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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산비 Feb 21. 2019

호밀밭의 파수꾼

제롬 데이비드 샐린저의 책 <호밀밭의 파수꾼 : The Catcher in the Rye>을 읽기 시작했습니다.


이 작품은 1951년 출간되자마자 전후 세대의 젊은 층을 사로잡으면서 베스트셀러가 되었고, 현재에도 매년 30만 부 이상 팔려나가고 있다고 합니다. 존 레넌의 암살범 마크 채프먼이 탐독했다고 해서 주목을 받기도 했습니다. 나온 지 오래된 문학 작품이고, 영화와 드라마, 신문 여러 곳에서 언급되는데 아직까지 읽어보지 못한 것이 부끄러워 책을 구입하였습니다. F. 스콧 피츠제럴드의 <위대한 개츠비>도 비슷한 동기로 함께 구입하였습니다.    


독서에 늦게 재미를 붙인 탓에 필독서의 목록에 갭이 있습니다. 청소년기에 반드시 읽었어야 할 세계문학전집에 실린 유명한 작품들을 놓친 것이 제법 있습니다. 지난번 <데미안>도 그렇고. 짬짬이 간극을 메워가려 합니다.

   

<호밀밭의 파수꾼>은 주인공 홀든 콜필가 학교에서 퇴학을 당하고 집에 돌아오기까지 며칠간 겪는 일들이 독백으로 진행되는 작품입니다. 출간 직후 청소년 금지 도서로 지목되었었다고 하는 데서도 알 수 있듯이 상당히 거칠고 반항적인 말투로 책이 시작됩니다. 제 취향의 글은 아니지만 열심히 읽어보겠습니다.    


오후에 잠깐 이런저런 생각들을 해보았습니다. 자신이 초라하게 여겨지고 자괴감이 드는 것은 꿈이 없고 성취가 없기 때문입니다. 꿈이 있으나 자신의 꿈에 대해서 자기 비하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다른 사람 보기에 부끄러워하는 것입니다. 제 이야기입니다. 그럴 필요 없다는 생각을 하였습니다. 전에는 늘 최적의 방법, 최단의 길을 통해 최고의 자리에 오르는 것만 생각했습니다. 티끌모아 태산 같은 멍청한 방법을 혐오하였습니다. 비난하였습니다. 스스로의 못남을 회피하려는 푸념일 뿐임을 깨닫습니다.    


지금 내가 제일 잘하는 일이 무엇인가를 생각해봅니다. 지금 내가 제일 재미있어하는 일이 무엇인가? 그 방면으로 계속해서 정진해나가면 되지 않을까요? 꼭 학문적인 업적을 쌓거나, 세속의 명성을 얻지는 못하더라도, 삶과 구도에 대한 책을 많이 읽고, 사랑과 행복에 관한 글을 많이 쓰고, 산과 달리기를 사랑하는 누구보다도 낭만적이었던 사람. 뭐, 이런 타이틀 하나쯤 얻을 수 있다면 생이 그렇게 초라하지는 않았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2007 6.1     산비      


       

“죽음이 언제 닥칠지 모르므로 인간은 항상 죽음을 인식함으로써 현재의 스스로의 삶을 끊임없이 반성하며 삶의 매 순간을 소홀히 보낼 수 없게 된다.”    


아침 길을 나서며 하늘을 한 번 올려다보셨는지요? 살갗에 닿는 바람의 감촉을 느껴보셨는지요? 푸른 나무가 뿜어내는 싱그러운 향내를 맡아보셨는지요? 볼 수 있고, 만질 수 있고, 느낄 수 있는 오감의 생생한 활동들. 그것이 뇌에 전달되고, 마음에 전해지고, 영혼에 도달하면 우리는 살아있음의 경이로움에 무한한 환희를 갖게 됩니다.    


J.D. 샐린저의 <호밀밭의 파수꾼>을 계속 읽고 있습니다. 주인공 ‘홀든 콜필드’의 좌충우돌하는 행적과 그의 심리 흐름에 대한 적나라한 묘사가 소설의 뼈대를 이루고 있습니다. 그런데 사실 좀 알쏭달쏭합니다. 아직 책을 끝까지 읽지 않아서 결론을 낼 수는 없지만, 이 책이 그렇게까지 유명해진 이유가 뭔지 의아하기만 합니다.  

  

물론 청소년기를 관통하여 어른이라는 무대의 문턱에 막 도달한 콜필드의 정신세계, 자아, 의식의 흐름 이런 것들을 잘 파악하고 진솔하고 적나라하게 묘사한 점은 인정하겠습니다. 그런데 책을 읽고 있으면 뭔지 모를 거북함이 스멀스멀 올라옵니다. 세대 차이일까요? 이제 도덕과 인습에 고착되어 버린 기성세대의 관점이 배어서 일까요? 제가 너무 늙어버린 걸까요?    


반항적인 듯하면서 비굴하고, 착한 듯하면서 못됐습니다. 거짓말을 밥 먹듯이 하고, 어른들을 골려줍니다. 싸우면 한 대도 못 때리고 쳐 맞고 뒤에 혼자 거울 보며 험악한 표정을 지어 보일 뿐입니다. 혼자 속으로 생각했다가 지우고 다시 엉뚱한 짓을 계획합니다. 변덕이 죽 끓듯 하고 되는 대로 행동합니다. 그것이 바로 그들의 모습일까요? 나는 안 그랬던 것 같은데... 생각해보면 그런 아이들이 있었던 것도 같고. 나도 때로는 그래 보고 싶었던 적이 있었던 것 같기도 하고.    


