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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산비 Feb 25. 2019

곰브리치 서양 미술사 1

 

“나이를 먹고 경험이 쌓일수록, 그 경험을 스스로 객관화해야 한다. 아니면 도덕과 계몽의 함정에 빠지기 십상이다. 그렇지 못한 어른들을 우리는 꼰대라고 부른다. 철학은 생각의 무기이자 두뇌의 보톡스 주사이다. 어쩌면 이런 게 철학의 존재 근거 중 하나가 아닐까.”    


나만의 독선으로 빠지지 않기 위해서는 경험의 객관화가 필요합니다. 나의 길을 당당하게 걸어가야 하지만, 그 길이 옳은 길인지에 대해서 끊임없이 스스로에게 묻고 고민한 후 다시 자신에게 되먹이는 작업이 필요합니다. 그 일은 생이 종착역에 다다르는 마지막 순간까지 계속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평생 공부해야 하는 이유입니다.    


곰브리치의 <서양 미술사>를 집어 들었습니다. 프로네 님의 손길과 눈길이 느껴져 더욱 진지한 애착을 가지고 책을 읽게 됩니다.    


뒤러의 <산토끼> 그림과 렘브란트의 <코끼리> 그림에 대한 설명을 읽으며, 앞전에 우리 옛 건축의 묘미에 대한 임석재 님의 해석을 들으며 품었던 회의적인 생각들이 조금 희석됩니다.


화가가 어떤 것을 그림으로 묘사할 때 그것을 ‘정확하게’ 그릴 수 있는 충분한 지식을 가지고 있지만, 선 몇 개로 스케치를 해놓거나, 약간의 왜곡을 가한다고 해서 그 아름다움이 훼손되지 않듯이, 우리 선조들도 반듯하게 돌을 깎을 능력을 가지고 있었지만, 게을러서가 아니라, 예술적 안목에 의해 일부러 미가공의 미를 추구했다는 설명이 가능해집니다.    


“아름다운 것에 관한 문제는 무엇이 아름다운 것이냐에 관한 취향과 기준이 그처럼 다르다는 데 있다. / 한 작품이 가지고 있는 아름다움은 그 소재가 가지고 있는 아름다움 속에 있는 것이 아니다. / 일상생활에서 바람직하지 않은 성격으로 보이기 때문에 억제되거나 감추어진 것이 미술의 세계에서는 그 자체의 가치를 발휘할 때가 많다. / 미술가가 진정으로 추구하는 바를 우리가 이해하기 시작하는 것은 ‘제대로’라는 단어를 이해할 수 있을 때이다. / 작품들을 감상하기 위해서 우리는 모든 암시를 포착하고 숨겨진 조화에 감응하려는 그런 참신한 마음가짐을 지녀야 한다.”    


“참신한 눈으로 그림을 보고 그 그림 속에서 새로운 발견의 항해를 감행한다는 것은 그보다 훨씬 어려운 일이지만 더욱 값진 일이다. 우리가 그런 여행에서 무엇을 얻어가지고 돌아올지는 아무도 예견할 수 없다.”    


어디선가 보았던 그림과 조각들을 다시 보는 즐거움이 있습니다. 건성으로 보았던 작품들을 면밀히 들여다보게 됩니다. 대가의 의미심장한 설명이 곁들여지니 깨달음의 기쁨이 충만해집니다. 직접 가보지 않고도 보물 같은 작품들을 접하는 즐거움과 책에서 본 작품들을 직접 가서 보고 싶다는 열망이 교차합니다. 책 속으로 자꾸만 빠져드는 느낌입니다.    


편안한 밤 되십시오.    


2007 6.26      산비       


  

“인생이란 뒤쪽으로만 이해할 수 있는 것 운전속도가 아무리 빠르고 거리가 멀어도 우리는 과거를 절대 벗어날 수 없다. 과거는 우리 뒤쪽에 있지만 언제나 백미러에 담겨 있다. 과거의 영상은 점차 작아져야 할 것 같지만, 인생의 주행거리가 멀어질수록 오히려 더 가깝게 다가올 때가 있으니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과거는 언제나 한눈에 들어오는 거리에 있다. 늘 그만큼의 거리로 우리를 좇는다. 그 거울 속의 영상은 우리가 가던 길을 안전하게 재촉할 수도 있고, 혹은 우리를 도랑에 처박히게 할 수도 있다. 그것이 추억의 힘이다.”    


“나이가 들수록 백미러의 영상이 더 커 보인다. 너무 크게 확대되어 차를 멈추고 방향을 돌려 다시 돌아가야 할 때도 있다. 돌아가서 과거가 내게 원하고 요구하는 것이 무엇인지 보아야 한다. 돌아가서, 잊어버리고 무심코 뒤에 남겨둔 것이 무엇인지 보아야 한다. 돌아가서 그것을 찾아 손에 올려놓고 유심히 살펴야 한다. 그때에야 영혼의 여정에 다시 오를 수 있다.” - 첸 가이거의 <영혼의 창> 중에서.    


과거는 뒤쪽으로 지나갔지만 언제나 그만큼의 거리에서 우리를 쫒아오고 있습니다. 차선을 바꾸며 앞으로 나가기 위해서는 백미러를 통해 뒤를 돌아볼 수밖에 없습니다. 지금까지의 과거는 대부분 우리 힘으로는 어쩔 수 없는 불가항력적인 것이었습니다. 우리가 부모를 선택할 수는 없으며 고향을 선택할 수도 없는 일입니다. 주어진 대로, 정해진 코스에 따라 대학에 가고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고 지금까지 살아왔습니다.   

