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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산비 Dec 12. 2018

웨스트 하일랜드 웨이(WHW) 6

트레킹 6일 차 (7월 28일)


: 킨로크레븐 - 포트 윌리엄(Fort William) / 24km    


우리가 ‘독버섯’이라고 부르는 건 어디까지나 사람의 논리에 입각한 명칭일 뿐이다. 독버섯의 입장에서는 전혀 다른 존재의 이유를 가지고 있다. 나에게 이유가 있다면 그에게도 그의 이유가 있다. ‘자유’는 각자가 가진 이유를 인정하고 존중하는 것에서 출발한다. 나에게 길을 걸어야 할 이유가 있는 한, 누가 나에게 뭐라고 하건 꿋꿋하게 나는 나의 길을 갈 것이다. 아무리 고달프고 힘겨운 여정일지라도...    

마지막 날이 밝았다. 오늘은 24km를 걸어서 마지막 종착지 ‘포트 윌리엄(Fort William)에 들어간다. 시간당 3km의 속도로 걷는다면 8시간이 걸리는 거리이다. 속도를 내더라도 7시간은 잡아야 할 것이다. 중간에 허기를 면할 요기도 해야 한다.    

 

아침 기상 시간을 부득이하게 4시로 정했다. 최대한 서둘러 출발해야 포트 윌리엄에서 여유를 가지고 점심을 먹을 수 있다. 트레킹을 마치고 에딘버러(Edinburgh)로 우리를 이동시켜 줄 택시 기사와는 오후 3시에 만나기로 약속을 해두었다. 어떡하든 오후 2시까지는 목적지에 도착하는 것이 목표다.    


- 잘못된 옷차림이 있을 뿐 -       


어제 구입해 둔 빵과 우유, 주스로 아침을 차려 먹었다. 커피와 함께. 아무리 바쁘더라도 커피 한 잔을 생략할 수는 없다. 여행 중 마시는 아침 커피 한 잔은 여행에 활력을 불어넣는 에너지 음료이다. 진한 카페인이 뇌를 두드려 영혼을 깨운다. 오늘 하루를 살아갈 일용할 카페인을 확보하지 못하면 끈 떨어진 마리오네트 인형처럼 흐느적거리게 될 것이다.        

 

도로를 따라 조금 걷다가 킨로크레븐 마을을 벗어났다. 산길로 접어들자 초입부터 급한 오르막이다. 어제는 내려왔는데 이제 다시 올라간다. 마을이 U자 모양의 계곡 안에 위치하고 있는 탓이다. 삼십 분 정도를 계속 오름 짓을 한 끝에 킨로크레븐 마을이 내려다보이는 조망터에 올라서서 잠시 숨을 돌렸다.   

  

물을 확보할 수 있는 개울가에는 어김없이 텐트 족들이 진을 치고 있다. 조용하다. 아직 자고 있는 모양이다. 우리가 조금 일찍 출발하기는 했다. 야영을 하는 것은 즐거운 일이지만 비가 내리면 아무래도 생활하기가 불편하다. 비에 젖으면 꿉꿉하고 짐도 더 무거워진다. 우리로서는 비를 맞더라도 뽀송한 잠자리가 확보되어 있으니 두려울 것이 없었다. 이번 트레킹 모토를 ‘밥은 해 먹고 잠은 숙소에서 자기’로 한 것은 참 잘한 일이었다.  

첫 삼일은 날이 아주 화창하더니 나중 삼일은 내리 우중 트레킹이다. 그나마 폭우가 아닌 것이 다행이었다. 장대비가 내리더라도 하늘을 원망할 수는 없다. 스코틀랜드 속담에 이런 말이 있다. “나쁜 날씨란 없다. 잘못된 옷차림이 있을 뿐!” 대비를 하지 못한 사람이 잘못이지 날씨를 탓할 순 없다는 말이다. 악천후도 충분히 대비하고 준비하면 얼마든지 극복할 수 있다.     


- 양과 동행한 걷기 여행 -     


내 주장을 가지고 자기 줏대를 세우는 것은 바람직한 일이다. 그러나 고정관념에 사로잡혀 독단에 빠지는 것은 막아야 한다. 열린 마음으로 여러 가지 가능성을 점검하며 다각적 관점을 가질 필요가 있다. 여행이 그것을 가능하게 한다. 여행은 생각의 성에 균열을 만들고, 우리의 편견을 망치로 부순다. 직접 겪어봐야 생각이 열린다.

    

고개를 넘어선 후에는 산허리를 따라 길게 뻗은 길을 걷는다. 길은 조금씩 내려가다가 다시 고도를 높이기를 반복했다. 임도처럼 널찍하지만 거친 돌들이 널려있어 발을 내딛기가 조심스럽다. 비가 계속 내려 쉴 곳이 마땅치가 않다. 그래도 앉을만한 바위가 나타나면 짬짬이 휴식을 취하며 마지막 박차를 가했다.     

