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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산비 Nov 30. 2018

웨스트 하일랜드 웨이(WHW) 3

트레킹 3일 차 (7월 25일)


: 로워데난 - 인버스네이드(Inversnaid) - 인버라난(Inverarnan)

 - 크리안라리크(Crianlarich) / 31km    


삶은 일치와 불일치, 안정과 불안정의 순환이다. 익숙한 환경에서는 발전을 이룰 수가 없다. 변화하고 역동적인 환경에서 배움의 기회가 찾아온다. 우리가 여행을 떠나는 것도 불안한 환경으로 나를 내몰아 새로운 깨달음과 도약의 기회를 얻고자 함이다. 여행 전의 불안과 설렘, 여행 중의 역경과 성취, 여행 후의 반성과 여운이 나를 한 단계 더 성숙시킨다. 우리가 여행을 자주 가야 하는 이유이다.       

 

오늘 걸어야 할 거리는 무려 31km. 이번 트레킹 중 가장 길게 걷는 날이다. 새벽 5시에 기상해서 출발을 서둘렀다. B&B에서는 조식이 제공되지만 유스 호스텔은 잠자리만 제공되므로 아침을 직접 차려먹어야 한다. 하얀 쌀밥과 즉석 북어 미역국으로 아침을 해결했다.

짐을 정리한 후 카운터에서 런치 박스를 받아 들고 7시쯤 숙소를 나섰다. 런치 박스는 점심시간을 절약하기 위한 비장의 전략이다.  이곳 대부분의 B&B나 로지 등의 숙소에서는 전날 미리 예약을 해두면 런치 박스를 꾸려준다.     

하늘에 구름이 가득하지만 비는 내리지 않고 있다. 처음에는 날씨가 좋기만을 간절히 기도했었다. 이제는 은근히 비가 기다려진다.
‘스코틀랜드, 너의 비 맛을 보고 싶단 말이야!’ 한편으로는 좋은 날씨에 감사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비를 기대하는 이 알다가도 모를 이중심리란.     

로워데난은 큰 마을은 아니지만 가까이 벤 로몬드(Ben Lomond, 974m)라는 멋진 산을 끼고 있어 코티지(Cottage), 벙크 하우스(Bunkhouse) 같은 여러 형태의 숙소들이 자리하고 있다. 처음에 트레킹 계획을 세울 때 로몬드 산에 한 번 올라갔다 오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했었다. 그러나 갈 길이 멀다. 그럴 여유가 없다.     


- 캠핑이 자유로운 나라 -    


개울이 흐르는 곳에 각이 잘 잡힌 텐트가 보인다. 야영을 하는 모양이다. 스코틀랜드는 캠핑이 자유로운 나라다. 특별히 금지된 구역만 아니라면 어느 곳에서나 자유롭게 야영을 할 수 있다. 웨스트 하일랜드 웨이도 당연히 야영을 하면서 걸을 수 있는 길이다. 중간중간 샤워 시설을 갖춘 정규 캠핑장이 있으며, 캠핑장이 아니더라도 마음에 드는 곳이라면 아무데서나 ‘와일드 캠핑’을 즐길 수 있다. 그래서 처음에는 우리도 텐트를 가지고 야영을 하면서 걸을까 생각했었다. 그러나 두 가지 문제에 부딪혀서 백패킹에 대한 생각을 접고 말았다.     

첫 번째는 거리에 대한 부담이 있었다. 짐이 무거우면 오래 걸을 수가 없다. 아니 걸을 수는 있지만 엄청난 체력소모를 감당해야 한다. 그동안 5박 6일 야영을 하며 걸었던 거리는 보통 100km 에서 120km 정도의 거리였다. 비박 짐을 메고 하루에 20킬로 이상 걷는 것은 무리다. 그런데 이번 트레킹은 일정상 하루 평균 27km, 어떤 날은 30km를 걸어야 한다.     

두 번째는 앞에서도 언급했던 미찌(midge)라는 날벌레에 대한 공포가 컸다. 자리만 잡고 앉으면 떼로 몰려들어 피를 빨아먹는 이놈들에 대한 소문이 아주 흉흉했다. 실제로 그렇게 대비했음에도 불구하고 엄청나게 물리고 말았다. 다녀온 지 보름이 지난 시점까지도 가려움증이 가라앉지 않아 괴로움을 겪었다. 아마 야영을 하며 걸었다면 벌집이 되지 않았을까 싶다.    


