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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산비 Dec 05. 2018

웨스트 하일랜드 웨이(WHW) 4

 트레킹 4일 차 (7월 26일)


: 크리안라리크 - 틴드럼(Tyndrum) - 인버로란(Inveroran) / 26km    


깨닫는 것만으로는 소용이 없다. 깨닫고 느낀 것을 삶의 현장에 적용해야 한다. 머리만 끄덕이지 말고, 가슴만 치지 말고, 팔을 걷어붙이고 두 발로 저벅저벅 걸어서 현장 속으로 들어가야 한다. 오늘도 나는 스코틀랜드의 광활한 들판 속으로 내 두 다리로, 내 두 발로 걸어 들어간다. 내가 깨달은 내 삶의 철학을 실천하기 위해...

            

아침 일찍 일어나 마을 산책에 나섰다. 작은 공원에 올라 마을을 조망하고 간단한 도수 체조로 몸을 풀어준다. 아침 스트레칭은 하루를 시작하는 어떤 의식과도 같은 행위다. 부상 방지를 위해서도 꼭 필요한 일이다. 사소하지만 중요한 일과다.    

  

- 드디어 비가 오다 -    


숙소로 돌아와 아침을 먹고 나갈 채비를 하는데 비가 오기 시작했다. ‘아! 드디어 비가 오는구나.’ 배낭을 커버로 씌우고 방수 바지와 고어 재킷을 챙겨 입었다. 방수 바지가 없으면 스패츠라도 차야 신발이 젖는 것을 막을 수 있다. 우중 트레킹 시에는 체온을 유지하고 신발을 젖지 않게 보호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일이다. 갈아입을 옷이 든 꾸러미는 젖지 않도록 비닐봉지로 한 번 더 단단히 싸맸다.

비가 오지만 구질구질한 느낌은 없다. 오히려 시원하고 상쾌했다. 장대처럼 쏟아지는 비가 아니고 적당히 맞을 만하게 비가 오고 있다. 가랑비는 운치가 있어 좋다. 이런 날씨를 참 좋아한다.

‘참으로 걷기 좋은 날이로다!’     

길은 고저차가 없이 완만하고 평탄했다. 울창한 숲을 빠져나오자 기찻길이 나타난다. 우리가 묵었던 크리안라리크 마을을 지나온 기차선로이다. 기찻길은 오래된 아치 형태의 돌다리가 고가처럼 받치고 있다. 영화 ‘해리포터’에도 이런 고가 돌다리 위로 증기기관차가 달리는 모습이 나온다.

웨스트 하일랜드 웨이의 종착지인 ‘포트 윌리엄’에는 관광용 증기기관차가 실제로 운행을 하고 있다. 영화 ‘해리포터’ 시리즈는 스코틀랜드의 서부에서 많은 장면을 촬영했다고 한다. 그 촬영지를 둘러보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일부러 이곳을 찾는다.   

     

- 김치전이 먹고 싶다 -     


필란 강(River Fillan)을 건너자 너른 목초지가 나타나고 목초지를 지나자 길은 다시 강을 따라 이어졌다. 다리를 건너 반대쪽으로 이어지던 길은 얼마 안 가 틴드럼(Tyndrum) 마을에 도달한다. 틴드럼 마을은 예전에 골드 러쉬(Scottish gold rush)가 있었을 때 번창했었던 적도 있었다고 하나, 지금은 그저 작은 마을일 뿐이다. 앞으로 이틀 정도는 부식을 조달할 수 있는 마트가 없으므로 필요한 물품들은 이곳 틴드럼에서 보급을 해야 한다.