폐허가 된 돌집을 지난다. 옛날에 목동들이 궂은 날씨를 피하는 대피소로 사용했던 건물이다. 지금은 폐허가 되어 유적처럼 흔적만 남아있다. 오늘날에도 여전히 이곳은 양들을 방목하는 목초지이다. 길을 걷다 보면 털이 복슬복슬한 양들을 자주 만난다. 어딘가에 양들을 관리하는 목동들이 있을 텐데 사람은 보이지 않고 양들만 자유롭다. 이번 트레킹은 양과 친구 하며 양과 동행한 걷기 여행이었다고 말할 수 있겠다.    

 

신 단장님이 언덕길을 올라오신다. 올해 나이 칠십.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는 것을 증명이라도 하듯 여전히 강건하고 당당하다. 뒤로 처지지 않고 늘 앞장서서 솔선수범, 모범을 보이신다. 그동안 건강관리를 철저히 해 오신 덕분이겠지만 정말 대단한 의지와 체력이다. 이번 트레킹도 계속 선두에 서서 팀에 기운을 불어넣으셨다. 내가 저 나이가 되어서도 단장님처럼 건강할 수 있을까? 자신할 수가 없다. 정말 닮고 싶고 따르고 싶은 분이다. 앞으로도 한 십 년쯤은 함께 다니며 세계 곳곳을 누빌 수 있으실 듯하다.      


- 꼼수를 부릴 생각이 없다 -    


같은 곳에 여행을 가서 같은 피사체를 찍어도 사진을 찍는 방향에 따라 모두 다른 빛과 배경을 보여준다. 각자의 지향점에 따라 각각의 사진에는 서로 다른 주장과 철학이 담긴다. ‘아! 그 각도에서 보면 그런 장면이 보이는구나.’ 다른 이들의 시선을 통해 내가 미처 생각지 못했던 새로운 관점을 배우고 시야를 넓힌다. 함께 여행을 떠나는 이유이다.      

예전에는 이 일대가 제법 큰 전투가 벌어졌던 군사적 요충지였다고 한다. 길을 가다 보면 역사적 사실을 소개하는 홍보 간판들이 군데군데 서있다. 길이 갈라진다. 그동안 앞서거니 뒤서거니 우리와 나름 경쟁을 벌였던 독일 단체 트레킹 팀이 여기서 갈라져나갔다. 샛길을 따라 그대로 가도 ‘포트 윌리엄’에 도달할 수 있다. 사실 그게 더 빠른 지름길이기도 하다. 그러나 우리는 진정성을 추구하는 걷기 여행자들 아니던가? 결코 꼼수를 부릴 생각이 없다.     

힘을 내어 다시 걷는다. 길이 끝도 없이 이어진다. 비도 계속 내리고 있다. 10시가 넘은 시각인데 여전히 철수하지 않은 텐트가 있다. 자리 하나는 명당자리로 보인다. 평평한 초지에 전망도 툭 트였다. 길을 걷다가 저 자리를 보았다면 나라도 이곳에 야영지를 정했을 것 같다. 텐트 안에는 어떤 사람들이 진을 치고 있을까? 여자일까, 남자일까? 그 짧은 순간에 머릿속으로 별별 상상을 다 하며 소설을 쓴다.   

       

일찍 출발한 탓인지 시장기가 돌았다. 엉덩이를 부칠 공간을 찾아서 새참을 먹기로 했다. 정식 점심은 아니지만 행동식으로 에너지를 보충하고 허기만이라도 면하려는 것이다. 배낭에 남아있는 초코바, 건포도 같은 것들을 모두 땡 처리했다. 커피 물을 끓인다. 비 오는 날 들판에 쪼그리고 앉아 마시는 커피 한 모금이 아주 그만이다. 준비한 베이글 빵을 뜯어먹으며 같이 마시니 더 맛있는 것 같다.      

   

- 함께 걷다가 따로 걷기 -     

 

새참을 먹고 이후부터는 서바이벌 트레킹을 하기로 했다. 이제부터 마지막 종착지까지는 각자의 속도로 길을 걸으며 5박 6일 동안의 트레킹을 돌아보는 시간을 갖기로 했다. 함께 걷다가 따로 걷기. 따로 걷다가 또 같이 걷기. 나름 괜찮은 단체 걷기 여행 방법이다.   

비가 추적추적 계속된다. 주변은 나무들을 모두 베어버려 황량하기 그지없다. 예전에는 제법 울창한 숲을 이루었을 텐데 전부 벌목을 해버렸다. 사람이 살아가기 위해서는 가구도 필요하고 그러려면 목재를 공급해주는 일도 필요할 것이다. 그래도 이렇게 휑하니 베어버린 광경을 보게 되니 왠지 씁쓸한 마음이 든다. 처참한 나무 시신들이 여기저기 나뒹굴고 있다.    

능선을 지나자 너른 임도가 나타났다. 이후부터는 계속 내리막이다. 빗줄기가 점점 굵어진다. 그 비를 뚫고 달려오는 여성 러너가 있다. 트레일 러닝. 크로스컨트리. 대단하다. 비가 온다고 달릴 수 없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거친 자연에 맞서는 쾌감이 있다. 비가 자주 오는 곳이니 비 안 오는 날만 기다리고 있다가는 달리기고 뭐고 아무것도 할 수 없을 것이다. 정말 멋진 여성이다. 고고를 외치고 엄지를 들어 올려줬다.   

