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취를 욕구로 나누면 행복의 값이 나온다고 합니다. 분모인 욕구가 무한하면 아무리 성취해도 그 값은 영이 되어 전혀 행복을 못 느낀다는 것이죠. 결국 욕망을 줄이는 것만이 행복에 이르는 지름길임을 알 수 있습니다.
플라톤은 행복의 조건으로 다섯 가지를 꼽았습니다. 재산은 먹고살기에 조금 부족하고, 외모는 모든 사람이 칭찬하기에 약간 떨어지고, 명예는 자신의 생각보다 절반밖에 인정받지 못하고, 체력은 남과 겨루었을 때 한 사람에게는 이기돼 두 사람에게는 지고, 말솜씨는 연설을 할 때 청중의 절반 정도가 박수를 치면 된다고 했습니다.
결국 행복은 꽉 채우기보다는 약간 부족하고 모자라는 것을 감사하고 만족해하는 마음 자세에서 비롯됩니다. 작은 일에도 최선을 다하고, 사소한 도움에도 감사할 줄 알고, 나를 내세우지 않고 이웃을 배려하고, 자연과 더불어 살아가는 마음의 여유를 갖는다면 행복하게 살 수 있을 것입니다.
클라우스 헬트의 <지중해 철학 기행>을 읽기 시작했습니다. 오랜만에 인문학 서적을 잡으니 의욕이 불끈 솟습니다. 서양미술사와 서양건축사를 공부한 것이 기반 역할을 하기도 하고, 가졌던 의문들에 대한 답을 얻을 수 있는 기회가 될 듯도 합니다.
임석재 님이 서양건축사를 집필하면서 책의 수준에 대해서 고민했듯이, 클라우스도 쉽게 설명하면서도 ‘통속적 설명’이라는 암초를 우회해서 항해하려고 노력했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그렇듯이 책이 간명하고 쉽게 구술되어 있습니다.
학문은 밀레토스에서 기원전 6세기경 발생했다고 합니다. 철학은 학문과 동시에 발생했다가 기원전 4세기 아리스토텔레스에 이르러 학문과 나누어집니다. 철학이 생겨난 것은 사람들이 일상적인 생계유지를 넘어서서 어떤 것을 깊이 생각할 수 있는 ‘여유’를 가질 수 있었기 때문이라네요.
감추어진 것, 숨겨진 것, 어둠에 싸여있는 모든 것을 태양 아래로 끌어내 밝히고 명백히 하려는 경향이 바로 ‘알레테이아’입니다. 그리스어 ‘안다 wissen’는 ‘보았다’는 뜻입니다. 독일어 ‘테오리(이론)’는 ‘본다’는 뜻입니다. 결국 학문에서 문제가 되는 ‘안다’는 것은 세계를 바라보는 시선을 지속적으로 갖는 것입니다.
초기 학문에서는 어느 영역을 막론하고 경험의 다양성 속에서 구속력이 있는 질서를 보장하는 통일성을 알아내는 것이 문제였습니다. 철학은 놀라움에서 비롯되었으며, 사유란, 이 놀라운 느낌에 전적으로 그리고 조건 없이 몰두할 때 생겨납니다.
학문의 역사상 최초의 법칙을 세운 사람은 ‘아낙시스만드로스’입니다. 그는 대립 쌍 개념을 제시했습니다. 헤겔은 과거의 철학이 우리의 현재 사유에 어떤 의미가 있는지 포착하고자 노력하였습니다. 헤겔은 지나간 사상의 결과물들인 개념적, 사상적 가능성의 거대한 창고를 이용할 수 없다면, 현재 사상은 생각조차 할 수 없음을 보여줍니다. ‘변증법’으로 그것을 설명합니다.
니체는 영원하다고 일컫는 삶의 자기 보존을 위한 모든 것들을 ‘가치’라고 부릅니다. 현대에 들어서 우리는 모든 가치들이 자신에 의해 만들어진 삶의 조건들일 뿐이요, 따라서 실제로는 아무것도 아님을 니체를 통해서 통찰하게 되었습니다.
