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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산비 Feb 19. 2019

황금 물고기


비가 내립니다. 비가 자주 오니 좋습니다. 비 내리는 소리도 듣기 좋고.


첼리스트 마이스키는 그의 열정적인 연주 스타일이 종종 논란을 빚자 이렇게 말합니다. “한 연주자를 모두 좋아한다면 거기에도 문제가 있는 것이다. 모두 싫어한다면 더 큰 문제겠지만...”    


풍수지리가 최창조 님은 또 이렇게 말합니다. “당신이 버린 그가 누군가에겐 보배 구슬이듯 그 누군가에게만 보배가 되는 땅이 있고, 누구에게나 좋은 사람이 없듯 누구에게나 의지처가 되는 땅은 없습니다.”  

  

모든 사람을 다 만족시킬 수는 없습니다. 똑같은 영화를 보고도 좋다는 사람, 별로라는 사람이 갈립니다. 글이나 책도 마찬가지입니다. 좋게 받아들이는 사람이 있고 칼을 들이대는 사람이 있습니다. 전에 중국 고사에서도 본 기억이 납니다. 아무리 맛있게 국을 끓여도 만 사람의 입맛을 맞출 수는 없는 법이라고.    


그러므로 몇몇 사람이 더러 나를 좋지않게 비난하더라도 너무 위축될 필요는 없습니다. 이런 나를 좋아해 주고 인정해주는 벗들 또한 내게 있으므로.  


2007 5.18  비 내리는 목요일에  산비        



“‘아무 데도 속해 있지 않음’의 감미로움이 4월의 바람에 날리는 꽃가루처럼 주위를 맴돌며 아른거렸다.”

“다다르고자 했으나 한 번도 이룰 수 없었던 열망, 나의 황금 물고기.”    


황시내의 <황금 물고기>를 읽고 있습니다. 책의 제목 <황금 물고기>는 화가 클레의 유명한 그림 제목에서 따온 것입니다. 모름지기 삶이란 이런 것이다,라고 황시내는 말하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토록 두 눈으로 직접 보기를 갈망했지만 결국 한 번도 볼 수 없었던 그림, 열심히 쫓아다녔지만 운명의 장난처럼 비껴가기만 한 작품. 삶이란 곧 잡힐 듯 잡힐 듯 우리를 유혹하지만 결국 다다르지 못하고 체념하게 되는 것. 그러나 다다르고자 하는 열망조차 없는 삶이란 또 얼마나 헛된 것인지.     


이 책은 바로 그러한 모순된 삶의 모습을 저자가 긍정하지도 부정하지도 않고, 있는 그대로의 솔직한 시각으로 관조한 기록입니다. 소박한 일상의 조각에서 모티브를 잡아 그것으로부터 심원한 음악의 세계로 독자들을 자연스럽게 끌어들인 후, 자신의 느낌과 생각을 펼쳐 보였다가 다시 원점으로 돌아와 현재에서의 의미를 되짚습니다. 우리를 아스라한 과거의 현장 속으로 데려갔다가 다시 턱 하고 현실에 떨구어 놓습니다. 그 순간 독자들은 잠시 눈을 감고 회상에 잠기게 됩니다. ‘나는 어떠했나?’ 그녀가 써 내려간 담담한 일상의 잔영들이 뇌에 잔잔한 파동을 일으키는 순간입니다.     


“연습하고 연습하던 지루한 연결부들이 주제를 보완하고 하나로 이어져 더 할 수 없이 아름다운 음악으로 완성되어 울리고 있었다. 커다란 전체가 실은 하찮은 부분들의 총합이라는 사실을 왜 나는 생각하지 못하고 있었던 걸까?”    


하숙집의 옆방에서 매일 들려오던 지루한 바이올린 연습 소리. 전곡을 연주하는 아름다운 음악이 아니라 부분 부분 특정 부분만 지루하게 반복되며 사람을 긁어놓던 그 소리들이 어느 날 연주회 석상에서 본모습을 드러냈을 때 저자는 입을 다물지 못합니다. 작고 사소하고 하찮게 여겨지는 부분들이 모여서 비로소 커다란 하나가 완성된다는 사실. 커다란 하나가 빛나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시간을 작은 부분들을 위해 노력해야 하는지를 깨닫게 됩니다.    


“Freundin, 세상 어느 단어보다도 다정한 느낌을 주는 낱말. 그러나 때로는 이 부드러운 단어가 얼마나 날카롭게 사람의 가슴을 찌를 수 있는지. 세상의 모든 아름다운 것들은 실은 얼마나 우리에게 상처가 될 수 있는지.”

   

비가 내리다가 밝은 햇살이 내비쳤다가 다시 하늘이 새까매지면서 천둥이 치고 번개가 번쩍거리는 이상한 날씨입니다. 마치 비의 교향악이 펼쳐지듯. 심벌즈와 팀파니와 현악기의 앙상블이라고 할까.     