    

조금 이른 시간이었지만 점심을 먹기로 했다. 신 단장님이 비가 오니 김치전이 먹고 싶다고 하신다. “안될 것도 없죠. 밀가루만 있으면...” 마트를 샅샅이 뒤져서 밀가루를 찾아냈다. 밀가루는 글루텐의 함량에 따라 강력분, 중력분, 박력분으로 나뉜다. 빵을 만들 때는 주로 강력분을 사용하고, 쿠키 같은 과자를 만들 때는 박력분을 쓴다. 면류나 부침개, 수제비를 할 때는 중력분이 좋지만 지금 이것저것 가릴 처지가 아니다.     

이번 트레킹은 세미 야영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잠은 숙소에서 자지만 식사는 조식이 포함된 몇 끼니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직접 만들어먹었다. 점심을 해 먹기 위해 비를 피할 수 있는 장소가 필요했다. 이리저리 마땅한 자리를 물색하다가 주차장 옆에 처마가 있는 창고 건물을 발견. 눈치를 살피다가 털썩 자리를 잡고 앉았다. 깨끗하게 정리하고 가면 될 일이다.    

오늘 점심의 메인 요리는 신라면이다. 라면을 끓이고 한쪽에서는 김치전을 부친다. 밀가루에 김치 한 봉지를 국물까지 아낌없이 다 쏟아붓고 물을 조금 넣어 반죽을 만들었다. 들러붙지 않게 프라이팬에 버터를 발라가며 김치전을 지져낸다. 비 오는 날 머나먼 타국 땅에서 부쳐 먹는 김치전이라니. 아~ 죽음이다.

김치전에 위스키 한 모금이 들어가니 금방 취기가 올라온다. 긴장이 풀리고 얼굴이 붉어진다. 비가 추적추적 내리니 술맛이 절로 났다. 비를 안주 삼아 한 잔, 김치전 한 입에 한 잔. 라면으로 속 풀며 한 잔. 술이 거나해진다. 이거 오후 트레킹을 진행할 수 있으려나.   

     

- 묵언으로 홀로 걷기 -   

    

삶에 질문을 던지기. 의문을 품기. 낯선 나의 모습을 만나기. 일상은 권태롭기 때문에 질문과 의문을 갖기 힘들다. 여행을 떠나서 낯선 곳에 서봐야 의문이 생긴다. 나는 왜 여기에 와 있는지? 왜 걷고 있는지? 저들은 왜 우리와 다른지? 홀로 걸으며 고독해져야 삶을 돌아보게 된다. 이제 어디로 가야 하는지? 무엇을 해야 하는지?   

  

오후 트레킹은 ‘묵언 홀로 걷기’ 프로그램을 실시하기로 했다. 항상 뭉쳐서 함께 걸었지만 이번엔 조용히 묵상하며 홀로 걷는 시간을 한 번 가져보면 어떨까 싶었다. 제일 걸음이 느린 사람부터 한 명씩 십분 간격으로 차례로 출발하는 방식이다.

맨 먼저 나총이 길을 나섰다. 그리고 십분 뒤에 내가. 나머지 사람들은 대기하다가 순서대로 한 명씩 출발하기로 했다. 신 단장님, 김 교수님, 이 회장님 순으로 그리고 마지막에 주택 씨. 그러면 첫 주자와 마지막 주자는 한 시간의 간격이 생길 것이다. 앞사람을 추월하게 되더라도 절대 말을 해서는 안 된다는 규칙을 정했다. 그냥 가볍게 눈웃음만 교환하기로. 물론 이 규정은 엄격하게 지켜지지 않고 몰래몰래 깨지기도 했지만.     