‘안다’는 것은 그저 생각한다는 것이 아니라 참으로 있는 것을 인식하는 것입니다. 파르메니데스는 독사(doxa)와 알레테이아(진리)의 대비를 통해 일상적인 앎의 제한성을 격렬하게 공격합니다. 지금 현재 겉으로 드러나 있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을 함께 볼 줄 아는 능력을 ‘지성’이라고 부릅니다.
오늘 공부한 내용들입니다. 학문적으로 명쾌하게 명제를 정의 내려가는 과정이 재미있습니다. 철학사에 대해서 알아가는 즐거움이 있습니다. 그럼.
2007 9.13 산비
“현명한 사람은 들으면 알고, 똑똑한 사람은 보면 알지만 미련한 사람은 당해야 안다.”
어제도 말씀드렸지만, 지금 현재 드러나 있는 것과 드러나지 않은 이면을 함께 볼 줄 아는 능력을 ‘지성’이라고 부릅니다. 일상생활에 파묻힌 사람들은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존재를 인식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진리는 숨겨진 채로 있으며, 그 진리를 인식하는 것이 지성입니다. 지성의 역할은 존재를 자각하는 데 있습니다. 육안이 아니라 마음의 문을 열고 포괄적으로 사물을 보는 눈을 가져야 하겠습니다.
“우리는 학문이라는 말을 여러 앎으로 구성된 전체로 이해한다. 앎은 인식하는 데서 성립한다. 인식을 획득한 것을 배움이라고 부른다. 그런데 우리는 인식한 모든 것을 이미 갖고 있으며 따라서 배울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지중해 철학 기행>에서는 형이상학, 존재, 이데아, 요소의 개념과 언어의 탄생에 대해 공부했습니다. 인류 최초의 문자는 페니키아 문자이고 여기서 히브리 문자와 아라비아 문자가 발전해 나옵니다. 이것을 받아들여 그리스 문자가 그리고 여기서 라틴문자와 키릴 문자가 나옵니다. 페니키아 문자는 처음에 자음밖에 없었다고 합니다. 여기에 그리스 사람들이 기원전 7세기에 모음을 추가합니다. 이 대수롭지 않아 보이는 모음의 보충이 세계사적으로는 획기적인 사건이고, 충격적인 일이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모든 것들은 신들로 가득 차있다.”
현재는 기독교의 유일신론이 지배하고 있는 세상입니다. 다신교는 원시적이라는 편견이 확고합니다. 그러나 종교와 관련해 그리스 사람들이 정신적으로 미개하다고 간주할 그 어떤 권리도 우리에게는 없다고 헬트는 주장합니다.
그리스 신들의 태동을 그리스의 고대 어법에서 추론합니다. 그리스 어법에서는 신이 문장의 주어가 아니라 술어적으로 쓰였다는 것입니다. 즉 ‘... 이 신이다.’라고. 인간은 죽을 수밖에 없는 무력한 존재인데 반해, 죽음보다 우월한 강력한 존재에 대한 경험이 신으로 형상화됩니다. 우리의 생활세계 전체를 압도하는 아주 강력한 것이 신적인 것이며, 그것을 술어적으로 ‘그 신’, 때로는 ‘하나의 신’이라고 표현했습니다.
신을 드러나게 하는 것이 육체적 사랑이면 그리스 사람들은 압도하는 강력한 그 힘의 형태를 ‘아프로디테’라고 불렀으며, 전쟁을 통해 전체 생활세계를 지배하는 아주 강력한 형태를 ‘아레스’라고 불렀습니다. 완전한 작품을 성공적으로 해내고 무언가 다른 어떤 것이 도왔다는 느낌, 어떤 것이 자신에게 성공적으로 수행할 수 있는 능력을 부여했다고 믿는 능숙함과 탁월함의 신적 형태를 ‘아테나’라고 부릅니다. 생활세계의 공간을 채우고 생기 있게 하는 빛의 신적인 것을 ‘아폴론’이라고 부르고...