2007 5.18    산비      



글을 쓰다 보면 맞춤법이나 띄어쓰기가 여간 신경 쓰이는 일이 아닙니다. 요즘은 한글 워드의 성능이 좋아져서 웬만한 오자나 띄어쓰기의 잘못을 잡아내기도 하지만 그래도 매번 이게 맞나 저게 맞나 어려움을 겪습니다.  

   

그중 ‘부딪히다’와 ‘부딪치다’가 어떤 것이 맞는 말인지 혼란스러웠는데 이번에 확실한 개념을 잡고 기쁨을 얻었습니다. 결론은 둘 다 맞는 말입니다. 다만 쓰임새가 조금 다를 뿐. ‘부딪히다’는 피동사입니다. 즉 뭔가가 다가와 나에게 부딪히는 것입니다. ‘자전거가 트럭에 부딪혀 박살이 났다’ 그리고 ‘부딪치다’는 자동사입니다. 내가 어디다가 부딪치는 것입니다. ‘전봇대에 머리를 부딪쳤다’ 이 작은 깨달음 하나를 얻고 너무 기뻐 그 즐거움을 프로네 님에게도 전합니다.    


“인생에 불안이 있는 건 당연한 거야. 중요한 건 그 때문에 자신감을 잃어버리거나, 근거 없는 소문에 휘말리거나,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입히지 않는 거야.”    


삶은 늘 불안정합니다. 예기치 못한 일들이 벌어져 근심 걱정을 만들어냅니다. 그러나 지나고 보면 그때 왜 그렇게 힘들어했을까, 싶어 집니다. 삶은 여전히 그대로 우리 앞에 놓여있을 뿐인데. 내가 가진 불안감 때문에 상대를 의심하고, 오해하고, 넘겨짚어 상처를 주는 일은 없어야 하겠습니다.    


“텅 비우려는 강박에서 벗어나니 홀가분해. 이젠 자연스러운 소유의 즐거움을 알 것 같아. 아름다운, 꼭 필요하진 않더라도 어쨌든 어딘가에 필요한 물건이 주는 소박한 만족감을 나는 누리고 있어”    


‘무소유의 행복’이 진리이기는 하지만 무엇인가 비워내야만 한다는 강박감을 가지게 되면 그것이 오히려 삶의 구속으로 다가옵니다. 자연스러움. 있는 것과 없는 것을 구별하지 않는 편한 마음. 있는 듯 없는 듯, 필요한 듯 필요하지 않은 듯한 물건들의 소박한 존재감. 그것에 만족하며 그렇게 그렇게 살아갑시다.    

   

2007 5.22     산비      



“그렇게 하면 살 수 있는데도 그렇게 하지 않고, 그렇게 하면 죽음을 피할 수 있는 데도 그렇게 하지 않는 것은, 삶보다 더 바라는 것이 있고 죽음보다 더 싫은 것이 있기 때문이다.”    


구차하게 목숨을 연명할 바에는 죽는 게 나을 수도 있고 죽음을 피해서 욕을 보느니 차라리 죽는 길을 택하는 것. 그것이 협객의 마음 자세라고 합니다. 비록 무협지에 나오는 가상 인물이지만 오늘 현재의 삶을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귀감이 되는 마음입니다.    


허나 우리의 문제는 삶이 아무리 곤고하고 비참하더라도 죽을 수는 없다는 것. 죽지 못해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무리 험한 시련이 닥쳐도 그 속에서 실낱같은 희망을 찾아 꿈의 싹을 틔우고 와신상담 다시 일어서야 합니다. 내일은 내일의 태양이 떠오를 것이므로, 봄은 겨울을 뚫고 기어이 오고야 마는 것이므로.

   

<황금 물고기>를 읽고 있습니다.    


저자는 삼십 대에 들어서는 것을 이 세상이라는 클럽의 준회원으로 있다가 정회원 자격을 얻게 되는 것에 비유합니다. 권태로움이 아니라 익숙해짐, 거창한 역사가 아니라 사소한 경험들, 예전엔 그리도 심각하고 목숨 걸 만큼 절박하던 일들이 지나고 보면 실은 아무것도 아니었음을 알게 된 데서 오는 느긋함, 웬만한 일은 큰 집착 없이 해낼 수 있을 것 같은 여유로움.    


그러나 사십 대에 들어선 지금의 시선으로 나의 삼십 대를 바라보면 그것은 또 얼마나 불안정하고 되는 대로였고, 허둥댐이었는지...    


“우리는 선택하지 않은 길에의 그리움을 품고서, 그러나 열심히 우리가 선택한 길을 걷는다. 가던 길을 되돌아간다 해도 우리는 예전에 선택할 수도 있었을 처음 그대로의 길을 만나지는 못한다. 내가 걸었고 걷지 않았던 수많은 길들은 어쩌면 어딘가 한 곳에서 만나고 있을지도 모른다.”   

