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레킹 5일 차 (8월 1일)
=> 계획 (24km/9hr) : Rif Coldai - Rif Tissi 점심 - Rif Vazzoler - 카레스티아토 산장(Rif Carestiato) 6pm 도착
=> 실제 : 숙소에 저녁 8시 도착, 12시간 소요
소용없는 일인 줄 알면서도 어쩔 수 없이 계속해야만 하는 것은 고통스러운 일이다. 승부가 이미 기울어 역전이 불가능한 상황에서도 어쨌든 우리는 계속 달려야 한다. 시합이 종료될 때까지. 그것이 인생이다.
오늘은 ‘롱 데이’ 이번 트레킹 중 가장 긴 거리인 24km를 걷는 날이다. 과연 계획표대로 저녁 6시에 도착할 수 있을까? 그동안의 전적으로 봐서는 어림없는 계획이다. 다들 바짝 긴장한 표정이 역력했다. 간밤에 한 방에서 같이 잔 독일 아줌마들은 전날 티씨 산장에서 자고 9시간 걸려 이곳 스타우란자 산장에 도착했다고 한다. 같은 산장에 묵은 한국의 패키지 팀은 오늘 하루 일정이 티씨 산장에 가서 숙박하는 것이라고 했다. 우리는 티씨 산장에서 점심을 먹는 것으로 계획했는데 말이다. 뭔가 일정을 조정할 필요가 있었다. 부대장인 주택 씨의 강력한 건의로 티씨 산장은 건너뛰고 바졸러 산장으로 바로 질러가는 길을 택하기로 했다. 그렇게 하면 2km 정도 잘라먹는 셈이다.
조식을 일찍 먹고 출발을 서둘렀다. 도로를 따라서 1km쯤 걷다가 산길로 들어선다. 산길이라지만 차가 다닐 정도의 넓은 신작로다. 여전히 태양이 이글거리는 뜨거운 날씨. 이정표가 나올 때마다 확인하고 또 확인한다. 오늘도 알바를 한다면 죽음이다. 말가 베스코바(Malga Vescova, 1734m) 농장 건물 울타리 너머로 길이 이어진다. 언덕을 하나 올라서니 넓고 푸른 초원이다. 오름과 내림에 이제 무심해진다. 몇 번은 오르고 또 몇 번은 내려갈 것이다. 산다는 것이 어차피 올라가고 내려오고 그런 것 아니겠는가?
길이 갈라진다. 반려견과 함께 앞서 걷던 여인이 지도를 펴고 길을 살피고 있다. 우리도 같은 고민을 가지고 있는지라 지도를 같이 보며 생각을 보탰다. 그녀는 독일에서 휴가를 즐기기 위해 남편과 함께 돌로미테에 왔다고 한다. 남편은 클라이밍을 하러 가고 자기는 좋아하는 트레킹을 하러 왔다고. 아마도 초원 건너편에 우뚝 선 콜다이 산(Cima Coldai)을 넘어가야 할 것 같다. 얼마 안 가서 길이 또 갈라졌다. 독일 아줌마가 다시 지도를 꺼내 든다. 다시 머리를 맞댔다. 초행길이라 아무래도 자꾸 길을 확인하게 된다.
‘생각하기’에는 근성이 필요하다. 바둑의 고수는 수십 번의 수 읽기 끝에 최고의 수를 찾아낸다. 이리 재고 저리 재며 여러 가지 가능성에 대해 계속 생각을 해봐야 한다. 어떤 결정이 불러올 파급에 대해 미리 예측해보아야 한다. 바둑돌을 놓을 때는 그 수를 거기에 두는 이유와 목적이 있다. 우리의 행동에도 그렇게 결정한 근거가 있어야 한다.
빡센 오르막이 시작되었다. 경사가 만만치 않다. 지그재그 길을 따라 콜다이 산의 어깨를 넘어간다. 오르막에서는 선두와 후미의 간격이 많이 벌어진다. 출발 두 시간 반 만에 콜 다이 산장(Rif. Coldai, 2132m)에 도착했다. 먼저 도착한 선두조가 이미 샌드위치를 주문해 놨다. 배가 고프지는 않았지만 다음 산장까지는 거리가 있으므로 요기를 해두어야 한다. 꿀맛 같은 휴식을 취하고 길을 나서다가 어제 만났던 밀라노 학생들을 다시 만났다. 여전히 생기발랄하다. 커다란 스피커를 배낭에 맨 학생이 지친 학생들을 독려하며 흥을 돋운다.