다 그러지는 않았지만, 가만 들여다보면 내 안에도 콜필드의 모습이 숨겨져 있었음을 깨닫게 됩니다. 그렇듯 감추고 싶었던 나의 자아가 작가의 손에 끌려 밖으로 나온 듯하여, 벌거벗겨진 듯 당황스럽고 거북해진 건 아닌가 싶습니다.        


몸 상태가 안 좋다고 하시니 걱정입니다. 편히 쉬십시오.     


2007 6.5         산비     



“저는, 사람이 사는 게 그저 ‘체험’ 같아요. 무엇을 깨우칠 것도 없고, 털어낼 것도 없고. 그저 내가 태어났으니 죽을 때까지 극진하게 체험하고 간다, 이런 거지요.”    


체험에는 직접 체험과 간접 체험이 있습니다. 우리가 책을 읽고 영화를 보면서 얻는 체험도 의미가 있지만, 몸으로 직접 부딪치며 깨닫는 체험에 비할 바가 아닙니다. 우리가 여행을 하는 것도 나만의 경험과 느낌을 축적하기 위한 방편일 것입니다.    


각자는 각자의 길을 갑니다. 설령 같은 길을 간다고 해도 거기서 얻는 느낌과 생각은 차이가 있습니다. 같은 것을 보아도 자신만의 특이한 사유체계에 의해 제각각 달리 반응합니다. 남들이 책에 써놓은 것들은 진정한 내 것이 아닙니다. 체화해서 자신의 내면에서 우러나오는 것만이 자신을 성숙하게 합니다.    


“사랑이 어찌 노력과 재능으로 되랴? 그것은 정말 운명이거나 우연인 것이다. 이것은 정말 딜레마다. 사랑이 주는 기쁨은 예기치 않음에서 오는데, 정작 그 예기치 않음 때문에 인간은 불안에 떨며 그것이 제 손아귀를 빠져나갈까 전전긍긍하는 것이다.”    


사랑은 노력으로 되는 것일까요, 아닐까요? 사랑은 경작하는 것이라지만 문제는 사랑의 씨앗입니다. 씨앗이 있어야 싹을 틔우던 경작을 하든 하겠지요. 밭을 아무리 갈아도 그 안에 씨앗이 없다면 결실이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이 사랑의 씨앗은 결코 노력으로 생겨나지 않습니다. 아무리 그 사람이 나에게 잘해주어도 그것은 호감이나 연민의 감정이지 떨림이나 설렘은 아닙니다.    


외사랑은 슬픈 사랑입니다. 큐피드의 화살을 한 사람만 맞는다는 것은 비극입니다. 그래서 사랑은 때로 눈물의 씨앗이 되기도 합니다. 받아들여지지 않는 사랑은 괴롭습니다. 아픕니다. 심장을 도려내는 것처럼. 그 아픔과 괴로움을 초월적인 사랑으로 승화시킬 수 있다면 그나마 나름대로 행복한 엔딩입니다.    


그러므로 서로 사랑한다는 것은 얼마나 큰 축복입니까?나를 진정으로 이해하고 사랑해주는 단 한 명의 사람을 이 우주 안에서 만날 수만 있다면, 서로가 서로를 완전히 공감하고 교감할 수 있다면 그보다 더한 극치의 행복은 없을 것입니다.     


그리하여 완전한 사랑에 이르게 되면 서로에 대한 깊은 신뢰와 이해로 어떠한 흔들림도 없이 시기하지 않고 자랑하지 않고 교만하지 않고 무례히 행치 않으며 온유하게 배려하고 늘 감사하며 기쁨에 찬 사랑을 나눌 수 있게 될 것입니다.    


2007 6.8        산비         



“나는 사랑하고 있는 걸까? 그래, 기다리고 있으니까. 그 사람, 그 사람은 결코 기다리지 않는다. 때로 나는 기다리지 않는 그 사람의 역할을 해보고 싶어 다른 일 때문에 바빠 늦게 도착하려고 애써본다. 그러나 이 내기에서 나는 항상 패자이다. 무슨 일을 하든 간에 나는 항상 시간이 있으며, 정확하며, 일찍 도착하기조차 한다. 사랑하는 사람의 숙명적인 정체는 기다리는 사람, 바로 그것이다.” - 롤랑 바르트


JD 샐린저의 성장소설 <호밀밭의 파수꾼>을 완독 하였습니다.     


내 안의 소년은 이미 죽은 모양입니다. 다 읽고 나서도 별 다른 감흥을 느낄 수가 없습니다.  다른 성장소설을 읽을 때에는 약간 움찔거릴 정도는 영혼의 흔들림이 있었는데, 이 소설을 읽고 나서는 감감할 뿐입니다. 아마 제가 놓치고 있는, 우리와는 다른 미국적 문화 배경이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듭니다. 사실 히피문화에 대한 이해도 부족한 편입니다. 아무튼 성장소설이 갖는 의미에 대해서 다시 한번 생각해보는 기회는 되었습니다.  

  

‘인간은 아무도 무사히 자라지 않는다.’ 내 청춘을 방황하게 했던 두려움과 좌절감은 내 가슴에 어떤 생채기를 만들어 놓고 사라졌을까요? 비교적 순탄하게 자라왔다고 생각하지만, 그래도 알게 모르게 입은 상처들로 내 영혼의 어느 한 구석에 흉이 만들어져 있겠지요. 그리고 아물었다고 생각했던 그 상처도 다시 건드려지면 언젠가 도 모르는 사이에 덧나게 될 거고요.   


2007 6.13       산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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