- 녹색의 향연 -     


쭉쭉 뻗어 오른 큰 삼나무 숲 사이로 길이 이어진다. 가이드북에는 이 구간이 난이도가 쉬운 숲길과 거칠고 위험한 호수 길로 나누어진다고 되어있다. 우리는 별다른 이정표를 발견하지 못하고 자연스럽게 숲길로 접어들었다. 갈림길 표지판을 발견하였더라도 아마 고민 없이 Easy Normal Route를 선택했을 것이다.     

숲이 깊고 짙다. 태곳적 원시림을 방불케 하는 녹색의 향연이다. 빛이 스미는 곳은 밝은 연두부터 진한 녹색까지 아주 다채로운 스펙트럼을 보여준다. 나무가 우거져 빛이 닿지 않는 곳은 대낮임에도 불구하고 유령이 나올 것처럼 어두컴컴하다.

인공적으로 만든 빛은 날카롭고 불편하지만 자연이 빚은 빛은 부드럽고 편안하다. 우리가 녹색 숲에서 평화와 안식을 느끼는 연유이다.      

자연이 펼치는 빛의 향연을 누릴 줄 알아야 한다. 새벽 운무를 뚫고 비치는 황금빛 아침 햇살. 시시각각 변화하는 빛의 파노라마. 붉은 노을 사이로 검은 어둠이 갈마드는 황혼 녘의 고적함. 파리한 달빛, 영롱한 별빛. 파란 하늘, 하얀 구름. 초록 잎사귀, 빨간 꽃잎.

아! 얼마나 아름다운 색채의 세상인가!     


- 긴 호수와의 작별 -   

 

길을 걷다 보면 도보 여행자들을 위해 음료와 쿠키, 과일 등을 마련해 놓은 곳이 있다. 필요한 사람들은 이용하고 양심껏 기부 박스에 돈을 넣으면 된다.

계속해서 걷기 좋은 길이 이어진다. 제법 빠른 속도로 거침없이 길을 걸었다. 힘찬 물소리를 내며 떨어지는 근사한 폭포와 작은 개울 하나를 건너니 인버스네이드 호텔(Inversnaid Hotel)이다. 먼저 도착한 대원들이 이미 맥주를 시켜놓았다. 땀 흘린 후의 갈증엔 맥주가 답이다. 마침 목이 칼칼하던 차에 시원한 맥주가 목마름을 풀어준다.    

여전히 길은 호수를 따라 이어진다. 이쯤 되면 이게 강인지 호수인지 분간이 안 된다. 며칠째 계속 호수를 따라 길을 걷고 있다. 정말 강처럼 긴 호수이다.

배꼽시계가  알람을 울린다. 점심을 먹기위해 호숫가 조용한 호안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준비해 온 런치 박스를 손에 들고 멋진 호수를 감상하 간단히 점심을 해결했다.

점심을 먹은 후, 팀을 둘로 나누었다. 그동안 보여준 트레킹 성적표에 기초해서 주력이 좋은 세 명의 대원을 선발대로 배정했다. 선발대에게는 한 가지 미션이 주어졌다. 오늘 밤 지낼 크리안라리크(Crianlarich)라는 마을에 있는 마트는 저녁 6시면 문을 닫는다. 그전에 도착해서 필요한 부식들을 구입해둘 것.    

 

선발대를 먼저 보내고 남은 대원들은 느긋한 마음이 되어 트레킹을 즐겼다. 경치 좋은 곳에서는 잠시 쉬어가기도 하면서. 아마 선발대는 미션을 완수해야 하는 책임이 있어 정신없이 걸었을 것이다. 드디어 호수의 끝자락에 도달했다. 건너편 마을인 아르두이(Ardlui)는 마트와 호텔이 있고 버스와 기차가 지나는 교통의 요지다. 그곳에서 트레킹을 끝내고 글래스고로 돌아가는 경우도 많다고 한다. 호수가 보이는 마지막 전망 포인트에서 로몬드 호수에 작별을 고했다. 며칠 함께 동행하면서 정이 들었던지 이제 등을 지고 돌아서려 하니 묘한 감정이 스민다.     