고개 마루에 올라서자 발아래 멋진 콜 다이 호수(Lago Coldai)가 펼쳐졌다. 왠지 가족 단위로 온 트레커들이 많이 보인다했더니 이곳 호수에서 피크닉을 즐기려는 사람들이었나 보다. 어제 독일 아줌마들도 이곳 호수에서 수영을 즐겼다더니. 학생들이 첨벙첨벙 신이 나서 물에 뛰어든다. 좋을 때다. 한라산 백록담 같은 콜 다이 호수를 뒤로 하고 우리는 계속해서 트레킹을 이어갔다. 갈 길이 멀다.
콜 네그로 고개(Forcella Col Negro, 2203m)를 넘어서자 치베타(Civetta, 3220m) 산의 사면을 따라 길게 쭉 뻗은 길이 나온다. 놀랍게도 군데군데 아직 녹지 않은 눈이 쌓여있다. 다들 “아이젠을 가져왔어야 하는데”하며 너스레를 떤다. 눈 위를 지날 때마다 밀양 얼음골에서 불어오는 냉 바람처럼 서늘한 에어컨 바람이 볼을 스친다. 한 여름에 즐기는 눈밭 트레킹이라니.
언덕 위에 티씨 산장(Rif. Tissi, 2250m)이 보이기 시작했다. 티씨 산장에서 바라보는 주위 조망이 끝내준다는 소문을 들었다. 그러나 우리는 이제 더 이상 경치에 아무런 미련이 없다. 돌로미테에 와서 봐야 할 경치는 이미 다 봤다. 경치가 문제가 아니라 너무 늦기 전에 숙소에 도착하는 것이 급선무였다. 바졸러 산장으로 갈라지는 갈림길에서 우리는 무조건 우회로를 선택했다.
천상의 화원 같은 꽃밭을 지나자 너른 초지가 나온다. 푸른 목장에는 하릴없는 소들이 오수를 즐기고 있다. 그런가보다 하며 지나가는데 황소 한 마리가 우렁찬 울음소리를 내며 우리를 졸졸 쫒아온다. 자기 영역을 과시하려는 행동일까? 초지 끝의 그늘 아래서 잠시 휴식을 취하던 우리는 소가 너무 가까이까지 접근하자 살짝 겁을 먹고 말았다. 우씨! 저리 가~
바졸러 산장(Rif. Vazzoler, 1714m)까지는 특별할 것 없는 내리막이다. 전나무 숲을 지나자 멋진 전경을 자랑하는 바졸러 산장이 나타났다. 산장 앞 경치가 얼마나 웅장하고 멋지던지 이곳에서 하룻밤 자도 좋겠다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하루 정도 시간 여유가 더 있다면 무리하지 말고 이곳 바졸러 산장에서 숙박하는 일정으로 계획을 짜면 좋을 것 같다.
케이크와 콜라로 요기를 하면서 쉬고 있는데 갓난아기를 동반한 한 무리의 등산객들이 들어선다. 배낭 형 캐리어에 아이들을 메고 다닌다. 대단한 열정이다. 아이가 걷기 여행의 장애물이 아니라 오히려 동기부여가 될 수도 있음이다. 엄마 아빠의 얼굴에 기쁨과 평안이 가득하다. 그 모습을 보고만 있어도 저절로 입가에 미소가 지어지고 덩달아 행복한 마음이 들었다. 아이들의 눈망울이 초롱초롱하다. ‘저 아기들도 크면 자연스럽게 자연과 벗하는 삶을 살게 되겠지.’