이 게임? 이 프로그램은 예상과 달리 엄청난 속도전으로 전개되었다. 앞에서는 따라 잡히지 않으려는, 뒤에서는 따라잡으려는 강력한 의지가 발동되었다. 서로를 견제하며 빠른 속보로 걷기가 진행된 끝에 나중에는 모두 함께 거의 동시에 숙소에 골인하는 결과를 낳았다. 나총이 끝까지 잡히기 않고 버틴 것은 정말 놀라운 일이었다. 위스키 빨을 받은 것일까? 지금 생각해도 미스터리하다. 오히려 나는 한 시간 만에 신 단장님에게 추월당하고 그리고 얼마 안 가서는 김 교수님에게도 추월당하고 말았다. “에구, 안녕히 가세요~~” “에구, 조심해서 가세요~~”    

     

여기서 나의 은사님이신 김 교수님의 활약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처음에는 “내가 할 수 있을까? 6일 동안 꼬박 걸을 수 있을까?” 걱정이 많으셨다. 오래전에 복합 골절을 입은 발목이 좋지 않았고 허리 디스크가 도져 고통스러워하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엄청난 의지와 열정으로 트레킹을 성공적으로 완주해내셨다. 이틀째에는 선발대로 활약하셨고, 삼일 째에도 일등으로 숙소에 도착했다. 마지막 날도 선두 주자로 골인 지점에 도착하셨다. 정말 대단한 쾌거이다.     

 

- 균형은 버티는 것 -    


기찻길을 따라 이어지던 길은 이제 알트 킹글래스(River Allt Kinglass) 강과 나란히 달린다. 비는 그쳤다 내리기를 반복하고 있다. 다행히 걷기에 지장을 줄만한 큰 비는 아니다. 오후 들면서 다리가 점점 무거워지기 시작했다. 속도를 내보지만 다리에 힘이 붙지 않는다. 발바닥의 통증이  자꾸만 신경을 거슬리게 한다. ‘얼마나 남았을까?’ 아직 주택 씨나 이 회장님의 모습은 보이지 않고 있다.    

 

자꾸만 흐트러지는 정신을 집중하고 균형을 잃지 않으려 안간힘을 썼다. 균형은 아무것도 안 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엄청난 에너지를 써가며 버티는 것이다. 간극이 클수록 견뎌야 하는 부하도 증가한다. 힘의 균형은 한순간 바늘 하나의 무게가 얹어지는 것만으로도 깨질 수 있다. 균형이 깨지면 중심은 한쪽으로 급격히 기울고 만다. 한 번 무너지기 시작하면 걷잡을 수 없다.     

돌다리 난간 위에 젊은 아가씨 둘이 앉아서 쉬고 있다. 그냥 눈인사만 나누고 길을 간다. 그런데 얼마 못 가서 그 두 아가씨가 어느새 나를 따라잡고 앞질러 간다. 본능적으로 붙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놓치지 말아야지.’ 그들은 나와 헬레나. 독일에서 온 학생들이었다. 둘이 쉴 새 없이 독일어로 대화를 나눈다. 나는 내 사정을 이야기하고 동료들이 이미 앞에 가고 있음을 설명했다. 더 뒤처지지 않기 위해 따라붙을 테니 괜찮다면 허락해달라고. 흔쾌히 “예스. 슈어.”    

 

그렇게 독일 아가씨들의 기를 받아가며 한 시간 반 정도를 정신없이 걸어서 그녀들의 목적지인 오카이 다리(Bridge of Orchy)에 함께 도착했다. 그녀들은 이곳에서 텐트를 치고 야영을 할 계획이라고 한다. 커다란 배낭을 메고도 엄청나게 잘 걷는다. 정말 건강한 아가씨들이다. 오카이 다리 앞에는 오래된 호텔(Bridge of Orchy Hotel)이 하나 있고, 호텔 건너편 다리 입구에 야영하기 좋은 잔디밭이 있다. 명당자리라고 가이드북에도 소개되어 있는 곳이다.     

독일 아가씨들과 작별 인사를 나누고 호텔 야외 테이블에 앉아 잠시 휴식의 시간을 가졌다. 쉬면서 주위를 둘러보니 호텔 앞에 트래블 라이프(Travel - Life) 사의 밴이 한 대 서 있는 게 보였다. 차 앞에는 ‘West Highland Way Baggage Transfer’라고 큼지막하게 쓰여 있다. 일정 요금을 받고 짐을 다음 숙소로 옮겨주는 차이다. 전체 일정을 패키지로 이용(45파운드, 6만 6천 원)할 수도 있고 하루만 이용할 수도 있다.     