- 길이 있기에 -    


조그만 다리 하나를 건너자 바인글라스 팜(Beinglas Farm) 캠핑장이다. 트레일이 캠핑장을 관통해서 지나간다. 바인글래스 팜은 제법 규모가 큰 캠핑장이다. 맥주와 음식을 파는 매점도 있고 텐트를 칠 수 있는 캠핑 사이트 외에 간이 숙소인 오두막과 캠핑카도 여기저기 보였다.

이곳에서 왼쪽 도로를 지나 다리 하나를 건너면 인버라난(Inverarnan) 마을이다. 이 마을에는 지은 지 삼백 년도 넘었다는 산장(The Drovers Inn)이 있다. 여행 떠나오기 전에 TV에서 ‘드로버스 인’를 소개하는 장면을 봤다. 실내가 온통 괴기스러운 장식물로 꾸며져 있어 약간 으스스한 기분이 드는 곳이지만 재밌는 추억을 만들 수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었다. 꼭 들러보고 싶었지만 일정상 아쉽게도 그냥 지나친다.   

  

길이 끝없이 이어진다. 그 길이 그 길이라 이제 조금 지루한 마음도 든다. 몸이 지치니 마음도 지치는 걸까? 선발대를 보내 놓고 긴장이 풀린 탓일까? 발걸음이 느려지고 마음도 늘어진다. 사위는 고요하고 풍경은 여전히 평화롭다. 그저 묵묵히 걸을 뿐. 이제 서로 대화도 없다. 아무 생각이 없다. 적당한 간격을 유지한 채 그냥 한 발 한 발 내딛을 뿐. 사실 이 경지야말로 걷기 여행이 선물하는 마음 수양의 진수다. 다른 일체의 잡념이 없어지는 상태.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고 길은 길인. 묻지도 따지지도 말고 그냥 걸어가는 것. 발아래 길이 있기에 오직 걸을 뿐.

    

- 길에 대한 추억만 남아 -    


얼마나 그렇게 묵언 상태로 걸었을까? 도로 아래로 난 터널 하나를 지나자 난데없는 소떼들이 나타났다. 우리가 걸어갈 길을 가로막고 점점 가까이 다가온다. 들에서 풀을 뜯다가 이제 집으로 돌아가는 길인가 보다. 조심스럽게 옆으로 비껴 지나는데 덩치가 큰 녀석들이라 그런지 겉으로는 태연한 척해보지만 속으로는 약간의 긴장감과 무서움이 깃든다. 우리도 어서 오늘 밤을 보낼 숙소를 찾아가야 할 텐데...     

오후 햇살이 긴 그림자를 만들어내기 시작했다. 멀리서 기적 소리를 내며 기차가 지난다. 길게 쌓은 돌담에 녹색 이끼가 잔뜩 끼어 세월의 더께를 느끼게 한다. 결국 시간은 흐른다. 흘러가는 시간을 멈춰 세울 순 없다. 우리도 그렇게 서서히 늙어갈 것이다. 다만 우리가 걸었던 길에 대한 추억만 남아 우리를 행복에 젖게 해 줄 것이다.  

   

아침에 숙소를 나선 지 12시간이 지나고서야 크리안라리크로 빠지는 삼거리에 도착했다. 첫날처럼 마을로 들어가서 밤을 보내고 다음날 이곳으로 다시 돌아와 길을 이어가야 한다. 길목에 검은 얼굴의 양 한 마리가 우리를 마중 나와 있다. 서로 마주 보며 무언의 대화를 나눈다. “반갑다. 블랙 페이스!” “환영합니다. 웰컴!”     

 

마을길로 접어드는데 저 앞에서 주택 씨가 올라오고 있다. 선발대는 이미 5시 반에 도착해서 장을 보는 미션을 완수했다고 한다. 씻고 쉬다가 아무리 기다려도 후발대가 오지 않아 마중을 나오게 되었다고. 점심 먹고 헤어졌는데 두 시간이나 간격이 벌어졌다. 유스호스텔에 들어서니 시곗바늘은 저녁 8시를 가리키고 있다. 긴 하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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