벗어두었던 양말과 신발을 다시 신고 짐을 꾸려 길을 재촉했다. 여기부터가 우리가 피눈물 나게 고생했던 마의 구간의 시작이다. 이번 트레킹이 전체적으로 힘들었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힘이 들었던 구간이었다. 가도 가도 끝없는 길이 이어진다. “한 고개 넘으니 여우가 없네” “두 고개 넘어도 여우가 없네”하던 동요처럼, 이 고개 넘으면 또 고개, 저 고개 넘으면 또 고개. 마음만 축지법으로 고개를 넘어갈 뿐 발은 점점 무거워져만 갔다. ‘이 길은 언제쯤 끝이 날까?’
걷는다는 것은 도대체 무엇일까? 인간에게 있어 걷는 행위란 무슨 의미일까? 왜 우리는 이 먼 곳까지 일부러 찾아와 고생스럽게 걷고 있는 것일까? 아무리 걷기를 즐긴다고 하지만 발바닥과 무릎의 부하가 한계치에 근접하면 육체적으로 고통스러운 건 어찌할 수 없다. 고통은 늘 후회와 의심을 수반한다. 온갖 잡생각들이 스며든다. 짜증 나고 후회도 되고 분노가 치민다. 그러다 그 과정이 다 지나가면 무념무상, 자포자기 상태가 된다. 더 이상 저항해봤자 소용이 없다는 것을 깨닫기 때문이다.
일테면 ‘의식의 초기화’ 같은 현상이 일어난다. 컴퓨터를 새로 포맷하는 것처럼 우리의 몸과 의식과 영혼이 리셋된다. 시간이 흐르고 나면 고생했던 기억들은 차차 사라지고 아름다운 추억만 정제되어 남는다. 개조된 우리의 몸과 맑아진 우리의 영혼에 감동하고 감사하게 된다. 어머니가 분만의 고통을 잊고 다시 새 생명을 잉태하는 것처럼 “내년엔 또 어디를 걸을까?”를 탐색하게 된다. 그래서 우리는 걷는 것 아닐까?
오후의 땡볕과 갈증이 발걸음을 자꾸만 무겁게 한다. 이제부터는 서바이벌이다. 각자의 속도에 맞춰 최선을 다해 길을 걷는다. 오직 한 가지 생각. 걷자! 걸어야겠다는 생각밖에 없다. 얼마나 지겹도록 걸었을까? 지겹다는 생각조차 지겨워서 지워질 즈음, 마침내 카레스티아토 산장(Rif Carestiato, 1839m)이 건너편 언덕에 모습을 드러냈다. 비록 산장을 빤히 보면서도 한참이나 더 걸어야 했지만. 정말 힘 빠지는 일이었다.
고맙게도 제일 먼저 산장에 도착했던 주택 씨가 물 한 통을 손에 들고 마중을 나와 주었다. 이렇게 고마울 때가. 주택 씨가 산장에 도착한 시간이 7시 27분. 7시 30분이 저녁 주문 마감시간이라고 하여 우선 대충 저녁 메뉴를 주문해두고 이렇게 마중을 나왔다고 한다. 내 배낭을 낚아채서 다시 내달린다. 인간이 아니다. 8시가 다 되어 겨우 산장에 도착했다. 다들 상태가 안 좋다. 이 회장님의 얼굴이 아주 일그러져 있다.
저녁 테이블에 앉자마자 벌컥벌컥 맥주 한 잔을 들이켰더니 천장이 빙빙 돈다. 너무 힘이 들었던 탓일까? 저녁을 먹는 둥 마는 둥하고 산장 밖 테라스에 나와 긴 의자에 몸을 뉘었다. 하늘도 돌고 나도 돈다. 지구가 도는지, 태양이 도는지 취기가 올라 비몽사몽 어지럽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갑자기 비가 오기 시작했다. 사위는 그새 온통 어둠에 휩싸였다. 산 너머에서 우르릉 쾅쾅, 번쩍번쩍 전쟁이라도 난 것처럼 뇌우가 내리친다. 몸은 일으켰지만 한동안을 숙소에 들지 못하고 그냥 그렇게 벤치에 앉아 비 구경을 했다. 옆 자리에는 은발의 노부부가 나란히 앉아 와인 잔을 기울이고 있고, 산장 처마 아래에서는 두 젊은 남녀가 길게 입을 맞추고 있다. 나만 홀로 외로이 내리는 비를 하염없이 바라본다. 처절한 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