고 초원은 싱그럽다. 넓은 들판에 봉긋 솟아있는 녹색 구릉들은 제주의 오름을 연상시킨다. 오전 반나절은 이렇게 너른 초원지대를 계속 걸었다.     

한참 그렇게 걷다 보니 눈앞에 코닉 힐(Conic Hill)이 등장하고 왼쪽으로 로몬드 호수(Loch Romond)가 보이기 시작했다. 계속 편평한 길만 걷다가 처음으로 올라 쳐야 하는 산이 나타났지만 그리 위압적이지는 않았다. 산 뒤쪽으로 완만한 경사를 따라 좋은 길이 나있어 힘들이지 않고 오를 수 있다. 마지막 정상부는 갔던 길을 되돌아 나와야 해서 배낭을 벗어두고 몸만 다녀오기로 했다.    

코닉 힐에는 트레커들 외에도 코닉 힐만을 목적으로 온 관광객들이 많아서 제법 북적였다. 정상에 올라서니 저절로 탄성이 터진다. 호수인지 바다인지 모를 커다란 로몬드 호수가 발밑에 펼쳐진다. 장관이다. 점점이 떠 있는 섬들이 마치 한려해상 다도해를 연상시킨다. 그중에는 한반도 지도 모양의 섬도 있어 이채롭다.

언덕 위에는 연인들, 젊은이들, 가족들이 군데군데 자리를 잡고 앉아 일광욕을 즐기고 있다. 무척 평화로운 모습이다. 우리도 자리를 잡고 앉아 오랜만의 여유를 즐겼다. 전체 트레킹 여정 중 가장 여유로웠던 한 때가 아닌가 싶다.

    

- 강처럼 긴 호수 -    


이제 하산이다. 내려가는 길에 스코티쉬 아줌마들을 만나 몇 마디 이야기를 나누었다. 고향이 이곳인 원조 스코틀랜드 아줌마들이다. 둘이 자매라는데 모두 교사 신분이었다. 언니는 고등학교 화학 선생님이고 동생은 초등학교 선생님이라고 한다.

여행에 대한 이야기와 스코틀랜드의 음식에 대한 이야기를 주로 했다. 반드시 ‘하기스’를 먹어봐야 한다고 강조한다. ‘하기스’는 아기 기저귀가 아니고 소와 돼지의 내장을 갈아서 오트밀에 섞고 다져서 삶은 스코틀랜드 전통음식이다. 우리나라의 순대와 비슷한 맛이 나고 햄버거 패티 같은 질감이 느껴진다.     

하산 길은 울창한 낙엽송 숲길이다. 콧노래가 절로 나오는 기분 좋은 길이다. 숲을 빠져나오자 얼마 안 가서 국립공원 비지터 센터가 보이고 이어서 조그만 마트와 식당 Oak Tree Inn이 나타났다. 이곳이 점심을 먹을 발마하(Balmaha) 마을이다.

로먼드 호수와 코닉 힐을 끼고 있는 휴양 도시답게 주차장에는 차들이 꽉 차있고 식당도 사람들로 무척 붐볐다. 우리도 식당 한쪽 야외 테이블에 자리를 잡고 앉아 기네스 흑맥주와 점심을 주문했다. 이미 들었던 명성대로 음식들이 모두 풍성하고 맛이 있다. 맛집 인정!    

 

호수를 따라 길게 길이 이어진다. 호수가 하도 길어 호수가 아니라 강처럼 느껴진다. 몇 시간을 걸어도 계속 호수를 끼고 걷는 길이다. 호수 군데군데 모래가 좋은 곳은 사람들이 자리를 깔고 누워 일광욕을 즐긴다. 우리처럼 파라솔을 치고 양산을 펴서 해를 가리는 일은 없다. 햇볕을 사랑하는 사람들이다. 우리도 로몬드 호수에 발을 담그고 잠시 쉬면서 한가로운 오후의 한 때를 즐겼다.    

 


- 국제 미아가 될 뻔 -    


오후 햇살이 긴 그림자를 만들어낸다. 목표 지점을 앞두고 숙소를 향하는 발걸음이 서서히 빨라진다. 빨리 도착하면 빨리 씻을 수 있다. 대열이 자연스럽게 선두 그룹과 후미 그룹으로 나뉜다. 체력이 우수한 주택 씨가 맨 앞이고 그 뒤로 김 교수님과 이 회장님이 선두 그룹을 형성했다. 그 뒤로 신 단장님이 중간 그리고 나총이 후미로 쳐진다.     

얼마나 걸었을까? 조금씩 지쳐갈 무렵, 숙소로 보이는 건물을 발견하고 기뻐하였으나 그것은 우리 숙소가 아니고 로워데난 호텔(Hotel)이었다. 우리가 오늘 묵을 로워데난 유스 호스텔(Rowardennan Lodge Youth Hostel)은 호텔을 지나고도 한참을 더 걸어야 했다. 호텔 야외 바에는 이미 트레킹을 마친 사람들이 담소를 나누며 맥주를 마시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고 숙소에 빨리 도착하고 싶은 마음이 더 급해졌다.   

  

무거워진 발을 겨우 끌고서 마침내 유스 호스텔로 들어서는데 김 교수님이 걱정된 눈빛으로 단장님을 보았는지 물으신다. 앞에 먼저 가신 분이 아직 도착을 안 하셨다는 거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이지. “아니 같이 가시지 않았나요?”

유스 호스텔은 메인 도로에서 샛길로 갈라져 들어와야 하는데 아마도 단장님은 그 표지판을 보지 못 하시고 그대로 지나치신 듯했다. 나중에 이야기를 들어보니 다른 트레커들이 쭉 지나가기에 그들과 같이 섞여서 그대로 직진하셨다고. 잘못했으면 국제 미아가 되실 뻔했다. 찾아 나섰던 교수님이 단장님을 보필해서 위풍당당하게 숙소로 돌아오셨다. 반가운 탄성과 함께 안도의 한숨을 내쉰다.   

 

숙소에 여장을 풀고 모두 식당으로 모였다. 호숫가에 자리 잡은 유스호스텔은 외관이 고풍스럽고 실내 주방 설비도 잘 갖춰져 있었다.

오늘의 저녁 메뉴는 ‘소야 스파게티’ 소시지와 버섯, 야채를 곁들인 특제 스파게티다. 찰떡궁합인 주택 씨와 콤비를 이뤄 맛있는 파스타를 만들어냈다. 맥주를 곁들여 둘째 날의 트레킹을 자축한다.

    

저녁을 먹고는 호숫가로 나와 시원한 바람을 맞으며 호스텔 앞 정원을 거닐었다. 적당히 취기가 오른 탓에 연신 깔깔 껄껄 웃음꽃이 만발한다. 아름다운 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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