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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산비 Dec 07. 2018

웨스트 하일랜드 웨이(WHW) 5

트레킹 5일 차 (7월 27일)


: 인버로란 - 킹스하우스(Kingshouse) - 킨로크레븐(Kinlochleven) / 30km    


내 잘못으로 내가 힘든 건 스스로 감내할 수 있다. 그런데 나의 잘못으로 다른 누군가가 고통을 겪는다면 그건 정말 가슴 아픈 일이다. 내가 어떻게 해줄 수도 없는 상황일 때는 더욱 견디기 힘들고 괴롭다. 삶의 가장 큰 고통은 관계에서 온다. 그래서 이렇게 그룹으로 움직일 때는 팀워크가 중요하다. 서로 배려하고 양보하는 자세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다섯째 날이 밝았다. 편안한 호텔 침대에서 자고 나서 그런지 몸이 가뿐하다. 일찍 일어나 샤워까지 마치고 아침 산책에 나선다. 밤사이에도 제법 굵은 비가 창을 때리더니 여전히 비가 내리고 있다. 우산을 받쳐 들고 툴라 호수(Loch Tulla) 언저리로 슬슬 걸어 나갔다. 아침 공기가 알싸하고 상쾌하다. 호텔 별관을 숙소로 이용한 여성 대원들도 합류하여 상쾌한 아침 공기를 만끽한다.     

숙소로 돌아와 짐을 정리하는 중에 전날 김치전을 해 먹고 남은 밀가루를 발견했다. 버리려다가 아까운 생각이 든다. ‘수제비용 반죽을 만들자!’ 코펠에 버터를 살짝 녹인 후 밀가루를 넣고 물을 부어 열심히 치댄다. 가급적 기포가 없게 단단히 치대야 맛있는 반죽을 만들 수 있다. 점심에 짬뽕 라면을 끓여먹을 예정이니 거기에 수제비를 넣어서 같이 먹자! 기발한 생각이었다. 생각만으로도 군침이 돈다.     

아침 조식은 훌륭했다. 빵과 버터, 잼, 주스, 우유 등은 기본으로 가져다 먹을 수 있게 세팅이 되어 있고 따로 메인 요리를 주문해서 먹는 시스템이다. 베이컨을 먹거나 훈제연어 요리 또는 스코틀랜드 전통요리 하기스 중에서 선택하면 된다. 아침을 먹고 바로 체크아웃을 한 후 트레킹에 나섰다.     


- 여기가 바로 스코틀랜드다 -    


여전히 비가 내리는 궂은 날씨다. 우의와 방수 바지를 단단히 챙겨 입고 길을 나섰다. 길이 아주 반듯하다. 표지판을 읽어보니 18세기에 군사용 도로로 쓰이던 길을 19세기에 새로 정비했다고 한다. 소와 양들을 몰고 가거나 마차가 다닐 수 있게 길을 닦았다는 내용이 있다. 길이 보존 상태가 좋아 ‘웨스트 하일랜드 웨이’로 사용 중이라는 설명과 함께.   

  


이 일대가 그 유명한 란노크 무어(Rannoch Moor) 지대이다. ‘무어(Moor)’란 잡초로 뒤덮인 황야 지대, 황무지를 이르는 말이다. 스코틀랜드 냄새를 진하게 풍기는 광활한 풍경이 펼쳐진다. 걷기에 이보다 더 좋을 수는 없다. 선선한 날씨, 부슬부슬 내리는 비, 간간히 부는 바람, 일망무제의 들판. ‘이것이 스코틀랜드다.’ ‘여기가 바로 스코틀랜드다.’ 하늘이 검게 내려앉았다가 어느새 파란 조각하늘을 만들며 흰 구름을 피워 올린다. 비가 내렸다 그치기를 반복하는 변화무쌍한 날씨. 그것이 스코틀랜드의 본 모습이다.

    

초원에 꽃사슴 몇 마리가 자유롭게 노닐고 있다. 우리도 자연과 교감하며 길 위에서 노닌다. ‘아! 얼마나 즐거운 삶인가!’ 속세의 복잡한 뉴스와는 완전히 단절된 무릉도원이다. 이 순간엔 미사일 발사도, 끔찍한 테러도, 사드도, 살충제 달걀도 우리하고는 아무 상관이 없는 저 밖의 세상일이다. 며칠 걸었다고 특별히 달라질 건 없겠지만 적어도 내가 살아있음을 확인하고, 내 존재의 목적을 달성하고, 내 이유대로 세상을 살아가는 당당함을 얻을 수는 있을 것이다. 그것이 걷기 여행이 주는 선물 꾸러미다.    

