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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산비 Mar 05. 2019

그 섬에 내가 있었네


“사람들은 색에서 기쁨을 느낀다. 눈은 빛을 필요로 하는 것처럼 색을 필요로 한다. 흐린 날 태양이 어딘가를 비춰 색이 나타나게 만들었을 때의 상쾌한 기분을 기억하라. 황색은 빛에 가장 가까운 색이다. 황색은 명랑하고 활발하며 따뜻하고 안락한 느낌을 준다.” - 괴테    


색에도 소리가 있다고 하셨지요? 색에 소리가 있고 마음이 있고 느낌이 있어 우리가 그것을 보고 명랑해지기도 하고 따뜻해지고 편안해지고 하는 모양입니다.    


어제부터 김영갑 님의 책 <그 섬에 내가 있었네>를 조금씩 읽기 시작했습니다. 김영갑 님은 제주도에 매혹되어 그곳에 정착해 20년 동안 제주의 사진만 찍은 사람입니다. 나중에 근육이 위축되어 가는 루게릭 병에 걸려서도 불굴의 정신으로 폐교된 초등학교에 ‘김영갑 두모악 갤러리’를 만듭니다.     


건축사 책이 너무 딱딱해서 머리를 식힐 겸 몇 쪽씩 읽고 있습니다. 책 사이사이에 제주의 풍광을 담은 사진들이 정말 예쁩니다. 주로 중간 산지역의 초원들을 찍은 사진입니다. 사진 속의 들판을 보고 있으면 바람이 느껴집니다.


가는 바람, 흐느끼는 바람, 세찬 바람, 어느 정도 세기의 바람이 부는지 사진만 봐도 알 수 있습니다. 같은 장소에서 같은 배경으로 사진을 찍어도 색감의 차이에 따라 느끼는 감흥이 달라지고 세월의 흐름, 계절의 변화를 느끼게 됩니다.    


연일 회색빛 아침입니다. 그러나 눈부시게 찬란한 태양과 눈이 시리게 푸른 하늘이 곧 우리 앞에 나타날 것입니다. 가을이니까요.  


2007 9.5       산비     



임석재 서양건축사 2권 <기독교와 인간> 편을 완독 하였습니다. 전문 용어들이 빈도 높게 섞여있어 조금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나중에는 본론은 집중해서 읽고 개별적인 교회들의 세부적 설명들은 속독하며 중요 부분만 캐치해서 읽었습니다. 3권, 4권이 나오면 끈기 있게 읽어나갈 수 있을지 자신이 없습니다.    


머리를 식히는 의미에서 김영갑 씨의 <그 섬에 내가 있었네>와 홍은택 씨의 <서울을 여행하는 라이더를 위한 안내서>를 가볍게 읽고 <지중해 철학 기행> 책을 잡아볼까 합니다.    


“자전거 타기는 바람에 얼굴을 씻는 즐거움이었고 숲의 향기에 흠뻑 젖는 즐거움이었다. 미래가 불투명했던 시절, 자전거 타는 것 외에 다른 아무 목적이 없었을 때가 가장 행복했다. 자전거는 내게 공간 이동의 자유뿐 아니라 나를 둘러싼 모든 것으로부터의 자유를 줬다. 지금은 자전거 타기, 그 자체보다 자전거를 타던 그때의 질박한 생활이 그리운 것인지도 모른다.”    


책은 이야기입니다. 그 이야기가 우리가 일상적으로는 흔히 접할 수 없는 분야에 대한 것이거나, 우리가 접하던 것들이지만 전혀 새로운 시각에서 바라본 것일 때 읽어볼 만한 가치를 지닌 한 권의 책이 됩니다. 자전거를 타고 다니는 사람은 많지만 라이더의 시각으로 서울의 풍경과 속 모습들을 바라보고 이야기한 사람은 없었습니다. 그래서 흥미를 느끼게 됩니다. 열심히 읽어보겠습니다.  

  

비가 내립니다. 비를 맞으며 한강까지 달려보려 합니다. 내리는 비를 보는 보기는 쓸쓸하지만, 직접 비를 맞는 것은 신나는 일입니다. 미친 짓이기는 하지만  나는 절대 미치지 않았습니다. 괴롭고 힘든 일이 아니라 즐겁고 신나는 일입니다. 달리는 동안만은 잡념을 떨치고 무상의 세계에 이를 수 있어서 좋습니다.    


2007 9.5  비 오는 수요일   산비        


   

“내가 느낀 사진의 가장 큰 매력은 그 친절함에 있었다. 우리의 분주한 마음이 그저 흘려버리는 순간들을 어떤 이미지로든 잡아 가두는 친절함을 사진은 지니고 있었다. 때로는 우리가 기억하고 있는 순간에 대한 의미마저 바꾸어 놓을 수 있는 힘을 지니고 있는 것만 같았다.”    


“사진은 이미지의 미라이다. 내가 원하는 사진은 박제된 동물이나 새가 아니다. 새의 생김새나 크기를 설명하기 위해 사진을 찍는 것이 아니다. 새가 숲에서 즐겁게 노래하는 모습, 무리끼리 지저귀는 소리에 숲의 분위기가 달라진다. 나는 그런 숲의 분위기를 사진으로 표현하려 한다.”    


