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정관념을 갖고 저자의 의도를 수긍하면서 책을 읽는 것은 스스로의 생각하는 힘에 아무런 도움이 되질 않는다.”
일전에 주셨던 편지에서 해주신 말씀입니다.
타인의 지식에 더 신빙성을 두는 무비판적인 수긍은 사유의 힘을 기르는데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항상 앞뒤를 따져보고 그 이면을 파악하려고 노력하는 자세를 갖춰야 하겠습니다.
“미술은 문학보다 스펙터클 하죠. 그게 이해가 되던 안 되든, 한눈에 강박적으로 달려드는 속성이 미술에는 있다는 말입니다. 관념이 아니라 시각적이고 구체화된 방식으로 펼쳐지는 세계죠. 문학처럼 행간을 읽을 짬도 없이 이놈은 즉물적으로 덤벼듭니다.”
“그의 속과 나의 속의 차이를 짚어보는 것, 그림 보기의 요체는 이겁니다. 그의 아이디어가 이러저러할진대, 왜 저런 모습의 작품으로 나타났을까. 작품의 원형질인 아이디어가 작가의 손을 거쳐 나오기까지 어떤 곡절을 거쳤으며, 그 사연은 작품을 보고 있는 나와 과연 공감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인가.”
손철주의 <인생이 그림 같다> 서문에 나오는 글입니다. 그림은 우선 직관적으로 한눈에 다가오는 느낌이 중요하고, 그다음에 작품의 속을 들여다보며 곰곰이 따져보고 생각해보는 것이 관건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삶과 문화의 노련한 산책자 손철주가 그림을 통해 본 지극한 아름다움과 덧없음 그리고 즐김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놓았다고 합니다. 열심히 한 번 읽어보렵니다.
“사람은 볶기 전의 원두 같은 존재야. 저마다의 영혼에 그윽한 향기를 품고 있지만, 그것을 밖으로 끌어내기 위해서는 화학반응이 필요하지. 그래서 볶는 과정이 필요한 거야. 어울리면서 서로의 향기를 발산하는 거지.” - 스탠 틀러
얼마 전에 커피와 사랑의 공통점에 대해서 말씀해주셨지요. 그런데 사람 자체를 커피의 원두에 비유하기도 합니다. 커피가 가지고 있는 향기를 끌어내기 위해서 볶는 과정이 필요하듯이, 저마다 품고 있는 영혼의 향기를 발산하기 위해서도 서로 어울리면서 지지고 볶는 과정이 필요하다는 것이지요.
2007 11.29 산비
“시인 황지우는 “그대와 더불어 최선을 다해 잘 늙은 다음, 힘없는 소리로 ‘임자, 우리 괜찮았지?’라고 말할 수 있을 때, 사랑한다는 말은 그 때나 가서 할 수 있는 말일 거야”라고 했다. 정말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사랑을 말하지 않고 확인하려고 하지 않는다. 그저 보면서 즐거워할 뿐이다.”
‘최선을 다해 잘 늙기’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요? 꿈을 가지고, 목표를 세우고, 그 목표를 이루기 위해 오늘 하루를 열심히 사는 것. 그 하루하루의 최선이, 멋지게 늙어가는 최선의 방법 아닐까요? 그리하여 먼 훗날 우리도 서로에게 그렇게 말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우리 괜찮았지? 참 좋았지?”
“사람의 마음은 빙산처럼 수면 위로 나온 10%, 즉 인지할 수 있는 부분과 그 밑의 90%, 즉 인지할 수 없지만 분명 존재하는 부분으로 이뤄져 있다.”
물 밑의 90% 안에는 조절하기 어려운 욕망과 충동뿐 아니라 비논리적이고 자유로운 상상들로 가득하다고 합니다. 우리가 어린 시절부터 경험하고 체험한 것들, 막연히 꿈꿔왔던 모든 것들이 모여서 눈에 보이지 않는 마음속 세계를 이룹니다. 내 안에 축적된 온갖 경험과 창조성이 스스로를 잘 이끌어갈 것이라는 긍정이 우리 정신의 지평을 넓혀 주리라 믿습니다.