  

 

- 먹어보지 않은 사람은 말을 하지 마 -    


잠깐 햇살이 비치더니 이내 컴컴해지며 비가 내린다. 계속되는 무어 지대를 배경으로 길이 곧게 뻗어있다. 중간중간 개울이 지나는 곳마다 작은 돌다리가 놓여있다. 돌다리의 난간은 잠깐 앉아서 쉬기에 좋은 장소를 제공한다. 글렌코 마운틴 로지로 빠지는 갈림길을 지나자 차들이 지나다니는 도로가 나왔다. 조심스럽게 도로를 횡단해서 점심을 먹을 장소인 킹스하우스 호텔(Kingshouse Hotel)에 도착했다.

    

호텔에서 밥을 사 먹어도 되지만 우리는 직접 해 먹으려고 한다. 미리 수제비 반죽까지 만들어왔으니 아주 별식이 될 것이다. 호텔을 지나서 다리 하나를 건너자 멋진 캠핑 사이트가 나타났다. 이곳도 백패커들에게는 아주 인기 있는 장소이다. 식수는 호텔 근처에 수도꼭지가 외부로 설치되어 있어 쉽게 구할 수 있다.

    

자리를 잡고 앉자 어디선가 미찌들이 몰려왔다. 새까맣게 떼로 몰려온다. 그렇다고 다른 곳으로 자리를 옮길 수도 없고. 황급히 모기망을 머리에 둘러썼다. 준비해온 물건들은 다 써보는 셈이다. 물이 끓는다. 스프와 밀가루 반죽을 떼어 넣었다. 얇게 잘 떠야 밀가루 냄새가 나지 않고 속까지 잘 익힐 수 있다. 한소끔 끓어오른 후에 면을 넣어서 수제비 짬뽕을 완성했다. ‘아, 이 맛을 어떻게 말로 설명할 수 있을까?’ 먹어보지 않은 사람은 말을 하지 마. 그 말밖에...    


- 악마의 계단 -    


한동안 도로와 나란히 병행하던 WHW는 글렌코(Glen Coe) 협곡을 뒤로하고 오른쪽으로 완전히 방향을 꺾는다. 1022m의 위용을 자랑하는 바위 덩어리 산 ‘엘티브 모(Eltive Mor)’를 비롯해서 900m급의 산들이 즐비한 이곳 글렌코 계곡은 근처에 글렌코 빌리지가 형성되어 있어 며칠 머물며 등반을 하거나 겨울에는 스키를 즐길 수도 있다. 멜 깁슨이 주연한 영화 ‘브레이브 하트’의 촬영지로도 유명한 곳이다.     

이제 길은 계속해서 오르막이다. 능선 위의 고개 하나를 넘어가야 한다. 지도에 ‘악마의 계단’(The Devil's Staircase)이라고 표기되어 있어 바짝 긴장했던 구간이다. 팍팍한 계단도 있고  지그재그로 오르며 계속해서 고도를 높여야 하는 곳이었지만 ‘악마’라고 부르기엔 함량이 미달이다. ‘귀여운 악마’나 ‘힘 빠진 악마’ 정도. 물론 그동안의 평탄했던 길에 비해서는 제법 기를 쓰며 올라야 했다. 한 명 한 명 정상에 오르며 정상 정복의 기쁨을 만끽한다. 정상에서 바라보는 주변 경치가 아주 장관이다. 장엄하고 웅장했던 스웨덴의 쿵스레덴을 빼다 박았다.    

 

- 검은 물 호스텔 -    


질 수 있다. 그러나 다시 한번 붙어보겠다는 의지가 남아있는 한 아직 승부가 끝난 건 아니다. 넘어지고 쓰러져도 끝끝내 저항하면 이길 수 있다. 지는 것이 끝나야 승부가 끝난다. 길이 끝나야 걷기가 끝나는 것처럼. 승부는 항상 최후에 웃는 자의 것이다.     

능선을 넘어서부터는 계속 내리막이다. 약간은 지루하게 긴 내리막길이 이어진다. 건장한 청년들 대여섯 명이 무리를 지어 내려가고 이어서 형제로 보이는 두 학생이 우리를 앞질러갔다. 한 명은 아직 초등학생 정도로밖에 보이지 않는 앳된 모습이다. 서양 사람들은 기본적으로 걸음이 빠른 것 같다. 우리를 앞질러 간 사람들은 많았지만 우리가 앞지른 경우는 거의 없었다. 나이 지긋한 노부부 한 팀을 빼고는.    