“사람들은 대개 노을 사진을 찍을 때 해가 수평선 너머로 잠기면 카메라를 챙겨 돌아온다. 그러나 십오 분쯤 후의 노을은 더욱 장관이라는 것을 그들은 모른다. 그 황홀한 아름다움은 단 이삼 분 안에 사라진다.”   

 

사진은 순간의 아름다움을 포착하는 작업입니다. 정형화된 사물을 찍지만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그것이 내뿜는 분위기와 황홀함을 표현해내는 것이 관건입니다. 한 때 사진을 배우고 싶다는 생각을 간절히 한 적이 있습니다. 그림을 그리는 재주는 없지만, 찍을 수는 있지 않을까 싶었지요. 자연의 아름다움을 잡아내는 감수성은 누구보다도 뛰어나다고 자부하니까요. 사진에 대한 책을 읽노라니 잠자던 사진에 대한 열망이 다시금 꿈틀 솟아오릅니다.


여전히 흐린 하늘입니다. 바람도 이제 쌀쌀한 기운이 느껴질 정도로 차졌습니다.

건강 조심하십시오. 그럼.    


2007 9.6     산비        



“순간순간 다가오는 고통을 극복하지 못해 이 길을 포기하고 다른 무엇을 선택한다 해도 그 나름의 고통이 뒤따를 것이다. 다른 일을 선택해 환경이 변한다 해도, 나는 나이기에 지금 겪고 있는 마음의 혼란을 벗어날 수 없을 것이다. 지금 여기에서 이 물음에 답을 얻지 못한다면 어디를 가나 방황하고 절망하기는 마찬가지일 것이다. 피하기보다는 정면으로 돌파해야 한다. 그것이 어떤 것이든 분명 끝은 있을 것이다.”  

  

“좋은 사진을 찍겠다는 욕심을 이제는 버려야 한다. 안개 자욱한 들판에서 삽시간의 황홀을 기다리는 즐거움도 잊어야 한다. 칼바람 견디며 오름에서, 바다에서, 가쁜 숨을 참은 뒤에만 느낄 수 있는 행복도 이제는 추억으로만 만족해야 한다.”    


“살고 싶다고 해서 살아지는 것도 아니요, 죽고 싶다 해서 쉽사리 죽어지는 것도 아니다. 기적은 내 안에서 일어난다. 내 안에 있는 생명의 기운을, 희망의 끈을 나는 놓지 않는다. 사람의 능력 밖의 세계를 나는 믿는다.”  

  

서서히 시들지 않고 때가 되면 송이 째 뚝 떨어지는 동백꽃처럼 살고 싶어 했던 사진가 김영갑은 지독한 가난 속에서 젊은 날 몸을 혹사하다가 결국 루게릭 병을 얻어 6년 동안 투병하며 서서히 시들다가 2005년 5월 29일 영면했습니다. 어쩌면 몸은 시들어갔지만 정신만은 화려하게 꽃 피우다가 송이 째 떨어지듯 갔는지도 모르겠습니다.    


팔의 근육들이 녹아들어 더 이상 사진을 찍을 수 없게 되자, 그는 자신이 찍은 사진과 필름들을 오랫동안 보전하기 위해 갤러리를 만들 것을 결심합니다. 폐교된 학교를 임대해서 불편한 몸을 이끌고 불굴의 의지로 갤러리를 꾸미고 정원을 조성해나갑니다. 모든 사람들이 비웃고 동정하며 말렸지만 그는 마침내 1년 만에 갤러리를 완성합니다.    


“하나에 몰입해 있는 동안은 오늘도 어제처럼 편안하다. 하루가 편안하도록 오늘도 하나에 몰입한다. 절망의 끝에 한 발로 서 있는 나를 유혹하는 것은 오직 마음의 평화이다. 평화만이 나를 설레게 한다.”


근육을 움직일 때마다 견딜 수 없을 정도의 통증이 몰려와 고통스러웠지만 그를 살아 움직이게 한 것은 열정과 몰입이었습니다. 그리고 몰입은 작지만 아름다운 결실을 일구었습니다.    


지지리도 궁상맞고 궁핍한 생활이었지만 사진에 대한 열정 하나만으로 이십 년의 세월을 버텨온 작가 정신에 찬사를 보냅니다. 그가 찍은 사진 속엔 바람이 있습니다. 바람의 숨결이 느껴집니다. 나무와 풀과 구름이 바람에 나부낍니다. 그 순간을 잡아내기 위해 그는 얼마나 오랜동안 참고 기다렸을까요?    


글 내용은 그렇게 썩 감동적이지 않고 문체의 힘도 없지만, 제주의 들판을 사랑했던 한 영혼의 인생역정에 대한 쓸쓸한 애상을 갖게 하는 책입니다. 하루 종일 비가 내리더니 이제 개어가는군요. 빠르게 흘러가는 구름 사이로 파란 조각보 하늘이 언뜻 비치네요. 평안한 밤 되십시오.    


2007 9.6      산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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