  

인생에서 만나게 되는 수많은 갈림길, 언제나 한쪽을 버리고 한쪽을 선택하도록 강요받는 우리네 삶. 선택하지 못했던 길에 대한, 혹은 선택할 능력이 되지 못했던 자신에 대한 회한. 시간을 되돌릴 수는 없는 일입니다. 설령 삶을 물려서 그 자리에 돌아가 서 본들 이미 헝클어진 모든 것들을 원점으로 되돌릴 수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만 앞으로 나아갈 뿐입니다. 비록 조금 멀리 돌아서 가는 길이더라도, 다소 좁고 험하더라도, 포기하지 않고 열심히 걸어가면 결국 정상에서 만나게 될 것이라는 믿음을 간직한 채.    


한 사람의 진솔한 삶의 고백 속에서 미쳐 드러내 보이지 못했던 나의 모습을 봅니다.  한 영혼의 독백이 담긴 한 권의 책을 통해 내가 전에 알지 못했던 새로운 나의 모습을 발견합니다. 책을 읽으며 책을 잡은 손에 느꼈던 미세한 떨림들은 격한 흔들림으로 증폭되어 나의 영혼에 쌓여 있던 먼지들을 털어냅니다. 그것이 우리가 책을 읽는 이유가 아닐까요?    


2007 5.23    산비      


  

황시내의 <황금 물고기>를 계속 읽다가, 잠깐 김훈의 <남한산성>을 집어 들었습니다. 말이 말을 타고 넘나드는 말의 향연입니다.    


“말로써 말을 건드리면 말은 대가리부터 꼬리까지 빠르게 꿈틀거리며 새로운 대열을 갖추었고, 똬리 틈새로 대가리를 치켜들어 혀를 내밀었다. 혀들은 맹렬한 불꽃으로 편전의 밤을 밝혔다.”    


“사람의 마음에서 비롯하는 정처 없는 말과 사물에서 비롯하는 정처 있는 말이 겹치고 비벼지면서, 정처 있는 말이 정처 없는 말속에 녹아서 정처를 잃어버리고, 정처 없는 말이 정처 있는 말속에 스며서 정처에 자리 잡는 말의 신기루 속을...”    


참으로 특별하고 단단한 필력입니다. 김훈이 왜 ‘벼락처럼 떨어진 문단의 축복’이라고 추켜 새워지는지 여실히 알 수 있습니다. 황시내 씨의 글은 남성적인 김훈과는 완전히 대비되는 아주 감성적이고 서정적이고 여성적인 필체입니다.    


“그 맑아진 공간에 피아노의 한 음 한 음이 쌓여 거대한 음향 클러스터를 이루고, 그 덩어리가 나의 몸에 꽉 차 폭발할 것만 같은 두려움, 그리고 한편으로 가득 찬 충만함이 동시에 나를 관통해왔다. 음악이 처음 음악으로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저자는 어린 시절 밤마다 아버지의 서재 문틈으로 스며 나오던 클래식 음악을 들으며 잠이 들곤 하였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어떤 멜로디를 듣고 문득 벼락을 맞은 듯 음악을 온몸으로 느끼게 되는 전율을 경험합니다. 바로 베토벤의 <비창> 2악장을 들으며...

    

2007 5.22      산비       


 

황시내 님의 아름다운 삶의 기록 <황금 물고기>를 완독 하였습니다.

   

글이 감동적입니다. 처음 책을 집어 들며 가진 가문의 후광에 대한 우려는 기우에 불과했습니다. 책을 채 몇 장 넘기지 않고서도 단박에 그녀의 필력이 예사롭지 않음을 알 수 있었습니다. 문학적 자질도 DNA를 통해 유전되는 것일까요?    


이야기를 전하는 저자의 문체가 수려한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책 사이사이에 마치 말린 꽃잎 하나 끼워져 있는 것처럼 처리한 삽화들이 책을 더욱 돋보이게 합니다. 보기 좋은 떡이 먹기도 좋다더니, 아름다운 책이 읽기도 좋았습니다.    

     

문체가 정갈하고, 문장이 감미롭습니다. 책을 읽다 보면 마치 전혜린의 수필집을 읽고 있는 듯한 착각이 들기도 합니다. 배경이 독일인 것도 더해져서. 주로 과거를 회상하며 쓴 글들이지만 작가의 체험이 사실적으로 그려져 진한 감동과 여운을 느낄 수 있습니다. 글을 읽다가 잠시 눈을 감고 회한에 잠기게 하는 마력이 있습니다.  

  

생은 곧 삶입니다. 살음입니다. 살아감입니다. 울다가 웃다가 화도 내고 절망에 빠졌다가 잠이 들고 다시 아침을 맞습니다. 삶이란 두 다리의 허우적거림을 멈추면 쓰러지게 되는 자전거와 같습니다. 삶의 끝을 향해 열심히 달려갈 뿐입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는 삶 자체가 황금빛으로 빛나기를 갈망하며 달리고 있는 것인가요? 아니면 혹, 황금으로 만든 물고기를 얻기 위해 달려가고 있는 것은 아닌가요?     


2007 5.26     산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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