  

코너를 돌자 저 멀리 오늘의 목적지 포트 윌리엄(Fort William) 시가지가 보이기 시작했다. 가까이 보여도 두 시간 정도는 더 가야 할 것 같다. 나총과 이 회장님은 무슨 할 이야기가 많은지 계속 나란히 걸으며 대화를 나눈다. 나는 맨 마지막에서 묵묵히 그들을 따른다. 주택 씨와 신 단장님, 김 교수님은 이미 바람과 함께 사라진 지 오래다.     

남은 힘을 모아 끈덕지게 걸은 끝에 포트 윌리엄 시에 들어섰다. 안온했던 자연의 품속에서 시끄럽고 복잡한 속세로 나온 것이다. 차들이 빗물을 튕기며 지나간다. 도로를 따라 걷는 길이 영 마뜩지 않다. 좀 더 걸어서 마침내 “The Original End of The West highland Way"라고 쓰인 간판에 도착했다. 전쟁에 승리하고 돌아온 개선장군인 양, 두 팔을 쳐들고 기념사진 한 장씩을 남겼다. 그러나 여기가 진정한 ‘웨스트 하일랜드 웨이의 끝’이 아니다. 트레커들이 인정하는 진짜 종착지는 좀 더 가야 한다.    


- 추억을 공유한다는 것 -    


주차장과 잡화점을 지나고 작은 광장과 성당을 지났다. “어디가 끝인 거야?” 앞서가던 이 회장님이 외국 청년 한 명을 붙들고 길을 묻는다. “뭐라고 하셨어요?” “피니쉬를 물었죠. 하하” 고든 광장의 조지 할아버지를 찾아가야 한다. 그 할아버지가 왜 거기 벤치에 앉아있게 된 건지, 왜 신발 한 짝은 벗은 채 다리를 꼬고 있는지. 그 벗은 신발은 어디로 갔는지. 그건 알 길이 없다. 시가지를 따라 200여 미터를 더 걸어 들어간 끝에 비로소 WHW의 종착점에 도착했다.    

가슴이 벅차오른다. 또 한 페이지의 역사를 기록했다. 무려 154km의 먼 길을 6일을 꼬박 걸어서 완주했다. 해냈다. “그 어려운 일을 우리가 또 해냈지 말입니다.” 모두들 흥분과 기쁨에 달아오른 모습이다. 이미 도착해서 레스토랑에서 커피를 마시고 있던 선발대원들과도 반갑게 조우했다. 서로 얼싸안고 완주의 기쁨을 나눈다. 조지 할아버지와 기념사진도 남겼다. 다리 하나를 꼬고 앉아서.    

그렇게 해서 스코틀랜드 ‘웨스트 하일랜드 웨이’ 걷기 여행을 모두 마쳤다. 일 년에 한 번 휴가 기간을 이용해서 떠나는 해외 트레킹. 한 해 한 해 추억이 쌓여가니 그것이 어느덧 역사가 되어간다. 역사의 현장을 함께 했던 동료들과는 진한 전우애와 연대감이 생겼다. 추억을 공유한다는 것은 얼마나 값진 일인가! 인생의 절반은 추억을 만드는 행위로, 나머지 절반은 그 추억을 곱씹는 행위로 채워진다. 추억이 많은 사람이 행복한 사람이다. 추억을 공유한 친구를 가진 사람은 더 행복한 사람이다.      

내가 어디 가서 무엇을 보았고 어떤 일을 겪었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누구와 함께 있었는가?’이다. 아름다운 풍경을 함께 보고 함께 느끼고 함께 공유하는 것. 그것이 행복이다. 사람은 누군가를 기다리거나, 누군가를 그리워하지 않으면 살아갈 수가 없다. 순례의 길에 동행이 필요한 까닭이다.      

     

여행은 사람을 성숙하게 한다. 다양한 경험들이 생각의 깊이를 키워준다. 문제 풀이를 많이 하면 연산 실력이 느는 것처럼, 여행을 하며 다양한 실전 문제들을 풀다 보면 맷집과 내공이 쌓이게 된다. 여행 후에는 생각의 크기와 영혼의 무게가 달라진다. 여행을 하지 않는 삶은 죽은 삶이다.     


20대에 읽은 데미안과 50대에 읽는 데미안이 같을 수 없다. 자기 내면의 변화만큼 감동의 방향과 깊이가 달라진다. 산도 그렇다. 젊은 날 오르던 산과 장년이 되어 오르는 산은 내용과 느낌이 다르다. 매번 같은 산을 찾아도 지겹지 않은 이유이고, 죽는 날까지 산에 올라야 하는 까닭이다.


길을 걸으며 새롭게 발견하는 진리와 기쁨들, 그것이 걷기 여행의 참 즐거움이고 매년 트레킹을 떠나는 이유이다. 내년에 가게 될 이탈리아 돌로미테는 또 어떤 이야기를 내게 들려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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