재미있습니다. 명료한 설명들이 인식의 지평을 넓혀줍니다. 한 줄 한 줄 머리에 새기며 열심히 읽어보려 합니다.
진중권 씨의 ‘미학 오디세이’는 대단한 책으로 보입니다. 책이 나오고 10년이라는 시간 동안 세대를 바꿔가면서 꾸준히 공감을 얻고 있다고 합니다. ‘90년대를 빛낸 100권의 책’으로 선정되기도 했다 하네요. 고전의 반열에 오른 이 책을 읽어봄으로써 아름다움에 대한 우리의 인식을 재정립해보면 좋겠습니다. 서양미술에 이어, 서양철학을 공부하고 있는데 이것이 ‘미학’의 세계로 연결되는 맥락이 자연스럽습니다. 서로 시너지를 일으키며 많은 도움이 될 것으로 여겨집니다.
2007 9.17 산비
<지중해 철학 기행>을 읽었습니다. 많이 읽지는 못했습니다. 진도가 더뎌서 조금 답답하기는 합니다. 이후로는 좀 더 전투적으로 몰아붙이며 읽어보려고 합니다.
‘거리두기’에 대한 가르침이 심오합니다. 우리는 빛이 있어야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더 중요한 것은 우리 눈과 보려는 것 사이에 틈새, 빛이 퍼져 나가는 공간이 있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무엇인가가 나타난다는 것, 나타나서 아름답다는 데는 거리가 전제되어 있습니다. ‘거리두기’는 세 가지를 포괄합니다. 첫째 사멸하는 존재가 불사의 존재에 대한 간격을 존중하는 것, 두 번째, 인간들 사이의 간격을 지키는 것, 곧 부끄러움과 존경심을 유지하는 것. 세 번째는 개별적인 인간이 자기 자신에 대해 거리를 두는 것. 이 거리 두기가 욕망과 열정에 휩싸여 방종으로 치닫는 것을 막아준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태도를 그리스 사람들은 ‘소프로시네(sophrosyne, 절제)’라고 부릅니다. 절제할 수 있는 삶의 자세를 배워야 하겠습니다.
“책을 줄줄 외울 때까지 읽고 또 읽는 것은 옛날 방식이다. 지금 세상에는 책이 차고 넘치니 어느 세월에 그 많은 책을 읽고 또 읽어 다 외운단 말인가? 하지만 가장 기본이 되는 성현의 경전만큼은 입에 달고 외워야 한다. 그저 외우기만 해서도 안 된다. 살피고 따지고 견주고 점검해서 내 몸과 마음에 피와 살이 되도록 해야만 한다. 잊지 않으려고 메모를 하고, 떠오른 생각을 기록으로 남겨 곱씹고 음미해야 한다. 그밖에 나머지 책은 그때그때 필요한 정보만 꺼내 쓰면 된다. 평생 가까이에 두고 스승으로 삼을 책 한두 권을 갖는 것이 독서의 큰 보람이요 행복이다." 정민 선생님이 최근 내놓은 책 <다산 어록 청상>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우리가 책을 읽고서 그것을 다시 끄집어내어 인용할 수 없다면 책을 읽은 것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단지 읽었다는 목록에 올라갈 뿐. 그래서는 아니 되겠습니다. 소설이야 가볍게 읽어도 그만이겠지만, 예를 들어 서양미술사나 서양건축사, 그리스 로마 신화, 이런 것들은 그 내용을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어야 합니다. 지금 읽고 있는 <지중해 철학 기행>도 머릿속에 깊이 새겨가며 읽어야 할 내용들입니다. 그래서 진도가 더딥니다.
명사와 부사로서 동시에 기능하는 ‘깊이’라는 단어에 대한 주목. 놀라운 발견입니다. 깊이 있는 공부, 깊이 있는 독서, 깊이 있는 사유, 깊이 있는 교제. 우리가 추구해야 할 덕목들입니다.
비가 잠시 그친 모양입니다. 그러나 하늘은 아직도 먹장구름들로 덮여있습니다.
2007 9.18 산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