“천재란 남들보다 지식을 10년 먼저 배운 사람이 아니라, 지금껏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지식을 생산해 내는 사람이다.”
먼저 배우고 빨리 익힌 것만으로는 진정한 천재로 불릴 수 없습니다. 천재는 보통 사람들이 생각하지 못한 것들, 알고 있었지만 표현해내지 못한 것들, 기존의 것과는 완전히 다른 새로운 지식을 생산해내는 사람입니다. 정말로 상상력과 창의력이 뛰어난 사람을 말하는 것이죠. 세상은 1%의 천재와 9%의 천재를 알아본 사람에 의해서 발전해나갑니다.
2007 12.6 산비
“드라마 ‘워터 보이즈’에서 한 어른이 주인공에게 “일시적인 감정으로 공연을 진행한다면 가까운 미래에 후회하게 될 것”이라며 공연을 포기하도록 설득하는 장면이 나온다. 그러나 주인공은 “고교 3학년 여름은 단 한 번밖에 없다”면서 “다가오는 미래도 중요하겠지만 지금이 중요하다”라고 반론한다.”
가까운 미래에 후회하게 되더라도 지금 이 순간 내 마음이 원한다면 그것을 행해야 합니다. 대개의 경우 해서 후회하는 경우보다, 하지 않아서, 하지 못해서 안타까워하고 씁쓸해하는 경우가 더 많습니다.
“죽을 때까지 미혹을 못 떨치고 오로지 ‘저것’만을 바란다. 하여 ‘이것’이 누릴 만한 것임을 잊은 지가 오래되었다. 가버린 것은 좇을 수 없고, 장차 올 것은 기약하지 못한다. 천하에 지금 눈앞의 처지만큼 즐거운 것이 없다.” - 다산 정약용
사람의 마음은 간사해서 늘 남의 떡이 커 보이기 마련입니다. 자신의 처지는 초라하게 생각하고, 다른 누구의 처지는 부럽게만 여깁니다. 지금 나를 지탱하고 있는 ‘이것’들은 구박하고, 기약 없는 ‘저것’들을 쫒아갑니다. 빛나지는 않지만, 화려하지는 않지만 나와 오랜 세월을 함께 한 내 가방, 내 코트, 내 운동화, 연필, 책 받침대, 자전거... 기쁨과 슬픔을 함께 한 이웃들, 친구들, 사람들에 늘 감사하고, 즐거워하며 하루를 살 일입니다.
2007 12.10 산비
< 내 몸속에 잠든 이 누구신가 > - 김선우
그대가 밀어 올린 꽃줄기 끝에서
그대가 피는 것인데
왜 내가 이다지도 떨리는지
그대가 피어 그대 몸속으로
꽃 벌 한 마리 날아든 것인데
왜 내가 이다지도 아득한지
왜 내 몸이 이리도 뜨거운지
그대가 꽃 피는 것이
처음부터 내 일이었다는 듯이. /
벌은 꽃이 있어야 살아갈 수 있습니다. 꽃나무가 열심히 노력하여 꽃을 피워야 벌은 그 안에 들어가 꿀을 딸 수 있습니다. 그리고 꽃은 벌이 날아와 수정을 해주어야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꽃에게는 벌이 필요하고, 벌에게는 꽃이 필요합니다.
그러므로 그대가 꽃 피는 것이 내 일이기도 한 것입니다. 그래서 그다지도 떨리고 아득하고, 뜨거운 것입니다. 그대가 더 아름답게 피어날 수 있도록 더욱 열심히 격려하고 도와줄 것입니다. 당신을 위함이 곧 나를 위함이기에. 서로의 노력과 배려가 훗날 알찬 결실을 맺게 해 줄 것을 믿습니다.
2007 12.11 산비