 

계속해서 완만한 경사를 따라 고도를 낮춰가다가 작은 나무다리 하나를 건너자 킨로크레븐(Kinlochleven) 마을이 보이기 시작했다. 목표지점이 눈에 들어오자 걷는 속도가 빨라진다. 자작나무 숲을 지나고 임도처럼 잘 닦인 길을 내려오니 계곡을 따라 굵은 송수관들이 지난다. 발전용 송수관들이다. 산 위에 댐을 만들어두고 낙차를 이용해서 물을 떨어뜨려 전기를 만든다. 물 색깔이 콜라처럼 새까맣다. 그래서 그런지 오늘 묵을 숙소 이름이 ‘검은 물 호스텔’(Blackwater Hostel)이다.    

산길을 빠져나오면 바로 호스텔이다. 많은 캠퍼들이 자리를 잡고 텐트를 친 채 야영을 하고 있다. 호스텔 한쪽 뜰에 캠핑장을 함께 운영하고 있었다. 방을 배정받고 샤워부터 한다. 그동안 여러 차례 해외 트레킹을 하며 이렇게 매일 더운물로 샤워를 한 경우는 없었다. 그동안의 처절했던(?) 야생의 트레킹에 비하면 이번은 무척이나 럭셔리한 걷기 여행이다. 이 회장님이 듣던 바와는 다르다며 의아해하신다. 그래서 좋다는 건지, 싫다는 건지. 내색은 안 하지만 미묘하게 드러나는 입가의 미소를 감출 수는 없다.      


세탁 서비스는 오후 4시까지만 받을 수 있다. 빨래는 못했지만 다행히도 건조실이 구비되어 있어 젖은 옷이며 수건, 양말, 신발을 말릴 수 있었다. 비가 잦은 곳이라 건조실이 있는 것만으로도 많은 도움이 된다.   

  

- 함께 감동받기를 바라는 마음 -    


샤워를 마치고 마을 마트로 장을 보러 나갔다. 호스텔이 마을 초입에 자리 잡고 있는지라 마을 중심 광장까지는 십분 정도 걸어 나가야 한다. 수력발전소가 있는 까닭인지 게스트하우스, 바, 마트 외에도 관사처럼 보이는 아파트도 여러 채 들어서 있었다. ‘국내 최대의 실내 인공빙벽’이라고 쓰인 간판도 보인다. 이 마을이 ‘영국 아웃도어의 수도’라고 불린다더니 저 시설 때문에 그런가 보다.  동네 마트가 생각보다 규모가 컸다. 웬만한 물품은 다 구비되어 있다. 저녁 만찬을 위해 쌀과 대파, 양파, 상추 등의 각종 채소와 돼지 목살, 베이컨, 소시지, 와인, 맥주를 구매했다.     

오늘은 트레킹 마지막 밤. 아껴두었던 김치 한 봉지를 털어 김치찌개를 끓이고 돼지 목살, 베이컨을 구어 상을 차려냈다. 한 명은 채소를 다듬고, 한 명은 고기를 굽고, 한 명은 밥을 하고, 찌개를 끓이니 금세 근사한 만찬이 차려졌다. 모두 성실하게 각자의 역할을 수행한 덕분이다. 이태리산 까베르네 쇼비뇽으로 잔을 채우고 건배를 했다. 술잔을 기울이며 그간의 트레킹에 대한 무용담을 나눈다. 소고기보다는 확실히 돼지고기가 입맛에 맞다. 상추에 쌈장, 양파와 같이 싸서 먹으니 맛이 끝내준다. 얼큰한 김치찌개도 식욕을 돋워준다. 분위기가 얼추 무르익을 무렵 한 명씩 돌아가며 여행의 소감을 발표했다. 다들 5일이 어떻게 지나갔는지 모르겠다며 감개무량이다.

    

내일이면 트레킹도 끝이다. 밤은 깊어가고 잠은 오지 않는다. 밖으로 나와 노란 불빛이 일렁이는 벤치에 앉았다. 냉기를 머금은 밤바람이 볼을 스친다. 트레킹 소감을 발표하며 행복해하던 팀원들의 감동이 내 가슴에 여운을 남긴다. 행복 바이러스는 전염력이 강하다. 누군가가 나로 인해 행복해하면 내 마음도 같이 행복해진다. 내가 본 아름다운 풍경을 다른 누군가에게도 보여주고 싶은 마음. 함께 감동받기를 바라는 마음. 그것은 또 다른 모습의 사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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