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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산비 Feb 22. 2019

위대한 개츠비

F. 스콧 피츠제랄드의 <위대한 개츠비>를 읽기 시작했습니다.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주인공은 ‘개츠비’의 이웃에 사는 ‘나’입니다. ‘나’가 화자로 등장하여 상황을 묘사하고 생각을 늘어놓습니다. 화자는 개츠비의 미소를 보고 이렇게 표현합니다.    


“잠시 동안 영원한 세계를 대면한 듯한 미소였고, 또한 당신을 좋아할 수밖에 없으며 당신에게 온 정신을 쏟겠다고 맹세하는 듯한 미소였다. 당신이 이해받고 싶은 만큼 당신을 이해하고 있고, 당신이 스스로를 믿는 만큼 당신을 믿고 있으며, 당신이 전달하고 싶어 하는 최대한의 호의적인 인상을 분명히 전달받았다고 말해 주는 미소였다.”    


도대체 개츠비가 어떤 미소를 지었길래... 저도 그런 미소 한 번 지어보고 싶네요. 개츠비는 삶의 가능성에 예민한 감수성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그 예민한 감수성이란 희망에 대한 탁월한 재능이요, 다른 어떤 사람에게서도 일찍이 발견된 적 없고 앞으로도 다시는 발견할 수 없을 것 같은 낭만적인 민감성이었다고 화자는 전합니다.     


아주 오래전에 쓰인 소설인데 초반 도입부를 읽어보니 그런 생각이 전혀 들지 않을 정도로 속도감이 있습니다. 자만하지 않고 독서의 세계 속으로 더욱 매진하겠습니다.   

 

2007 6.14      산비



“죽고 1년만 지나도 오래전 일로 기억되는 사람이 있고, 세상 떠난 지 오래됐는데도 불쑥 나타날 것처럼 죽음이 실감 나지 않는 사람이 있다.”    


그 사람이 나의 삶에 얼마나 영향력 있는 사람이었었는지에 달렸겠지요. 사랑하는 이가 떠난 다음에야 그것이 사랑이었음을 알게 되는 것처럼, 그 사람이 세상을 떠난 다음에야 그 사람의 존재감을 실감하게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 사람에 대한 기억이 생생하여, 금방이라도 문을 열고 들어올 것만 같은 느낌이. 세상 떠난 지 오래됐는데도...


“쫓기는 자와 쫓는 자, 바쁜 자와 지쳐버린 자가 있을 따름이다.”    


소설이 이제 발단을 넘어 서서히 전개의 단계로 들어섰습니다. 개츠비가 누구인가에 대한 윤곽이 서서히 드러나고, 그가 왜 한적한 어촌의 대저택을 사서 이주하였는지, 왜 밤마다 화려한 파티를 벌였는지 연유가 밝혀지기 시작합니다.    


결국은 못다 한 사랑에 대한 연민이었습니다. 5년 전 어떤 이유로 인해 사랑하는 여인과 헤어질 수밖에 없었고, 이제 성공을 이룬 그가 그 여인을 찾아 나선 것입니다. “어떤 정열이나 순수함도 한 인간이 유령 같은 마음속 깊숙이 품은 것은 어찌할 수 없게 마련이다.” 소설은 이제 곧 위기와 절정에 이른 뒤 결말이 나겠지요. 그것이 소설의 구조이니까요.    


소설을 읽으면서 좀 더 품격 있는 책이나 지적 능력을 배가 시킬 수 있는 책을 읽어야 하는 것 아닌가 하는 자기 비하감이 듭니다. 그럴 필요 없겠지요. 세계문학전집에 빛나는 명작이니 교양인으로서 한 번쯤은 읽어두어야 하는 책을 보고 있는 것이라고 스스로를 격려해봅니다.  

      

그럼, 좋은 밤 되십시오.    


2007 6.15      산비    


 

“우리는 살아가면서 저마다 꿈을 꾼다. 하지만 그 꿈을 위해 끝까지 가보지도 않은 채, 길 중간에 멈춰 서서 그대로 늙어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    


조금 늦게 출발했더라도 우보천리의 마음으로 꾸준히 해나가면 언젠가는 정상에 도달하게 되겠지요. 설령 다다를 수 없다 할지라도 끝을 향해 꿈을 품고 걸었던 그 과정은 황금빛으로 빛날 것이며, 그러한 삶의 자세가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라고 믿습니다.


“소설에는 질문이 담겨야 한다. 우리는 세상에 와서 무엇을 하는가? 좋다는 것은 구체적으로 무슨 뜻인가, 도덕은 무엇인가, 우리의 임무는 무엇인가, 이 세상에서 우리가 얻는 즐거움의 근거는 무엇인가? 소설은 이런 문제들의 해답을 찾는 것이다.”    


노벨문학상을 받은 터키의 작가, 오르한 파무크의 말입니다. 그는 소설을 쓰면서 매번 위의 질문들을 떠올리며 단어로 표현한다고 합니다. 좋다는 것은 무슨 뜻이고, 즐겁다는 것은 무엇을 근거로 하는 것인지 곰곰이 따져볼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는 착하게 살고 싶다, 멋있게 살고 싶다고 말하면서도 정작 착함이란 무엇인지, 멋있다는 것은 무엇을 말함인지 알지 못합니다. 그것에 대해서 생각해본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멋있다는 것은 무엇일까? 이런 것에 대해서 깊게 생각해보는 것이 사유하는 것이며, 그것이 철학하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2007 6.19     산비        



F. 스콧 피츠제럴드의 소설 <위대한 개츠비>를 완독 하였습니다. 1920년대 미국을 배경으로 무너져가는 아메리칸드림을 예리한 필치로 그려낸 20세기 가장 뛰어난 미국 소설이라고 합니다. 미국에서는 필독서로 꼽히는 고전인 모양입니다. 여기저기 다른 책들이나 영화에서도 이 책이 언급되는 것을 자주 목격하게 됩니다. 그래서 이 책을 고른 것이고요.    


그러나 책을 다 읽고 난 뒤의 소감은 덤덤할 뿐입니다. 뻔한 주제에 뻔한 전개과정, 뻔한 결말이 갖는 도식적인 소설의 구조 때문일까요? 물론 “소설가에게 문제가 되는 것은 어떤 소재를 다루느냐가 아니라, 그 소재를 어떻게 다루느냐 하는 것이다.” 하는 역자의 변병을 차치하고라도 그렇게 커다란 감명이나 울림을 받지는 못했습니다.    


사랑의 속성에 대해서 한 번쯤 다시 생각해보는 계기 정도는 되었습니다. 이 소설을 10대의 후반이나 20대 초반에 읽었다면 아마 더 진하게 다가왔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독서의 공백, 간극을 매워보고자 지나간 세계문학전집에서 몇 권 추려 읽어본 최근의 독서는 다소 실망스럽습니다. 앞으로는 방향을 다소 바꿔 실질적으로 인식의 지평을 넓힐 수 있는 역사 서적이나 교양서적에 주력하려고 합니다.    


프로네 님이 좀 더 적극적으로 앞서가면서 책을 골라주시고 추천해주시면 고맙겠습니다. 내일부터는 임석재 님의 책 <우리 옛 건축과 서양 건축의 만남>을 본격적으로 읽어보겠습니다. 좋은 밤 되십시오.   

 

2007 6.19     산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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