 

그러나 지금부터 만들어가는 과거는 많은 부분의 책임을(혹은 전적으로) 우리가 져야 합니다. 우리는 이제 우리의 의지대로 삶을 바꿀 수 있는 힘과 지위를 가지고 있습니다.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심지어는 부모의 의지에 반해서 행동할 수 있는 자유의지를 갖추고 있습니다. 다만 아직도 용기가 부족할 뿐입니다.    


잘못된 삶의 태도를 교정하고, 나쁜 습관을 고치고, 내 마음속의 자아가 나아가기를 원하는 방향으로 우리 삶을 주도적으로 이끌어 갑시다. 내 주변의 환경을 탓하지 맙시다. 그것은 당신의 잘못이 아닙니다. 그것은 그대로 인정하고, 대신 내게 주어진 상황 속에서 내 의지대로, 내 의도하는 바대로 삶을 보듬고 가꾸어갑시다. 하루하루를 치열하게 우보천리의 마음으로 정진해 나가면 훗날 알찬 결실을 맺게 될 것을 믿습니다.    

 

2007 6.27      산비



“자학은 남을 괴롭히기 위한 게 아니라 세상을 겸손하게 이해하기 위한 혹독한 극기이다.”

“불행한 사람은 못 가진 것을 사랑하고, 행복한 사람은 갖고 있는 것을 사랑한다.”    


내가 가지고 있지 못한 것도 많지만, 곰곰이 생각해보면 내가 가지고 있는 것도 참 많습니다. 남들도 다 가지고 있고 나도 가지고 있는 것도 있고, 남들은 가지고 있지 않지만 나만 가지고 있는 것도 있습니다. 그것을 고마워하고 자랑스러워해야 합니다.    


우르릉 쾅쾅. 번쩍번쩍. 장대비가 쏟아지고 있습니다. 가슴이 후련해지는 비의 함성이 들려옵니다. 비가 오는 날은 뭐든지 더 진하고 감미롭습니다. 음식도 더 맛이 나고, 술도 더 걸쭉하게 목을 넘어갑니다. 음악은 울림이 더 하고, 책도 더 진중한 자세로 읽게 됩니다. 비가 오면 사람이 더 감성적이 되는 연유겠지요. 이성과 감성은 두 용의 머리가 되어 서로 앞서거니 뒤서거니 회오리치듯 휘감아 오릅니다. 오늘 같이 비가 내리는 날은 감성의 용이 득세하는 날입니다.


미술의 흐름에 대한 감이 조금 잡히는 듯합니다. 이집트에서 기원한 미술이 고대 그리스와 로마 그리고 헬레니즘을 거쳐 간다라에 이르기까지를 공부했습니다.    


발을 정면에서 본 것으로 그리는 시도야말로 미술사상 엄청나게 중요한 순간이라는 말이 인상적입니다. 있는 그대로의 자연적 형태와 단축법을 발견한 것도 미술의 대혁명이며, 영혼의 활동을 포착하여 표정이나 몸짓으로 표현하는 법을 터득한 것도 상당한 의미를 갖습니다.    


로마 건축에서 가장 특징적인 것이 ‘아치’의 사용입니다. 이것이 발전하여 더욱 대담한 건축을 선보이게 되고 돔 형태의 지붕을 건설할 수 있게 됩니다. 12세기에 지어진 앙코르의 유적들도 완전한 아치를 구현하지 못했는데, 기원 초기의 로마 시대에 아치 기술을 터득했다는 것이 놀랍기만 합니다.    


아이콘의 어원이 되는 ‘이콘’도 관심의 대상입니다. 인터넷에 찾아보니 주로 그리스도, 성모, 성자의 상(像)을 그린 예배용 화상을 말하며, <형상>을 뜻하는 그리스어의 eikon에서 유래한다고 합니다. 동방교회 문화권에서 발달한 것으로, 비잔틴 미술에 속하는데, 소재는 템페라 기법을 사용한 널빤지 그림이 주류이며, 모자이크 등으로도 제작된 일이 있다고 합니다.    


러시아 이콘은  별도로 취급됩니다. 러시아에서 이콘 숭배가 급속히 퍼진 배경에는 그 이전의 이교도 신앙과 미묘한 관계가 있다고 합니다. 즉 상당히 오랜 기간에 걸쳐 일반 민중 사이에 국교인 그리스 정교와 이교(異敎)의 <이중 신앙>이 계속되었기 때문에 이교의 요소를 가미한 이콘을 제작함으로써 이교로부터의 개종을 용이하게 했다고 합니다. 이들 이콘은 러시아인의 신앙생활과 밀접히 결부되어 있어서 러시아인의 정신 형성에 지대한 영향을 주었다고 하네요.    


<다빈치 코드>에서 이교도의 상징이 다루어지면서 이 ‘이콘’이 언급되었던 기억이 납니다. 미술사를 공부하면서 살짝 비치는 기독교 초기의 시대 상황과 로마의 역사에 대한 궁금증이 더해집니다. 아무래도 시오노 나나미의 <로마인 이야기>를 읽어야 하지 않을까 싶군요. 프로네 님 생각은 어떠신지요? 너무 방대한 책이라 시작하기가 두렵기도 합니다. 조언을 부탁드립니다.    

 

흐린 날씨가 기분을 꿀꿀하게 하고 끈적끈적한 날씨가 불쾌지수를 높이고 있지만, 서양미술의 기원과 역사를 탐닉하는 재미로 극복하고 있습니다.    


평안한 밤 시간 되십시오. 그럼.    


2007 6.28  당신의 영혼의 동반자  산비로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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