  

- 풀잎은 바람에 날리고 -    


드디어 주택 씨가 나타났다. 이 회장님은 바로 뒤에 오고 있단다. 어서 가보라고 보내고 나도 바로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이곳에서 숙소인 인버로란 호텔(Inveroran Hotel)까지 남은 거리는 3마일(4.8km). 한 시간 남짓 걸으면 도달할 거리다. 다만 고개 마루를 하나 넘어가야 하는 부담이 있다. 오르막길을 터벅터벅 걷고 있는데 쓰윽 이 회장님이 나타났다. “정말 좋네요.” 밝게 미소 지으며 이내 나를 앞질러 가신다. 이제 꼴찌다.     

비는 그쳤다. 바람이 시원하다. 초원에 부는 바람~ 고개 마루 능선에 올라서면서부터 풍경이 확연히 달라진다. 나도 모르게 탄성이 터져 나왔다. 탄성이 아니라 이건 거의 괴성이다. 아악 소리가 저절로 나온다. 멋지다! 저 멀리 먼 산에는 진경산수화가 펼쳐지고 가까이 발아래로는 물안개 피어오르는 툴라 호수(Loch Tulla)가 내려다보였다. 호숫가에 오늘 우리가 묵을 인버로란 호텔도 모습을 드러냈다. 황무지 벌판에 호텔 한 채만 덩그러니 서 있다. 영화 ‘스카이 폴’에 나오던 대저택처럼.    

풀잎은 바람에 날리고 나는 이 멋진 길을 걷는다. 콧노래가 절로 나온다. “장막을 걷어라 너의 좁은 눈으로 이 세상을 떠보자. 창문을 열어라 춤추는 산들바람을 한번 또 느껴보자. 가벼운 풀밭 위로 나를 걷게 해 주세. 봄과 새들의 소리 듣고 싶소. 울고 웃고 싶소. 내 마음을 만져 주. 나는 행복의 나라로 갈 테야.” 이 회장님의 발걸음이 경쾌하다. 내 발걸음도 점점 빨라진다. 결국 앞서가던 나총까지 세 사람이 나란히 호텔에 당도했다. 정말 멋진 레이스였다.     


- 이럴 때 소주가 있다면 -     


인버로란 호텔은 고색창연한 숙소였다. 적어도 백 년은 더 됐을 듯. 삐걱거리는 문짝과 좁다란 복도가 밤이 되면 뱀파이어가 나올 법한 스산함을 풍겼다. 그래도 명색이 호텔은 호텔. 편한 침대와 하얀 시트가 마음에 든다. 샤워를 하고 저녁을 먹기 위해 버너, 코펠, 간이의자 등의 취사도구를 챙겨 밖으로 나왔다. 오늘 저녁은 호텔에서 먹지 않고 호텔에서 200m 정도 떨어져 있는 강가로 간다. lovely position이라고 가이드북에 소개된 자리다. 소문대로 이미 세 팀이 야영을 위해 텐트를 쳐놓았다.     

다시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바람이 부니 한기가 느껴진다. 몇 사람은 그냥 호텔로 돌아가는 게 어떻겠냐고 투정을 부렸지만 못 들은 척 버너에 불을 지폈다. 이런 척박한 환경에서의 체험도 필요하다. 낮에 사둔 돼지 목살을 굽고 인스턴트 자장면, 짜왕을 끓였다. 고소한 돼지고기가 입에 들어가자 불평불만이 사라진다. 그래 이 맛이야! 툭 터진 야외에서 맛보는 돼지고기 한 점. 그리고 술 한 모금. 이거면 게임 끝이다. 다만 소주가 없는 것이 아쉽다. 이럴 때 소주가 있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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